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69화
11. 원더 보이 (4)
박유성이 1루 베이스를 밟자 3루 쪽 더그아웃도 들썩거렸다.
“뛰겠지?”
“당연하지.”
“하라구치가 좌완인데 괜찮을까?”
“그게 뭐? 우린 박유성인데?”
“하긴. 유성이 쟤는 도루의 신이지.”
“유성이한테는 좌완이고 우완이고 상관없을 걸?”
청소년 대표팀에는 고교 야구 최고의 좌완 투수들이 4명이나 모여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타자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준기야. 넌 가능하지 않냐?”
“뭘? 누구? 유성이?”
“너 퀵 모션으로 던지잖아.”
“장난해? 나 유성이 때문에 보크 트라우마 걸린 거 모르냐?”
“너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유성이 쟤는 못 잡아. 타이밍 뺏는 데 귀신이잖아.”
“난 유성이가 1루에 서 있으면 공을 던질 마음 자체가 사라져.”
“진짜 그냥 홈런 때리고 꺼져줬으면 좋겠어.”
청소년 대표팀은 대학 리그 강호들과 연습 경기만 진행했던 게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을 병행했는데 그 중에서 투수들이 단체로 곡소리를 낸 게 바로 박유성을 잡아라였다.
“유성이한테 도루 한 번 뺏길 때 마다 견제 훈련 1시간 추가다. 알았지?”
전근우 수석 코치가 훈련을 제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좌완 투수들은 여유를 부렸지만.
그런 좌완 투수들이 전멸하자 전근우 수석 코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놈들아! 너희는 다 보잖아! 보는데 타이밍을 뺏기면 어떻게 해?”
전근우 수석 코치는 좌완 투수들이 집중을 하지 않았다고 혼을 냈지만 실상은 달랐다.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면서 절대 안 뛸 것처럼 굴던 박유성이 냅다 달려버리는데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좌투수를 상대로 박유성은 리드 폭을 넓게 가져가지 않았다.
우완 투수는 두 걸음 반을 벌렸다면 좌완투수 상대로는 그 절반쯤만 내디뎠다.
그렇다 보니 견제구를 남발할 수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승부를 피했다는 사실에 단단히 열이 받았을 텐데도 박유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정도만 리드를 벌였다.
“속을까?”
“백퍼.”
“저건 안 속고 못 배기지.”
“그래도 몰라. 무지성 견제 나올지도.”
순간 하라구치 유타가 1루 쪽으로 견제구를 던졌고.
유일하게 그 상황을 예측한 이관우를 향해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이관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이관우. 메이저리그에서 주목받는 이유가 있구나?”
“그냥 찍었어, 이 자식들아. 작작 놀려.”
“그냥 찍었는데 딱 맞추는 이관우. 역시 이관우.”
“하아. 진짜 이 대회 언제 끝나니?”
볼넷으로 출루한 선두타자가 견제를 받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고작 저런 느려터진 견제구로 박유성이 잡힐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 수석 코치도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또 던질까?”
“또 던지면 우리야 땡큐죠. 매뉴얼이란 소리니까.”
주자를 견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투수가 감각적으로 견제하거나.
포수가 별도의 사인을 주거나.
수비수가 먼저 나서거나.
혹은 벤치에서 작전이 나가거나.
노련한 선수들은 보통 알아서 눈치껏 하지만.
아직 프로 데뷔조차 하지 못한 하라구치 유타에게 그 눈치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예상대로 하라구치 유타가 다시 한 번 견제구를 던지자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수석 코치는 웃으며 박수를 쳤다.
1루 베이스로 돌아온 박유성도 피식 웃었다.
딱히 2루로 뛸 액션이 없었는데 습관성 견제구를 던지는 꼬락서니로 보아 도루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포수의 어깨를 믿거나.’
박유성이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봤다.
그런 박유성의 시선이 느껴졌을까.
마스크 속에서 포수 미즈시마 게이가 씩 웃어댔다.
‘뭘 쪼개 인마.’
미즈시마 게이는 자신을 신경 쓴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박유성의 도루 속에 포수의 어깨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흔히들 어깨가 강한 포수가 도루 저지율이 높다고들 착각하지만.
어깨만 믿고 나대는 포수들의 경우 송구 동작이 간결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성기 시절 송산아나 김 산 정도라면 또 모를까.’
지금 청소년 대표팀 주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송산아는 그대로 성인 대표팀주전 포수 자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신성 고등학교의 주전 포수 김 산도 수비력 하나로 프로에서 제 밥벌이를 해냈다.
타격 능력은 송산아 쪽이 월등히 앞서지만 수비력은 서로 비등했다.
안정적인 캐칭에 이은 군더더기 없는 연결 동작과 풋 워크.
그리고 빠르고 간결한 송구까지.
국제 경기에서 송산아가 발빠른 타국의 준족들을 잡아 낼 때마다 외국 중계석에서 온갖 종류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는데.
정작 이 모든 걸 아우르는 팝타임은 김산이 송산아보다 미세하게 빨랐다.
오죽하면 형편없는 공격력을 감안하면서까지 대표팀에서 송산아의 백업으로 김 산을 호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김 산도, 송산아도 지금은 아마추어 포수들 중에서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전성기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음 먹고 뛰는 박유성을 절대 잡을 수가 없었다.
야구 경력이 비슷한 미즈시마 게이도 마찬가지일 터.
‘어디 짬도 안 되는게 이죽대? 난 아마추어 경력은 치지도 않아.’
스윽. 스윽.
박유성이 다시 리드를 넓혔고.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벤치의 시선이 박유성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하라구치 유타는 더 이상 박유성을 신경 쓰지 않았다.
벤치의 지시대로 두 차례 연속 견제를 했고 박유성의 리드 폭이 늘어나지 않았으니 이제 타자에 집중해도 된다고 여겼다.
때마침 가장 자신 있는 바깥쪽 빠른 공 사인이 나오자 하라구치 유타는 곧바로 오른 발을 차올렸다.
그 순간 박유성이 총알처럼 2루로 내달렸지만 하라구치 유타는 코웃음을 쳤다.
보나 마나 스킵 동작이겠지.
고작 저 정도 리드 폭으로 송구가 좋은 미즈시마 게이 앞에서 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총알처럼 튀어 나간 박유성은 2루 베이스를 향해 최단거리로 질주했고 촤라라랏!
미즈시마 게이의 송구가 날아오기도 전에 레그 벤트 슬라이딩으로 2루 베이스에 안착했다.
“세이프!”
베이스 커버에 들어간 유격수 다케오카 류헤이가 박유성 쪽으로 미트를 뻗어 봤지만 2루심은 단호하게 양팔을 벌렸고.
그렇게 일본 대표팀이 예상하지 못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한 번 보시죠. 리드 폭이 넓지 않았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폭발적인 스피드로 2루를 훔쳐 냈습니다.
-발부터 들어가는 거 보세요. 시간이 남아 돌았다는 겁니다.
-보통 급하면 머리부터 들어가지 않나요?
-아무래도 접전인 상황에서는 수비수의 미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 더 유리하겠죠.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지금껏 단 한번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한 적이 없습니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겠죠?
-사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 레그 벤트 슬라이딩보다 조금 더 빠르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가슴으로 떨어지니까요. 부상의 위험성을 감안하면 레그 벤트 슬라이딩이 조금 더 낫겠죠.
-어쨌거나 박유성 선수가 초구에 2루 도루를 성공시키면서 단숨에 스코어링포지션에 주자가 나갔습니다. 여기서 희생 번트면 3루까지 내보낼 수 있는데요. 한윤재 해설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 일본 배터리 실력으로는 박유성 선수를 잡지 못할 것 같거든요? 오히려 박유성 선수에게 맡겨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성인 대표팀도 아닌 청소년 대표팀에서 숙적이라 불리는 일본을 상대로 선취점을 뽑아낼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3루 도루를 허락할 감독이 몇이나 될까?
“이거 미친 짓이지?”
방용택 감독이 전근우 수석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전근우 수석 코치가 씩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아니 형. 유성이 믿어요. 저 녀석 오늘 일 냅니다.”
“유성이는 계속 일 냈거든?”
“그러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첫 날 사이클링 히트. 둘째 날 3연타석홈런. 이게 운이 아니고 실력이면 무슨 의미겠냐고요.”
“허,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저 녀석 뭐지?”
“뭐긴 뭐예요. 괴물이죠. 어쩌면 아직 진짜 실력은 다 보여주지 않은 건지도 모르고요.”
“그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고민되는데?”
“그냥 질러요.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짜식이 감독은 난데 네가 왜 책임을 져?”
“그럼 형이 지던가요.”
“인마. 빈말이라도 같이 지자는 말은 안 하냐?”
티격태격 거리던 방용택 감독과 전근우 수석 코치는 박유성이 벤치 쪽을 바라보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뼉을 두드려주었고.
그 의미를 알아챈 박유성은 씩 웃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거지?’
박유성은 다시 마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작 공 하나 던져 놓고 투수와 포수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신경 쓰지 마. 타이밍이 안 좋았어.”
“타이밍?”
“바깥쪽 공이었잖아. 공을 빼는 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고.”
좌타자가 타석에 선 상황에서 송구를 하기 가장 편한 공은 당연히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캐칭과 동시에 글러브를 가슴 쪽으로 잡아당기며 공을 뽑아 들고 동시에 스텝을 밟으며 2루 베이스를 향해 정확하게 공을 던지면 우사인 볼트가 와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대로 같은 상황에서 최악의 공은 몸 쪽 공이 아니라 바깥쪽 공이었다.
몸쪽 공은 타자와 겹치는 것만 조심하면 한 호흡에 송구가 가능한 반면 바깥쪽 공은 일단 글러브를 끌어오는 것 부터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깥 쪽 사인을 낸 걸 후회하지 않았다.
하라구치 유타가 조금 더 박유성을 묶어뒀다면 초구에 뛰는 일은 없었을 터.
“2번은 어제 안타가 없었어. 그러니까 편하게 상대하라고.”
하라구치 유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미즈시마 게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2루 베이스 쪽에서 박유성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괜히 이죽거리는 모습을 봤다가 짜증만 날 것 같았다.
그 사이 2번 타자 김현중은 대한민국 더그아웃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을 때 까지 스윙을 하지 말라는 건 유성이한테 3루 도루를 시킨다는 얘기인가?’
김현중의 시선이 다시 2루 베이스에 있는 박유성을 향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번트를 대라는 시늉을 했다.
‘번트?’
순간 김현중의 눈이 똥그래졌다.
벤치에서는 기다리라는 사인이 나왔는데 갑자기 번트라니.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헷갈린 것이다.
그런 김현중을 보며 박유성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 원. 그걸 그렇게 티 내면 어쩌라는 거냐.”
눈치 없는 김현중이 한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멈출 수도 없어서 박유성이 조금 더 과감한 사인을 냈다.
“번트 대는 척 하면서 투수를 압박해! 나도 도루 하는 척 할 거니까.”
박유성이 족보에도 없는 손짓을 해대자 방용택 감독이 빵 터졌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제 딴에는 트릭을 쓰는 거 같은데요?”
“트릭?”
“3루에 들어가도 후속타가 불발이면 꽝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을 이용하라는 거야?”
“현중이도 좌투수 상대로 강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선발로 출전시킨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