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67화
11. 원더 보이 (2)
보다 정확한 상황 설명은 조나단 짐머맨이 돌아오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네일은?”
“보니까 또 여자들을 붙잡아 뒀더라고요.”
“이번에는 뭐랬는데?”
“전도유망한 IT계열 사업가요?”
“그거 한물간 컨셉 아냐?”
“여자들도 알면서 속아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렸어?”
“네. 네일이 좋아하는 여자가 저만 바라봤거든요.”
“이런. 어쩌다가.”
“덕분에 일찍 풀려나게 됐으니 다행이죠.”
조나단 짐머맨이 소파에 주저 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썬 말입니다.”
“대충 얘기는 들었어. 홈런을 세 개나 쳤다면서?”
“네. 그것도 한 투수를 상대로 세 개입니다.”
“와우.”
“전부 다른 구종이었고요.”
“원더풀!”
“심지어 실투성 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레이트!”
빌리 게스파노의 추임새가 다소 장난스러웠지만 조나단 짐머맨은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한국으로 넘어 온 스카우트 중에 빌리 게스파노보다 경력이 오래된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나마 호응을 해 주고 있다는 건.
박유성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세 타석 연속 홈런이었어?”
“네. 그리고 마지막 타석 때는 볼넷을 골랐죠.”
“네덜란드 전에서는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쳤다고 했지?”
“네. 발이 워낙 빨라서 2루타 성 타구로 3루까지 들어갔습니다. 타이밍은 솔직히 반반이라고 봤는데 썬의 대담함에 네덜란드 선수들이 주눅이 들더라고요.”
“한 마디로 그라운드의 야생마로군.”
“그렇다고 야생의 느낌이 강한 건 결코 아닙니다. 빌리도 보면 알겠지만 노련해요.”
“노련해?”
“네. 투수의 숨통을 조일 줄 압니다. 치기 싫은 공을 억지로 걷어 내서 승부를 유도할 줄도 알고요.”
“허, 정말?”
빌리 게스파노가 처음으로 감탄했다.
앞서 조나단 짐머맨은 볼카운트 싸움을 통해 투수를 압박하는 법을 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신인급 타자들 태반이 피지컬만 믿고 동물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러 대는 상황에서 아직 프로 데뷔조차 하지 않은 박유성이 지능적으로 투수를 상대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장점이었다.
그런데 치기 싫은 공을 건드리면서까지 승부를 유도한다니?
이건 최소 10년 이상의 프로 경력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일단 첫 타석부터 시작할게요. 대만 대표팀 투수가 왕치엔이었습니다.”
“왕치엔?”
“왕젠미엔의 조카요.”
“아아, 대만의 미래라 불리는 그 녀석?”
“네. 왕치엔의 주무기는 싱커입니다. 왕젠미엔에게 직접 배웠고 적어도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언터처블이라 불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싱커야 사실 제대로 배우는 게 어려운 구종이니까.”
“듣기로는 왕젠미엔이 5년 안에 자신을 따라잡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하고요.”
지금이야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선수들 중 한 명이지만.
현역 시절 왕젠미엔은 아시아 투수 최초 사이영상을 바라봤을 정도였다.
특히나 2006년과 2007년, 2년 연속 19승을 기록했는데 이 시절의 싱커는 알려 줘도 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왕젠미엔이 후계자로 키운 게 다름 아닌 왕치엔.
“싱커는 두 번째 타석 때 쳤다던데?”
“네. 초구는 몸쪽 빠른 공이었어요. 구속이 96mile/h(≒154.5km/h)쯤 나왔는데 코스가 정말 좋았습니다. 타자의 무릎 바로 위였거든요.”
“그걸 잡아당겨서 홈런을 때려낸 거야?”
“억지로 잡아당긴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정확하게 맞췄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타구가 센터로 날아갔으니까요.”
“하긴. 억지로 잡아당겼다면 우중간으로 쏠렸겠지.”
“솔직히 첫 타석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워낙에 순식간이었으니까요.”
“몰린 공처럼 받아쳤다고 말했다면서?”
“미셸이 그러던가요?”
“아니야?”
“정확하게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주변에서 다들 초구가 몰렸다고 하더라고요.”
조나단 짐머맨은 반문하듯 중얼거렸지만.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미셸 라슨은 조나단 짐머맨이 그렇게 판단했다고 오해했다.
“그럼 첫 타석 홈런에 대한 자네의 평가는 뭐야?”
“퍼펙트.”
“뭐?”
“야구 게임을 하다 보면 말입니다. 공이 정확하게 히팅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 방망이 중심부에 맞추면 퍼펙트라는 단어가 뜹니다.”
“아, 뭔지 알겠어. 나도 아들녀석 따라 몇 번 해 봤는데 그 때의 희열은 장난 아니지.”
“아뇨. 느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말 그대로 퍼펙트한 타격이었습니다. 몸쪽을 파고드는 빠른 공을 센터 쪽으로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칠 때 교본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요.”
“그 정도였어?”
빌리 게스파노가 다시 감탄했다.
14년 전 다저스의 3라운드 픽으로 뽑혔을 만큼 타자로써 재능이 넘쳤던 조나 단 짐머맨의 극찬은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박유성에 대한 평가는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 두 번째 타석을 이야기 해 볼까요?”
“더 들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첫 번째 타석만으로 난 썬을 드래프트 1라운드에 뽑았다고.”
“솔직히 첫 번째 타석만 가지고 1라운드 픽을 주장하면 구단에서 절대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두 번째 타석이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대체 뭐야? 뭔데 또 그래?”
빌리 게스파노가 괜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조나단 짐머맨이 피식 웃더니 그 분위기에 맞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초구는 바깥 쪽 슬라이더였습니다. 백도어성으로 들어갔는데 구심이 스트라 이크를 잡아 주지 않았죠.”
“이유가 있는 거야?”
“프레이밍이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구심이 몇 번 속아주니까 신이 난 거죠.”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아마추어 레벨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지.”
포수들은 자연스럽게 미트질을 하면 구심을 속아 넘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구심이 잠시 딴청을 부리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었다.
프레이밍을 고려해 스트라이크와 볼의 판정을 내릴 뿐이지 터무니없는 공을 끌어다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든다고 해서 그걸 잡아 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레이밍이 좋다고 평가받는 아마추어 포수들은 그런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했다.
구심도 사람인지라 적당히 살살 어르면서 프레이밍을 해야 하는데 한 번 먹혔다 싶으면 프레이밍으로 판정을 조정하려 들었다.
“왕천화는 수비보다 타격이 좋은 포수입니다. 본인은 수비도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요.”
“그 말은 수비보다 타격이 그나마 봐줄 만 하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왕천화를 좋은 포수라고 여기는 스카우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멍청이가 있다면 스카우트 때려 치워야지.”
빌리 게스파노의 호응에 기분이 좋아진 조나단 짐머맨이 목소리 톤을 올려 말을 이었다.
“초구를 잡아 주지 않으니까 2구 째는 바깥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이 들어왔습니다.”
“썬은 치지 않았고 포수는 또 프레이밍을 시도했겠군.”
“정확합니다.”
“그렇게 투 볼로 몰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빌리 게스파노가 눈을 반짝였다. 앞서 미셸 라슨에게 대충 듣긴 했지만 그건 알맹이 없는 스포일러에 지나지 않았다.
“왕치엔은 오늘 경기 처음으로 싱커를 던졌습니다. 몸쪽으로 잘 제구된 공이었죠.”
“몸 쪽 꽉 차게 들어왔나?”
“네. 썬이 무리해서 공략할 필요가 없었죠.”
“그렇겠지. 볼 카운트가 유리했으니까. 오히려 그 공을 지켜보면 다음 번 싱커에 대비할 수 있잖아?”
“그런데 치더라고요. 그것도 완벽하게.”
“타구는 어땠는데?”
“맞는 순간 홈런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방향은 우중간이었고요.”
“그 말은······?”
“네. 싱커가 들어올 줄 알고 때린 겁니다.”
박유성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조나단 짐머맨은 박유성이 싱커를 예상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이 휘어지기 직전에 받아칠 리 없다고 여겼다.
“정말 알고 때린 거라면······ 무조건 1라운드 픽으로 뽑아야겠는데?”
“무조건입니다. 단장이 반대한다면 자이언츠로 이적을 해서라도 뽑을 겁니다.”
“이 봐. 아무리 그래도 자이언츠는 아니지.”
“그만큼 욕심이 나는 선수라는 의미입니다.”
“후우······. 좋아. 그럼 마지막 홈런은 어땠어?”
“마지막 홈런은 욕심이 과했습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억지로 잡아당겼으니까요.”
“그래서? 마이너스야?”
“아뇨. 홈런에 마이너스를 줄 수는 없죠. 심지어 한 점 차로 쫓기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플러스인 건데······ 그냥 홈런인 건 아니지?”
“홈런까지 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정?”
“초구에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을 커트했거든요. 2구 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낮은 공도 건드렸고요.”
“그러니까 두 번째 타석과는 반대로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시작했다는 거지?”
“썬에게만 두 개의 홈런을 얻어맞았으니 왕치엔도 승부를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썬이 놔주질 않았어요. 투 스트라이크를 고의로 먹어 준 다음에 승부를 유도한 겁니다.”
볼카운트가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바뀌자 왕치엔도 눈이 뒤집혔다.
왕천화의 까다로운 리드 속에서 어떻게든 박유성의 헛스윙을 유도하려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무려 5개의 파울이 나왔다.
파울. 파울. 파울. 파울. 볼. 파울. 볼. 파울. 볼.
“풀 카운트 상황에서 왕치엔이 선택한 건 체인지업이었습니다. 바깥 쪽 체인지업. 앞서 박유성이 파울로 걷어낸 공이었죠.”
“파울이 났으니까 잘만 하면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네.”
“네. 차라리 싱커를 던졌으면 어땠을까 싶었지만 철저하게 숨기더라고요.”
“앞서 홈런을 맞았으니까. 더 이상 싱커를 얻어맞고 싶지 않았을 거야.”
“어쨌거나 썬은 방망이를 휘둘렀고 억지로 몸을 비틀어 펜스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결국 팀의 3득점을 혼자 다 뽑아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배럴 여부는 의미가 없지. 완봉을 거둔 투수에게 탈삼진이 적었다고 지적할 이유는 없으니까.”
빌리 게스파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조나단 짐머맨의 평가를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충분히 높게 평가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한국은 일본과 붙지?”
“네. 내일 경기에서 이기는 쪽이 결승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아?”
“썬을 대처한다면 일본이 유리해 보입니다.”
“만약 일본에서 썬에게 당한다면?”
“한국이 이기겠죠.”
“좋아. 그렇다면 나도 내일은 1경기장을 가 볼까?”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경기는 어떻게 하고요?”
“그건 미셸에게 맡기라고. 미셸도 이제 잔소리꾼 밑에서 독립할 때가 됐으니까.”
다음 날.
빌리 게스파노는 정말로 조나단 짐머맨을 따라 제 1경기장으로 향했다.
“미셸에게 맡겨도 될지 모르겠네요.”
“어제 말하는 거 보니까 의욕이 넘치던데 뭘. 괜찮을 거야.”
빌리 게시파노는 제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그렇게 식순이 끝나고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공이 시작되자 슬그머니 팔을 풀고 상체를 세웠다.
“일본에서 어떻게 나올까?”
매일같이 경기가 치러지는 상황이라 일본 대표팀이 얼마나 준비를 잘했을까 싶었는데.
일본의 3선발 하라구치 유타는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찌르며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프로 경력 40년차에 3회차를 사는 야구선수였다.
“승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나도 쫓아다닐 생각 없으니까.”
까다로운 공을 가볍게 커트해 내며 공 7개를 던지게 만든 뒤 박유성은 볼넷을 골라 1루 베이스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스윽, 스윽.
오른발로 1루 베이스 옆을 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