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61화
10. 저 선수가 바로 박유성입니다! (4)
조나단 짐머맨이 제 생각을 풀어 설명했지만 정작 미셸 라슨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렇군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했어?”
“그럼요. 완벽하게 이해했죠.”
“그래. 완벽하게 이해했다니 다행이네.”
조나단 짐머맨은 다시 그라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미셸 라슨을 제대로 이해시키느니 차라리 침팬지를 상대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한국의 선두타자가 선취점을 가져왔으니까 분위기가 달라졌을 거야.’
조나단 짐머맨이 기대 어린 눈으로 고우일의 타석을 지켜봤다.
퍼엉!
초구 바깥쪽 빠른 공에 꿈쩍도 하지 않았던 2번 타자 고우일은.
따악!
2구째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들어온 몸쪽 공을 잡아당겨 1,2루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냈다.
-고우일 선수가 친 공이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안타! 박유성 선수에 이어 두타자 연속 안타가 터집니다.
-박유성 선수가 확실히 물꼬를 잘 튼 것 같네요. 선취점의 순기능이 일어나고 있어요.
-앞서 국제 경기는 선취점이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셨는데요.
-국제 경기 뿐만 아니라 점수로 승부를 가리는 모든 스포츠에서 선취점은 중요합니다. 주도권을 쥐고 경기를 이끌어갈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상대는 쫓기는 심정일 텐데요.
-아직 경기 초반이고 고작 한 점 차의 리드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만약에 말입니다. 오늘 경기가 1대 0으로 끝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과연 고작 한 점일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네덜란드 대표팀 입장에서는 박유성 선수에게 성급하게 승부를 걸었던 걸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네요.
-고우일 선수의 안타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유성 선수의 선제 홈런이 터져 나왔으니까 마음 편하게 몸쪽 공을 휘둘러 본 거죠. 박유성 선수가 아웃이 됐다면 출루를 위해 조금 더 공을 지켜봤을 겁니다.
-확실히 박유성 선수의 선제 홈런이 대표팀의 시너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긍정적인 힘이 3번 타자 이동엽 선수에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3번 타자 이동엽은 박유성 다음으로 방용택 감독이 믿는 선수였다.
힘과 정확도를 겸비한 미래의 4번 타자라는 수식어를 떠나 경기 흐름을 이어갈 줄 알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 뛰게 할까요?”
“단독 도루 말고 런 앤 히트로 가자.”
“히트 앤 런이 아니라 런 앤 히트?”
“동엽이한테 맞추면 우일이가 못 따라 갈 거야. 반대로 가야지.”
전근우 수석 코치는 내심 단독 도루를 시켜보고 싶었지만.
방용택 감독은 조금 더 판을 흔들 생각이었다.
발 빠른 주자에게 도루는 사실 뻔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주전 포수 레안드로 아가스티는 강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만에 하나 2루로 뛰다가 고우일이 비명횡사를 한다면 박유성이 기껏 만들어놓은 분위기가 네덜란드 대표팀 쪽으로 넘어가 버릴지 몰랐다.
“피치 아웃만 신경 쓰라고 해.”
“네덜란드에서 피치 아웃을 할까?”
“예전의 야구 변방이 아니야.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친다고.”
방용택 감독의 주문대로 전근우 수석 코치가 사인을 전파했다.
단독 도루가 아니라는 사실에 고우일은 안도했고.
이동엽도 병살타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반겼다.
하지만 네덜란드 대표팀 벤치는 히트 앤 런도 아니고 런 앤 히트가 걸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타자에 신경써야 해. 까다롭게 승부해야 한다고.”
마르코 반바스텐 감독의 주문이 포수 레안드로 아가스티에게 전달됐고.
레안드로 아가스티는 초구와 2구, 연달아 바깥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을 요구하며 이동엽을 경계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도니오 브릭 선수가 3구를 준비합니다. 한윤재 해설 위원. 이번 3구, 어떤 공이 들어 올까요?
-글쎄요. 연달아 빠른 공이 들어왔으니까 변화구가 하나쯤 들어 올 차례인데요. 1루에 발 빠른 주자가 있으니까 슬라이더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슬라이더라면 앞서 박유성 선수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그 구질인데요?
-그렇다고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조금 더 까다롭게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윤재 해설 위원의 예상대로 연달아 고개를 가로젓던 도니오 브릭은 슬라이더를 받아들였다.
코스는 바깥쪽 낮게.
스트라이크 존을 타고 들어가다 마지막 순간에 바깥쪽으로 빠져 나가면 이동엽의 방망이가 끌려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무리해서 잡아당겨 땅볼이 나면 좋고.
그대로 파울이 되어도 투 스트라이크를 선점하니 나쁠 게 없었다.
“기왕이면 더블 플레이가 좋겠지.”
도니오 브릭은 1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려면 일단 1루 주자를 베이스에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고우일은 고분고분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1루 베이스 쪽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까 단독 도루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좋아. 멍청이. 계속 그대로 있으라고.”
고우일을 견제했다고 착각한 도니오 브릭은 그대로 오른 발을 차올렸다.
그 순간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스킵을 하던 고우일이 2루를 향해 내달렸다.
‘저 자식이!’
바로 눈앞에서 고우일이 움직였지만 도니오 브릭은 멈출 수가 없었다.
보크의 기준이 되는 자유족(오른 발)이 투구판 안쪽으로 말려 들어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투구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후앗!
제대로 채지 못한 공은 몸쪽 꽉 찬 코스가 아니라 한복판에 몰리듯 날아들었고.
따악!
고우일이 스타트를 끊기가 무섭게 스트라이드를 했던 이동엽은 그 공을 가볍게 잡아당겨 좌중간으로 날려버렸다.
-이동엽이 친 타구가······ 좌중간을 완전히 갈랐습니다! 고우일은 2루를 돌아 3루로! 아아, 다시 홈으로! 공 백 홈 됩니다! 홈에서······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한 점을 달아닙니다!
-여기서 런 앤 히트가 나왔네요. 방용택 감독이 제대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고우일 선수가 도니오 브릭 선수를 완전히 속였습니다.
-고우일 선수가 1루 베이스로 돌아가는 걸 보고 도니오 브릭 선수가 방심을 했던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이번 점수는 뼈아픕니다.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벌써 2실점 째입니다.
중계석은 고우일의 재치 넘치는 주루플레이를 한참 동안이나 칭찬했다.
벤치의 작전과 고우일의 발, 그리고 이동엽의 타격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지만 그 중에서도 고우일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 세례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 온 고우일이 가장 먼저 찾은 건 다름 아닌 박유성이었다.
“유성아. 봤어?”
“잘 하긴 했는데 좀 어설펐어.”
“어설퍼? 아니야. 쟤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고.”
“그건 도니오 브릭이 우릴 우습게 알아서 속은 거고. 다른 투수였다면 백퍼발 뺐음.”
“나쁜 놈. 그냥 잘 했다고 칭찬 한 마디 해 주면 안 되냐?”
“더 발전해야 해. 그래야 프로 가서도 잘 하지.”
고우일이 서운하다며 투덜거렸지만 박유성이 보기에 조금 전 트릭은 너무 티가 났다.
본래라면 일단 투수와 눈을 마주치며 잠시 대치하다가 자연스럽게 꼬리를 말아야 하는데.
고우일은 도니오 브릭이 쳐다보기가 무섭게 작전이라도 들킨 것처럼 후다닥 귀루를 했다.
만약 마운드에 조금 더 경험 많은 투수가 서 있었다면 일단 투구판에서 발을 빼고 주변을 돌아봤을 터.
그랬다면 도니오 브릭의 실투를 유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때 뒤쪽에 앉아 있던 김현중이 슬그머니 박유성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성아. 나도 좀 알려 줘.”
“뭘?”
“우일이가 했던 거 말이야. 뭘 어떻게 하는 거야?”
“별거 아냐. 우일이는 도루할 때 너무 티가 나거든. 투수가 공을 던지기도 전부터 영혼이 2루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면 좌투수 견제에 걸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기싸움에서 밀리는 척 연기하라고 한 거야.”
“아하. 좌완투수 앞에서는 자신 없는 것처럼 구는 게 포인트구나?”
“그렇지. 솔직히 자주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아냐. 그리고 현중이 너는 우일이보다 센스가 좋으니까 따라 할 필요도 없을 거고.”
박유성을 필두로 고우일과 김현중, 채준영까지.
청소년 대표팀의 준족 4인방 중에서 김현중의 주루 센스는 박유성 다음이었다.
물론 40년간의 경험치를 쌓은 박유성과는 한참 차이가 나지만.
루상에 나가기만 하면 도루를 하지 못해 안달인 고우일이나 도루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작전이 나와도 잘 뛰지 못하는 채준영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하지만 고우일에 밀려 벤치에서 오늘 경기를 지켜보게 된 김현중은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늘리고 싶었다.
“유성이 너는 도루 타이밍 잡을 때 뭘 봐?”
“글쎄.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도니오 브릭을 기준으로 하면 어딜 볼 거 같아? 자유족?”
“쟤는 자유족을 보고 뛰면 늦어. 게다가 포수도 강견이라 살 확률이 50퍼센트미만일 걸?”
“그럼?”
“볼 카운트와 전체적인 리듬을 봐야지. 투수도 잘 살펴보면 자신만의 리듬이 있거든. 그걸 가지고 판단해야 해.”
“리듬?”
김현중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박유성도 더는 공짜로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짜식이 치킨이라도 내놓고 물어보던가. 어디 남의 영업 비밀을 캐물어?’
앞선 회차 때의 친분이 있어서 적당히 받아주고 있지만.
3회차 씩이나 되어서 김현중과 또다시 라이벌 관계를 만들 수는 없었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조금 앞서가고 있다고 해도 김현중의 재능이라면 다시 바짝 따라붙을 터.
“너는 센스가 좋으니까 아마 금방 알게 될 거야.”
김현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박유성은 냉큼 그라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사 2루 찬스에서 4번 타자 강준혁이 타석에 들어와 있었다.
공이 홈으로 향할 때 이동엽이 한 베이스 더 진루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대표팀 타자들 중에서 걸음이 느리기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준혁 앞에서 1루가 비였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준혁아! 병살 없으니까 편하게 때려!”
“지금 세 명 연속 안타다! 너만 못 치면 X 되는 거야!”
평소였다면 강준혁이 타격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왔겠지만.
분위기가 이미 넘어 온 상태이다 보니 친한 선수들의 입에서 짓궂은 응원이 터져 나왔다.
“준혁아! 몸 쪽 공 들어온다. 똥꼬에 힘 빡 줘라!”
김현중의 눈치가 보였던 박유성도 일부러 한마디 보탰다.
정말 몸쪽 공이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동엽을 안전하게 홈으로 불러들이려면 장타가 터져줘야 했다.
그런데
후앗!
도니오 브릭의 손 끝을 빠져나온 공이 정말로 강준혁의 몸 쪽을 파고들었고.
따악!
강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렇게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뻗어 나간 타구는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좌익수 뒤로! 좌익수 뒤로! 이 타구도 좌익수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홈~런!
대한민국의 4번 타자 강준혁이 쐐기를 박는 투런 홈런을 때려냅니다!
점수 차이가 4점까지 벌어지자 마르코 반바스텐 감독도 도니오 브릭을 더는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아아, 네덜란드에서 투수를 바꿉니다. 도니오 브릭 선수. 메츠에서 관심을 보이는 유망주로 알려졌습니다만 오늘 대한민국 대표팀을 상대로 아웃 카운트하나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도니오 브릭 선수가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위협구를 던질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아까는 박유성 선수를 자제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크흠, 어쨌거나 이 기세대로라면 콜드 게임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