타자 인생 3회차! 72화
11. 원더 보이 (7)
대한민국 중계석에 환호 섞인 채팅들이 쏟아지는 사이.
일본 중계석은 갑작스런 홈스틸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지금 한국이 스퀴즈 작전을 썼는데요. 이동엽이 번트를 대지 못했습니다.
-이건 명백한 작전미스죠. 김현중과 박유성은 이동엽이 번트를 댈 거라고 생각하고 달렸고요.
-그런데 미즈시마 게이의 플레이가 아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3루를 먼저 체크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만약에 공을 잡고 3루부터 돌아 봤다면 박유성이 홈을 파고드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지금 리플레이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아아, 3루가 비었네요.
-3루수 사카시마 쇼타가 스퀴즈에 대비해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트를 뺀 걸 봤다면 베이스로 복귀를 했어야 할텐데 아쉽네요.
-미즈시마 게이는 무리해서 2루로 송구를 했고 3루에서 홈을 노리는 박유성을 견제할 선수가 없었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으로는 세이프처럼 보이는데요. 이제 구심의 판정이 나옵니다.
-세이프네요. 한국이 선취점을 따냈습니다.
일본의 중계진은 악재가 겹치면서 실점을 한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모든 상황을 지켜 본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반응은 달랐다.
“뭐야? 대체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방금 홈 스틸 봤어? 봤냐고?”
“저 녀석 누구야? 한국의 1번 타자에 대해 아는 사람 없어?”
“저 녀석이 그 녀석이잖아. 히트 포 더 사이클!”
“어제 경기에서는 3연타석 홈런도 때려 냈다고!”
“저 녀석은 진짜야! 대체 어디서 저런 녀석이 튀어나온 거야?”
“여기 있다. 팍 유썬? 젠장! 아무튼 저 녀석은 내가 찍었어! 내가 침 발랐다고!”
만약 이 자리에 미셸 라슨이 있었다면 주변의 호들갑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홈스틸 자체는 멋지지만 어디까지나 팀 플레이로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지금 이 순간 박유성에게서 스타성을 봤다.
기본적으로 홈스틸은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발이 빠른 선수라 해도 투수가 던지는 공보다 빨리 홈플레이트에 도착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작전을 통해 홈을 훔칠 만한 상황을 만들어놓은 다음에 실행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수많은 변수들과 압박을 이겨낸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유성이 그걸 해냈다.
그것도 1회 초에 숙적 일본을 상대로 제 발로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이건 그만큼 메이크업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홈에서 횡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어떻게든 홈을 훔쳐 내 오늘 경기의 영웅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가 플레이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하아······. 내가 틀렸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녀석.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DNA 자체가 다르다고!”
다른 스카우트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빌리 게스파노는 처음부터 박유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라구치 유타가 투구판을 박차는 모습도 곁눈질로 봤다.
그 순간 박유성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에 박유성은 스킵을 하며 3루 베이스 라인의 중간 지점까지만 파고들었다.
홈스틸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새겨두고 미친 황소처럼 홈을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
혹시나 타자가 방망이를 늦게 빼다 번트 플라이가 나오는 상황까지 고려해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일본의 포수가 2루를 향해 공을 던지기가 무섭게 그대로 홈을 향해 내달렸다.
포수에서 유격수, 다시 포수로 이어지는 일본의 송구 플레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확했지만 박유성은 영리하게 포수의 뒷공간을 노렸고 일본 포수가 태그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리기 전에 스파이크 옆면으로 홈플레이트를 긁어냈다.
그 결과 일본 대표팀에게는 충격을.
그리고 조국인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선취점을 안겨주었다.
저런 선수를 고작 원더 보이쯤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하니까 빌리 게스파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나단. 썬에 대한 보고서, 얼마나 완성됐어?”
“기본적인 건 다 썼습니다.”
“그럼 바로 보내.”
“바로요? 빌리. 아직 시간 많습니다. 다들 이번 대회까지는 지켜 볼 거라고요.”
“누굴? 저기 홀로 경기를 지배하는 녀석을?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오늘 경기가 끝나면 다들 구단에 썬을 보고하느라 정신 없을걸? 그러니까 일단 보고서부터 보내. 나중에 뒷북쳤다고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하아······.”
경기 중에 딴 짓 하는 걸 질색하는 성격이었지만.
조나단 짐머맨은 어쩔 수 없이 미리 작성해 놓은 보고서를 스카우트 팀장의 메일로 보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기가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다는 점이다.
3번 타자 이동엽의 큼지막한 우익수 플라이 때 2루 주자 김현중이 3루로 내달렸고.
-타구가 이번에도 우익수 쪽으로 날아갑니다. 우익수 나시모토 준야. 거의 제자리에서 잡을 채비를 합니다.
-이건 들어 올 수 있겠는데요?
-3루 주자 김현중 선수, 태그 업! 나시모토 준야 선수가 길게 홈으로 송구합니다만 김현중 선수가 먼저 홈을 밟습니다. 스코어 2대 0.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한 점 앞서 나갑니다!
4번 타자 강준혁이 이동엽과 거의 비슷한 코스로 큰 타구를 날리면서 김현중을 다시 홈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오늘 경기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손쉬운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하라구치 유타가 적극적으로 포크 볼을 쓰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헛스윙 삼진 아웃! 하라구치 유타 선수가 오늘 경기 3번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확실히 포크 볼이 좋네요. 일본 프로 스카우트들이 극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좋은 포크볼이라 불리려면 타자를 속일 수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낙폭만 큰 포크 볼은 빠른 커브 볼이나 다를 바 없죠. 중요한건 타자의 타이밍을 뺏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라구치 유타 선수의 포크 볼의 구속은 130km/h 중반 정도지만 초반의 궤적만 놓고 보자면 포심 패스트 볼과 크게 구별하기 어렵거든요?
-피칭 터널이 포심 패스트 볼과 유사하다는 말씀이시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무브먼트도 무브먼트지만 타자가 구종을 판단하기 직전까지는 포심 패스트 볼처럼 보이는 게 관건이니까요.
-말씀드리는 순간 송산아 선수도 초구를 크게 헛칩니다.
-이번에도 포크 볼인데요. 이거 오늘도 어제와 같은 경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일본 대표팀의 선발 하라구치 유타가 4타자 연속 삼진으로 페이스를 끌어 올리는 동안 안경호는 특유의 디셉션으로 일본 타자들을 애먹였다.
-나시모토 준야 선수가 친 공이 유격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유격수 채준영이 공을 잡아 2루로. 다시 1루로. 안경호 선수가 무사 1루의 위기를 더블 플레이로 이겨냅니다.
-몸 쪽 꽉 찬 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나시모토 준야 선수의 배트가 조금 늦었습니다.
-앞서 안경호 선수를 가리켜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보다 체감 구속이 더 좋은 선수라고 평가를 해 주셨는데요.
-네. 같은 좌완인 이관우 선수에 비해서 시원시원한 맛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안경호 선수는 공을 끝까지 끌고 나오는 요령을 아는 선수입니다. 게다가 투구폼 자체가 독특해서 공이 나오는 순간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고요.
-저런 선수의 공을 공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그건 박유성 선수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박유성 선수요?
-안경호 선수가 가장 상대하기 싫은 선수로 꼽은 게 바로 박유성 선수거든요.
-아아. 또 박유성인가요?
-네. 기승전박유성입니다.
3회 초.
1사 이후에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이번에도 볼넷을 골랐다.
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벤치에서 자동 고의4구를 요청하지도 않았지만.
박유성이 치고 싶지 않은 코스로 연달아 꽂히는 공의 모습은 고의4구나 다름없었다.
또다시 타격의 기회를 박탈당한 박유성은 복수하듯 2루와 3루를 훔쳐냈다.
-하라구치 유타 선수. 또 다시 박유성 선수를 등지게 됐습니다.
-하라구치 유타 선수는 부담이 클 텐데요. 잊어버리려고 노력해도 앞선 홈스틸의 악몽이 떠오를 겁니다.
-포수 미즈시마 게이 선수도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즈시마 게이 선수에 대한 전략분석 자료를 보면 강견이라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실제로 봄 코시엔에서 5할에 가까운 도루 저지 능력을 보여줬고요.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박유성 선수에게만 5개의 도루를 내줬습니다.
-김현중 선수에게 허용한 도루까지 더하면 6개인데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오늘처럼 많은 도루를 허용한 적이 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네요.
-지금 채팅창으로 사회인 야구에서도 도루 6개 주면 포수 교체라는 글이 올라 왔는데요.
-하하. 그건 팀 사정마다 다를 겁니다. 사회인 야구 선수들 중에 포수 마스크를 쓰고 싶어하는 선수는 거의 없으니까요.
-지금 또 다른 채팅으로 사이클링 도루라는 글이 올라왔는데요. 사이클링 도루라는 게 실제로 있는 표현인가요?
-아마 있을 겁니다. 메이저리그식으로는 스틸 포 더 사이클이라고 하는데 한 경기에서 2루와 3루, 홈을 전부 훔쳐내면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해박한 설명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지금 박유성 선수가 또 시동을 걸고 있는데요. 일본 대표팀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지네요.
앞선 1회 초처럼 박유성이 등 뒤에서 하라구치 유타를 자극했지만 일본 배터리도 두 번 당하지 않았다.
박유성을 철저하게 무시한 채 김현중과의 승부에 집중했고.
따악!
김현중을 투수 앞 땅볼로 유도해내는 데 성공했다.
타구를 잡은 하라구치 유타가 곧바로 3루 베이스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박유성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귀루한 상태였다.
“쳇.”
박유성을 잡을 절호의 기회를 놓친 하라구치 유타는 어쩔 수 없이 1루 베이스로 공을 던졌다.
그렇게 2사 3루의 추가 득점 기회를 살렸지만 후속 타자 이동엽마저 중견수뜬공으로 물러나면서 박유성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2대 0으로 앞선 5회 초.
박유성의 세 번째 타석이 돌아오자 일본 배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승부를 포기했다.
-아, 박유성 선수가 오늘 경기 세 번째 볼넷을 골라 냅니다.
-이쯤 되면 일본도 대단하네요. 박유성 선수와의 승부를 철저하게 피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경기에서 보여 준 3연타석 홈런의 임팩트가 크게 작용한 것 같은데요.
-그래도 투아웃에 주자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렇다면 한 번쯤 승부를 걸어 볼 만한데 아쉽네요.
-박유성 선수가 지금 베이스러닝 용 장갑으로 바꿔 꼈는데요. 또 뛸까요?
-뛰겠죠. 홈스틸도 해내는 선수니까요. 2루는 자동문으로 보일 겁니다.
대한민국 중계진의 예상대로 박유성은 초구에 뛰어 2루를 훔쳤다.
박유성을 잡기 위해 미즈시마 게이가 일부러 몸쪽 빠른 공을 주문했지만.
스타팅을 끊는 센스 자체가 남다른 박유성을 잡는 건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번에도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박유성이 3루 도루를 포기하고 일부러 배터리를 자극했지만.
하라구치 유타가 이를 악물고 김현중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하라구치 유타! 오늘 경기 8개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박유성과 이동엽을 제외하고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는데요. 정말 대단합니다. 이게 진짜 하라구치 유타의 실력이이에요.
-5회 초가 끝난 현재 스코어는 2대 0. 한국이 조금 앞서가고 있습니다만 아직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국도 1회 이후 추가 득점이 없으니까요. 이제 슬슬 바람이 바뀔 시점이 왔습니다.
글러브를 받아 들고 중견수 자리로 들어 온 박유성도 찜찜한 얼굴로 전광판을 바라봤다.
“타순이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