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70화 (70/412)

타자 인생 3회차! 70화

11. 원더 보이 (5)

대회 전 방용택 감독은 외야수 두 자리를 확정했다.

중견수는 톱타자 박유성.

우익수는 클린업에서 한 방을 때려 줄 홍상철.

고우일과 김현중은 경기력이 서로 비등했기 때문에 서로 번갈아 기용하다가 후반에 수비 보강이 필요하면 홍상철과 교체하기로 했다.

네덜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고우일은 멀티 히트를 포함해 2번 타자로서 제 역할을 100퍼센트 수행하며 방용택 감독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반면 어제 대만과의 경기에 선발 출전한 김현중은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다.

박유성을 제외하고 안타를 때려 낸 선수가 3명 뿐이라 김현중을 지적하긴 어렵지만 개인적인 활약상만 놓고 보자면 이번 일본전은 고우일의 차례였다.

하지만 전근우 수석 코치는 고우일 대신 김현중을 추천했다.

제 아무리 박유성이라 해도 매 경기 모든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낼 수는 없는 노릇.

박유성이 루상에 나가면 2번 타자가 잘 받쳐줘야 하는데 좌완 투수 상대로는 김현중이 고우일 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정말 번트를 대라는 건 아닌 거 같고. 버스터를 말하는 건가?”

“버스터는 일본식 표현이래요. 페이크 번트 앤드 슬러시라고 해 줘요.”

“이미 현장 용어인데 뭘 따져? 그래서? 버스터 사인 내?”

“그런데 상대가 번트를 대 줄까요? 유성이가 3루 가면 골치아플텐데?”

번트를 대는 척 하다가 타격을 해 버리는 페이크 번트 앤드 슬래시를 성공시키려면 일단 좋은 공이 들어와야 했다.

상대 배터리가 피치 아웃을 해 버리면 답이 없고.

도저히 칠 수 없는 코스로 공이 들어와도 수행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타구가 내야수 정면으로 가 버리면 주자가 횡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상대 배터리가 번트를 주겠다는 심정으로 정직하게 공을 던져 주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지만.

타석에서부터 박유성을 견제해 온 일본 배터리가 희생 번트를 허락할 리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왜 저러는 거야?”

“역으로 가자는 거 아닐까요?”

“역으로?”

“번트 대는 시늉만 해도 투구에 제약을 줄 수 있잖아요.”

“번트를 대기 어려운 코스로 공을 던질 테고 그 사이에 유성이가 3루로 뛰겠다는 건가?”

“그러다 좋은 공이 들어오면 현중이에게 맡기고요.”

“야, 이거 유성이 코치 시켜야겠는데?”

박유성은 벤치 작전이 어떻든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는 주문을 한 것이었지만.

그걸 찰떡같이 해석한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 수석 코치는 마주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프로 야구에서도 야구 머리가 있는 선수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현중이 불러.”

“그럼 너무 티 나지 않아요?”

“복잡하게 사인 내다 헷갈리면 어쩌려고? 그냥 불러서 차분히 알려 줘.”

“유성이는요?”

“유성이는 내버려 둬. 저 녀석이라면 직선타에 걸려도 살 거니까.”

방용택 감독의 지시대로 전근우 수석 코치는 김현중을 불러 작전을 교정해줬다.

“그러니까 번트 대는 척 하다가 좋은 공 들어오면 때려도 된다는 거죠?”

“그래. 유성이가 루상에서 최대한 흔들 거니까 실투가 들어올 가능성도 높아.

그런 공은 절대 놓치면 안 돼.”

“네. 코치님. 그럼 번트는 안 대는 건가요?”

“그건 벤치에서 따로 지시가 나갈 거니까 그 전까지는 이 작전대로.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김현중이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 대표팀 벤치가 부산해졌다.

“무슨 작전을 쓰려는 거지?”

“아무래도 희생 번트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초반에 사인 미스가 나서 박유성이 교정을 해 준 느낌입니다.”

“흠······. 희생 번트라. 일단 3루까지는 보내 놓겠다는 생각인 건가?”

“한국의 3번 타자도 좌완투수 상대로 타격 성적이 좋습니다. 하라구치의 포크볼을 조심하면서 외야 쪽으로 타구를 때려내면 선취점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할까? 줄 점수는 줘야 하나?”

“한국은 박유성이 공격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박유성이 홈을 밟으면 경기 초반 분위기가 한국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긴급 논의 끝에 나가타 유이 감독은 번트를 주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미 원 스트라이크를 선점한 이상 파울 타구 하나만 나와도 번트 작전은 무의미해질 터.

그렇게만 되면 박유성을 2루에 묶어 두고 계획대로 한국의 좌타라인을 정리할 수 있었다.

벤치의 지시를 받은 포수 미즈시마 게이는 주먹으로 미트를 두드렸다.

“좋아, 좋아.”

혹시나 번트를 주라는 사인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런 미즈시마 게이의 눈에 3루 베이스 쪽으로 야금야금 리드를 넓히는 박유성이 들어왔다.

“어디 뛸 수 있으면 뛰어 봐. 이번에는 무조건 죽여 줄 테니까.”

규정 상 홈플레이트에서 2루 베이스까지의 직선거리는 39미터 정도.

반면 홈플레이트에서 3루 베이스까지는 27미터에 불과했다.

거리가 30퍼센트 정도 짧아진 만큼 송구 시간도 30퍼센트가 줄어드는 셈이니 아까처럼 여유롭게 살아 들어가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2루 베이스에서의 박유성은 1루 베이스에서의 박유성보다 더 대범해졌다.

투수가 견제를 하려면 일단 몸을 반 바퀴 돌려야 하다 보니 리드를 벌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1루에 있었을 때는 한 발 반 정도 리드를 벌였다면.

스윽. 스윽. 스윽.

2루 베이스에서는 대놓고 두 발 이상 걸어 나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른 발을 지면에 비벼대며 미즈시마 게이의 약을 올렸다.

“진짜 같은 편이지만 꼴보기 싫다.”

벤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업 포수 안우현이 짜증을 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최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쩌겠어. 저 녀석은 잡을 수가 없는데.”

“너 유성이한테 도루 줘 봤어?”

“4번이나 털어먹었다.”

“4번이나? 그 중에서 몇 번 잡았는데?”

“······놀리냐?”

“한 번도 못 잡았다고? 너도 송구 좀 하잖아?”

안우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힌 3인방 중에서 송구는 최민석이 송산아 다음이었는데 설마하니 박유성에게 꼼짝없이 당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덕우 고등학교의 안방마님 최민석에게 박유성은 악몽 그 자체였다.

신성 고등학교에 복수를 성공했던 날에도 최민석만큼은 다른 선수들처럼 환하게 웃지 못했다.

“유성이는 못 잡아. 산아도 포기했어. 그러니까 너도 그냥 포기 해.”

“사람 짜증나게 약 올리는데 내버려 두라고?”

“저것도 다 심리전이야. 우리 감독님이 그러셨어. 유성이는 뭘 하든 내버려 두라고. 그냥 한 점 주고 마는 게 싸게 먹히는 거라고.”

“넌 자존심도 안 상하냐?”

“자존심도 부릴 상대를 보고 부리는 거야. 너도 나처럼 한 경기에 도루 3개 연속해서 줘 봐. 어떤 기분이 드는지.”

“난 3개 연속은 안 주지.”

“그래. 다음 주말리그 때 신성하고 꼭 같은 지구 돼라. 내가 밤마다 기도할게.”

그때 하라구치 유타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하라구치 유타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향하자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3루로 내달렸다.

‘뛴다!’

좀 더 노련한 타자였다면 번트 자세를 취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거둬들였겠지만.

김현중은 박유성의 움직임만 보고 지레 놀래 타격을 포기했고.

덕분에 미즈시마 게이는 이렇다 할 방해 없이 곧장 공을 움켜쥘 수 있었다.

“죽어라!”

혹시 모를 번트에 대비해 3루수 사카시마 쇼타가 베이스 앞쪽으로 나온 상태였지만.

미즈시마 게이는 망설이지 않고 공을 던졌다.

그리고 사카시마 쇼타도 공을 받기가 무섭게 몸을 3루 쪽으로 돌리며 팔을 뻗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하는 주자들중 열에 아홉은 팔에 글러브가 닿기 마련인데

“······!”

당혹스럽게도 사카시마 쇼타의 글러브는 허공을 휘저었다.

그 사이 박유성은 3루 베이스 뒤쪽으로 돌아들어 갔고.

촤라라락!

비산하는 흙먼지 속에서 반쯤 접힌 박유성의 발끝이 정확하게 베이스에 걸렸다.

-박유성 뜁니다! 공이 3루로 연결됩니다. 3루에서······! 3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3루에 안착합니다.

-제가 뭐랬습니까. 박유성 선수는 루상에 보내면 안 된다니까요.

-3루수 사카시마 쇼타 선수가 자연 태그를 시도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유성 선수의 발목이 꺾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아, 저건 후크 슬라이딩이라고 슬라이딩 기술의 하나입니다. 보통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선수들이 베이스를 붙잡으면서 몸을 멈추곤 하잖아요? 그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박유성 선수가 태그를 피하고자 3루 베이스 뒤쪽을 파고들면서 발목을 꺾어서 베이스를 찍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발목을 꺾었다고 말하면 좀 위험해 보일 수 있는데 슬라이딩 방향을 반대로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은 왼쪽 엉덩이가 땅에 닿는데 이번엔 오른쪽 엉덩이가 땅에 닿은 거죠. 그러니까 일반 레그 벤트 슬라이딩과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요령의 차이죠.

-어쨌거나 박유성 선수가 3루를 훔치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무사 3루의 천금같은 기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한민국 중계석이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일본 중계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즈시마 게이의 송구가 조금 부정확했을까요?

-일단 코스가 좋지 않았습니다. 바깥 쪽으로 조금 빠지는 공이라 송구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3루수 사카시마 쇼타도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게 늦었던 것 같은데요.

-번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3루로 복귀해야 했는데요. 만약에 그랬다면 여유롭게 박유성을 잡아냈을 겁니다.

무사 2루에서 3루 도루를 허용한 상황 자체가 치명적이었지만.

역대 최강의 청소년 대표팀을 주창해 온 터라 박유성의 도루를 평가절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박유성을 보기 위해 미셸 라슨과 경기를 맞바꾼 빌리 게스파노는 3루베이스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빌리. 정신차려요.”

“조나단.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끝내주는 플레이를 봤죠.”

“그래. 맞아. 그야말로 끝내줬어. 방금 썬은 일본 배터리를 가지고 놀았다고.”

일본 대표팀이 쓰고 있는 1루 쪽 더그아웃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겠지만.

홈플레이트 뒤쪽 상단의 관중석에서 지켜 본 박유성의 움직임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과감한 리드에 이은 간결한 스킵과 과감한 질주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3루수의 위치를 판단하고 일부러 여유를 두며 후크 슬라이딩을 시도한 건 보통의 센스로는 불가능했다.

“설마 저거 쇼트트랙 기술인가?”

“갑자기 무슨 쇼트트랙 타령이에요?”

“슬라이딩이 너무 우아하잖아. 저기 썬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보라고. 송구가 날아오니까 급하게 방향을 튼 게 아냐. 안쪽으로 내달리다가 슬라이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바깥 쪽으로 돌았다고. 저건 단순한 센스로는 불가능 해.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니까?”

“그만큼 썬이 대단한 플레이를 했다는 거죠?”

“저 녀석은 진짜 원더 보이야. 왜 저런 녀석이 지금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