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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 65화
10. 저 선수가 바로 박유성입니다! (8)
1대 0에서 멈춰버린 전광판을 보며 박유성은 인상을 썼다.
“쓸 데 없이 투수전을 하고 난리야?”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야구도 치고받는 맛에 보는 거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가 받아치고.
그 과정에서 안타도 나오고 홈런도 나와야 진짜 야구였다.
가끔 야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명품 투수전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지만 박유성은 그 표현에 동의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도 겨우 참아주고 있는데 무슨.’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투수만 주목받는 경기 분위기는 타자 입장에서 정말 별로였다.
‘깨버려야지.’
박유성이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런 박유성의 기세가 제법 매섭게 느껴졌을까.
왕치엔이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
-무슨 일일까요? 뭔가 사인이 맞지 않은 걸까요?
-글쎄요. 그러기에는 지금까지의 투포수의 호흡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왕치엔 선수. 박유성 선수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이후 8타자 연속 범타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탈삼진은 5개. 아직 소문의 싱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왕치엔 선수가 좋은 공을 던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어제 경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제요?
-18대 0으로 네덜란드를 대파하는 동안 안타를 무려 24개나 때려 냈거든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타자들이 조금 덤벼드는 느낌입니다.
-흔히 말하는 공이 수박처럼 보이는 상황인가요?
-이게 아셔야 하는 게 공이 수박처럼 잘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홈런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타격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원하는 공이 들어온다고 해도 좋은 타구가 나오기 어렵죠. 반대로 타격 컨디션이 좋으면 그 어떤 까다로운 공도 얼마든지 공략해 낼 수 있고요.
-그러니까 어제 장단 24안타를 때려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거네요.
-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어제 경기에서 자신감을 과하게 얻었어요.
냉정하게 따졌을 때 대만의 전력이 네덜란드보다 우위거든요. 그런데 꼭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박유성 선수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제 홈런을 때려내줬습니다.
-만약에 박유성 선수의 홈런이 없었다면 이렇게 웃으면서 해설을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유성 선수. 이번 타석에서도 뭔가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 채팅창으로 ㅇㅅㅇㅎㅈ라는 초성들이 빠르게 올라왔다.
-저게 뭐죠? 이응시옷이응히읗지읒. 이거 설마 제 욕인가요?
-유성아 해줘라는 의미라고 시청자분께서 해석을 해 주셨네요.
-아아, 유성아 해줘? 하하. 저도 나름 신세대라는 소리 많이 듣는데 저런 건 아직도 어렵네요.
-신세대 타령하시는 걸 보니까 올드하신 거 맞습니다. 요즘은 MZ세대를 지나 알파 세대라고들 하거든요.
-그건 또 뭔가요?
한윤재 해설 위원이 시간을 끌듯 물었다.
반쯤 궁금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럽게 왕치엔이 포수 왕천화를 호출하면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MZ 세대가 밀레니엄 제트 세대라는 뜻이잖아요. 제트는 알파벳의 가장 마지막 글자고요. 그럼 그다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에이?
-네. 그래서 알파 세대입니다. 2011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부터 해당한다고 들 하고요.
-그렇다면 오늘 경기를 치르고 있는 선수들은 알파 세대가 아니네요? 현재 고등학교 3학년들은 전부 2010년 생이니까요.
-그래서 기쁘십니까?
-하하. 네. 기분 좋습니다. 알파 세대라고 해서 세대 차이 느꼈는데 이제 다시 선수들과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화기애애(?)한 한국 중계석과 달리 마운드 위의 대화는 심각하기만 했다.
잘 참았던 왕치엔이 갑자기 싱커 타령을 해댔기 때문이다.
“투아웃이야. 주자도 없다고. 그런데 꼭 싱커를 던져야겠어?”
“저 녀석 표정을 못 봐서 그래. 아까 눈이 마주쳤는데 소름이 돋았어.”
“무슨 소리야?”
“저 녀석. 내가 무슨 공을 던질지 알고 있는 거 같았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가 어떤 공을 던질지 예상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불가능해. 그건 신적인 존재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되겠어. 왠지 저 녀석에게 또 얻어맞을 것 같다고.”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왕치엔은 박유성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레퍼토리로 박유성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잊으려 해도 몸쪽 꽉 찬 공을 얻어맞은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싱커가 던지고 싶은 거야?”
“싱커를 던져서라도 잡아내고 싶은 거야.”
“후우······, 좋아. 대신에 이거 하나만 약속해.”
“······?”
“한 경기에 싱커는 10개만 던지겠다는 규칙은 지킬 것.”
“그야 당연하지.”
“그리고 싱커 사인에는 절대 고개를 젓지 않을 것.”
“뭐?”
“그게 싫으면 나 말고 콴 수석 코치님을 설득해야 할 거야.”
왕천화의 으름장에 왕치엔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더그아웃으로 뛰어가 콴 시엔 린 수석 코치에게 허락을 구한들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할게. 대신에 너도 약속 하나 하자.”
“뭔데?”
“난 한 경기에서 싱커를 10개밖에 던질 수 없어. 그러니까 꼭 필요한 순간에 던져야 해.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고.”
“싱커를 써서 한국의 1번 타자를 꼭 잡고 싶다는 말이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흥분 좀 가라앉혀. 지금 네 표정, 싱커를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같아.”
아직 프로 문턱을 넘지 못한 투수들에게 포커 페이스를 요구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지만 왕치엔은 감정 표현에 지나치게 솔직한 편이었다.
만약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왕치엔의 그런 성향까지 파악했다면 싱커가 무의미해질 터.
기왕 싱커를 던지기로 결정한 이상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야 했다.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완전히 몰입했으니까.”
왕천화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뜻으로 한 얘기였지만.
정작 왕치엔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8타자를 연속 범타로 돌려 세우고 다시 만난 박유성에게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 주고 싶어 몸이 달아 올랐다.
‘하아.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콴 시엔 린 수석 코치를 호출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던 왕천화는 시간을 체크하는 구심을 보고 이내 몸을 돌렸다.
“사인 잘 봐. 엉뚱한 코스로 던지지 말고.”
“걱정하지 마. 싱커는 자신 있으니까.”
포수석으로 돌아온 왕천화는 싱커를 결정구로 쓰기 위한 레퍼토리를 구상했다.
일단 몸쪽 승부는 피할 생각이었다.
엉겁결에 얻어맞았다 해도 홈런은 홈런.
그 홈런 때문에 아직까지 경기를 끌려가는 중이었다.
‘일단 바깥쪽으로 두 개 정도 가 보자. 1-1이 된다면 싱커를 아끼고 그게 아니면 싱커로 스트라이크를 잡는 게 좋겠어.’
생각을 정리한 왕천화가 초구에 바깥쪽을 파고드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왕치엔은 사인을 받기가 무섭게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왕치엔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바깥쪽 멀리 돌아들어 오자 박유성은 그대로 방망이를 거둬들였다.
무사나 1사 상황이거나 루상에 주자가 있다면 가볍게 밀어 친 뒤 1루 베이스로 내달렸겠지만.
2사에 주자 없는 가운데 초구에 건드릴 만한 공은 아니었다.
‘이걸 먹어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덤벼들겠지?’
타석에서 한발 물러서며 박유성은 구심의 콜을 기다렸다.
그런데······
“······?”
올라갈 줄 알았던 구심의 오른팔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볼이라고?’
박유성은 삐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억눌렀다.
코스 상 스트라이크를 줘도 할 말이 없었는데.
구심이 단호하게 볼을 선언할 줄은 예상 못했다.
하지만 호주 구심은 아까부터 과도하게 프레이밍을 하는 왕천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공을 판정하기도 전에 미트로 장난을 치고 있으니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뭐야? 빠졌나?”
그런 줄도 모르고 왕천화는 2구째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초구보다 조금 더 안쪽 코스에서 포심 패스트 볼처럼 날아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살짝 가라앉아 버리면 제 아무리 박유성도 속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초구에 볼카운트를 번 박유성이 시작부터 낮게 깔려 오는 공을 건드릴 리 없었다.
퍼억!
박유성이 꿈쩍도 하지 않자 왕천화가 다급히 공을 끌어올려 봤지만 이번에도구심을 설득해내지 못했다.
“포수, 조심해!”
오히려 프레이밍을 자제하라는 잔소리만 들어야 했다.
-2구도 바깥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박유성 선수가 침착하게 골라 냈습니다.
-사실 지금 S존 상으로는 스트라이크에 걸친 것처럼 보여지는데요.
-구심은 살짝 빠졌다고 판단한 걸까요?
-이게 앞선 이닝 때보다 바깥쪽 판정이 뭐랄까요? 좀 짜졌거든요? 제 생각에는 과도한 미트질 때문인 거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대만 배터리는 빨리 구심의 성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박유성 선수가 출루하게 되거든요.
-2사 이후이긴 하지만 박유성 선수가 볼넷을 골라 나가면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확 달라지죠. 게다가 박유성 선수는 우완 투수 앞에서 3루 도루를 밥 먹듯하는 선수거든요. 박유성 선수한테 3루 도루 내주고 멘탈 나간 투수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박유성을 잘 아는 고교야구 감독이라면 이렇게 된 거 까다롭게 승부하다 거르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루상에 나가면 도루를 시도해서 그라운드를 휘젓겠지만.
잘못 승부했다간 홈런을 얻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만 대표팀의 청웨인 감독은 팔짱을 낀 채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번 두 번째 타석의 결과가 어찌 나올지 못내 궁금해진 것이다.
‘이번에도 저 한국 타자가 이길 수 있을까?’
박유성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선제 홈런을 때려냈을 때.
청웨인은 오늘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의 핵인 박유성이 터졌으니 대한민국 타선을 막기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왕치엔이 8타자 연속 범타 행진을 이어가자 생각이 바뀌었다.
박유성이 잘해서 홈런을 친 게 아니라 왕치엔이 방심하다 얻어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타순이 한 바퀴가 돌고.
박유성과 왕치엔이 다시 만났다.
상황 자체는 타자에게 좋았다.
2사 이후라 제 스윙을 마음껏 해도 상관없고.
볼카운트가 투 볼이니 왕치엔도 거를 게 아니면 승부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콴 시엔 린 수석 코치는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냉정해진 구심의 스트라이크 콜이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시그널처럼 느껴졌다.
그때 제법 길게 사인을 주고 받았던 왕치엔이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왼 발을 가볍게 차올려 스트라이드를 한 뒤에 마지막 순간 채찍질을 하듯 오른팔을 휘두르는 느낌은 전성기 시절 왕젠미엔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관중이나 다름없던 청웨인 감독의 입에서 느닷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싱커!”
“······!”
콴 시엔 린 수석 코치는 다급히 공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 싱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콴 시엔 린 수석 코치의 시선이 공에 닿기 직전.
따악!
요란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