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57화 (57/412)

타자 인생 3회차! 57화

09. 누가 1번이야? (7)

“뭐냐? 너희들?”

“대표팀 짤린 거 아니었어?”

“우리도 쪽팔리니까 적당히 해라.”

“적당히 하긴 뭘 적당히 해? 푹 쉬다 와 놓고.”

“그런 거 아니거든? 우리도 엄청 눈치 보이거든?”

“그럼 구시렁거리지 말고 눈치를 봐. 이제라도 오면 우리가 두 팔 벌려 반겨 줄 줄 알았냐?”

“야, 당분간 뒷정리는 너희 경성 녀석들이 해라. 알았지?”

경성 고등학교와 선인 고등학교 간의 3,4위전은 선인 고등학교의 6대 4 승리로 끝이 났다.

원투펀치와 4번 타자가 빠진 선인 고등학교보다 경성 고등학교가 한 수 위일거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약팀이 강팀을 잡는 이변이 속출하는 고교 야구에서 그 정도 핸디캡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승하겠다며 청소년 대표팀 조기 차출을 거부했던 염대성 감독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인터뷰도 마다하고 도망쳐버렸고.

강우석과 안우현, 김현중은 죄인처럼 대표팀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형. 쟤들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말리긴 뭘 말려. 여기서 괜히 나서면 더 심해진다.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놔둬야 해.”

“그러다 안 풀리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경성 애들도 차라리 눈칫밥 좀 먹는 게 마음 편할걸?”

방용택 감독의 예상과 달리 먼저 온 선수들의 텃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 좀 똑바로 던져.”

“어, 미안.”

“여지껏 쉬다 왔는데 왜 저러는 거야?”

“야, 그 얘기 좀 안 하면 안 되냐?”

“내가 이런 말 안하게 알아서 잘 하면 안 되냐?”

송산아와 주전 경쟁을 해야 하는 포수 안우현은 다른 투수들의 구박을 받아야 했고.

퍼엉!

“······.”

퍼엉!

“······.”

강우석은 기계처럼 공만 받아주는 송산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야! 김현중!”

“또 왜?”

“넌 주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외야는 이미 나하고 유성이, 상철이로 확정이니까.”

“누구 맘대로?”

“꼬우면 너도 일찍 오지 그랬냐?”

“맞아. 우리는 대학팀 상대로 개고생했는데 놀다 온 너한테 주전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어.”

김현중은 김현중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했겠지만 가뜩이나 늦은 주제에 아버지를 믿고 설쳐댄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렇게 개막식 사흘 전까지 분위기가 잡히지 않자 보다 못한 박유성이 나섰다.

“야! 김현중.”

“왜? 너도 잔소리 하려고?”

“시끄럽고 얼마 있냐?”

“······뭐?”

“얼마 있냐고. 집에서 용돈 좀 받았을 거 아냐?”

“지금 나한테 삥 뜯겠다는 거냐?”

“삥 같은 소리 하네. 진짜 십원에 한 대씩 털어봐?”

“야! 나 싸움 잘 해!”

“그러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

“······뭐?”

“내가 다른 애들 모아놓을 테니까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뭐라도 먹이면서 얘기를 해야 애들도 이해해 주지. 아니면 대회 끝날 때까지 따돌림 당할래?”

“······나 용돈 거의 다 썼는데?”

“우석이하고 우현이 녀석 지갑도 털어. 미리 말하는데 쟤들 엄청 잘 먹는다.

대충 과자부스러기로 끝낼 생각 말고 제대로 쏴. 그럼 내가 책임지고 삐친 거 풀게 해 줄게.”

김현중은 속는 셈 치고 안우현과 김우석을 설득했다.

그리고 최후의 보루인 아버지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다.

-뭘 달라고?

“용돈이요. 급해요, 아버지.”

-너 지금 대표팀 아니냐?

“설명은 나중에 드릴 테니까 다음달, 아니 다다음달 용돈까지 미리 보내주세요.”

-일단 알았다.

그렇게 총알을 충전한 김현중은 먹고 죽자는 각오로 온갖 배달 음식들을 주문했다.

“와, 이게 다 뭐야?”

“경성 애들이 미안해서 한 턱 쏜 거래.”

“치킨에 피자에 족발까지! 이건 안 먹을 수가 없잖아!”

“경성 놈들. 진즉 좀 이렇게 하지.”

“그러게. 처음부터 이랬으면 우리도 좋게 넘어가 줬을 텐데 말이야.”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배달 음식들 앞에서 무장해제된 선수들을 보며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프로 40년차 경험상 운동 선수들에게 눈앞의 먹을 것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자, 너희들. 이거 먹기 전에 나하고 약속 하나 하자.”

“무슨 약속?”

“앞으로 경성 놈이나 경성 것들. 경성 새끼들. 경성 찌끄레기 등등 따돌리는 표현 금지.”

“오케이.”

“근데 경성 찌끄레기라고 한 사람도 있어?”

“나도 그 얘긴 처음 듣는데?”

“다음으로 우리 목표인 결승 진출을 위해 서로 힘을 합칠 것. 우리도 국가 대표야. 우리 어깨에 태극 마크 달고 뛰는 거라고.”

“이건 유성이 말이 맞아. 우리 이대로 가다간 성적 내기 힘들 거야.”

“그래. 유성이가 말 잘 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 이하 코치님들의 결정을 무조건 존중하고 따를 것.”

“야. 그건 당연한 거지.”

“진짜 출전 가지고 구시렁거리는 애들 있으면 나부터 가만 안 둔다.”

“자, 자. 우리 이거 먹고 다 풀자. 그리고 나중에 성인 대표팀에서 다시 모였을 때 오늘 얘기 안주 삼아 술이나 마시자. 어때?”

“술 좋지~”

“야, 근데 술 마셔 본 사람 없냐?”

“난 마셔 봤지롱~”

“나도 맥주 소주 다 뗐다. 흐흐.”

뒤늦게 선수들이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전근우 수석 코치가 허겁지겁 달려 왔다.

코칭스테프 몰래 사고라도 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입가에 잔뜩 음식을 묻힌 채로 먹자 파티를 벌이는 선수들을 보니까 순간 헛웃음이 났다.

“뭐야, 너희들. 너희들만 입이냐?”

“에이, 코치님은 안 돼요.”

“맞아요. 오늘은 저희끼리 팀워크를 다지는 날이라고요.”

“와, 치사한 놈들. 닭다리 하나만 줘라.”

“싫어요! 코치님도 시켜 드세요!”

그때 김현중이 따로 빼놓은 치킨 박스를 전근우 수석 코치에게 건넸다.

“코치님. 이거 드세요.”

“어이구. 고맙다.”

“그리고 늦게 합류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괜찮아. 솔직히 너희가 무슨 죄냐. 안 그래?”

“대신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런 마음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전근우 수석 코치는 김현중이 기특했다.

또래 친구들에게 이렇게까지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코칭스테프가 개입하기 전에 먼저 나서줘서 고맙기만 했다.

그러자 김현중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게 사실······ 유성이가요.”

“유성이?”

“네. 맛있는 거 쏘면 화해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유성이 녀석이 그랬어?”

“네. 코치님들 드실 것도 미리 챙겨놓으라고 했고요.”

“하하. 그래?”

전근우 수석 코치가 씩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방용택 감독이 박유성을 호출했다.

“어제 멋대로 먹자판을 벌였다면서?”

“전 코치님이 치킨 받아가셨던데요?”

“치킨은 치킨이고 이 놈아. 같이 먹으면 공범이다 이거냐?”

“그동안 연습 경기 하느라 고생했잖아요. 화합 도모 차원이었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도 말은 하고 벌였어야지.”

“에이, 허락받고 하면 자발적인 게 아니잖아요.”

“그런가?”

“그럼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좋은 게 좋은 거긴 뭐가 좋아? 이 놈이 아주 뺀질뺀질하네?”

방용택 감독이 박유성의 볼을 꼬집었다.

다른 선수들이었다면 질색을 했겠지만 평소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자주 당해서였을까.

박유성은 능청스럽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기특한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된 거야?”

“당장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데 저희끼리 싸울 수는 없잖아요.”

“원 팀이다 이거야?”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는 법이죠.”

적당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박유성이 냉큼 받아쳤다.

하지만 방용택은 그 말이 달리 들렸다.

현재 청소년 대표팀에서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건 누가 뭐래도 박유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박유성의 호출에 선수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인 것이다.

그런 박유성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말했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팀을 위해 최선을 다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 터.

“안 되겠다. 유성아. 네가 주장 해야겠다.”

“네? 제가요? 어우, 저는 감투는 딱 질색인데요?”

“솔선수범해 이 녀석아. 네가 아니면 누가 하냐? 내가 하리?”

“에이, 감독님은 나이제한에 걸리는데요?”

“짜식이 아주 한 마디를 안 져요.”

방용택 감독이 박유성을 주장으로 선임하겠다고 발표하자 선수들은 저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청소년 대표팀 주장 자리가 욕심났지만.

“유성이라면 뭐.”

“쟤는 못 이겨.”

“솔직히 유성이 말고 누가 해?”

실력으로 증명한 박유성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자, 오늘하고 내일은 푹 쉴 테니까 다들 컨디션 조절 잘 하고 네덜란드전 꼭 이기자. 알았지?”

“넵!”

걱정이었던 내부 문제가 해결되자 방용택 감독도 기분 좋게 휴식을 부여했고.

선수들도 삼삼오오 모여 전력 비디오를 보면서 네덜란드 전을 준비했다.

박유성의 옆에는 김신우가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다.

“내 약점이 뭐야?”

“없어. 완벽해.”

“근데 내 공을 왜 잘 쳐?”

“운이 좋았던 거야. 뽀록이라고 하지.”

“무슨 뽀록으로 안타를 몇 개씩 치는 건데?”

“너 잘 해 인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덜란드에는 나 같은 놈이 없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내 단점 같은 걸 알려 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네.”

개막전 선발은 대표팀의 에이스 김신우가 낙점됐다.

네덜란드가 비록 다크호스라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 숙적 일본보다는 해볼 만한 상대일 텐데 김신우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긴. 이러니까 프로에 가서도 성공을 했지.’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에는 김신우와 딱히 친분을 쌓지 못했다.

국가 대표팀에서 잠깐 만났다 해도 투수와 야수가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다보니 경기장에서 상대로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공을 던질 때마다 시원한 장타를 날려서 표정을 구겨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

이렇게 귀여운 녀석일 줄은 미처 몰랐다.

“너 솔직히 말 해 봐.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거야? 아니면 진짜 약점을 알고 싶은 거야?”

“약점이 있는 거야? 그래?”

“너 그러는 게 약점이야 인마. 이 세상에 안타 안 맞는 투수가 어디 있냐?”

“난 안타 안 맞고 싶은데.”

“그런 투수는 소설 속에나 나오는 거야. 내가 지난 번에 보다 던진 야구 소설이 있거든? 투수 인생 3회차던가? 왜 던진 줄 아냐?”

“왜? 재미가 없어?”

“투수가 안타를 안 맞아. 죄다 삼진만 잡더라.”

“와우, 재밌겠는데?”

“재미는 개뿔. 투수가 다 해 먹는데 그게 재밌냐? 장난해?”

박유성은 절대 읽지 말라며 신신당부했지만 김신우는 기어코 소설을 찾아봤다.

그리고는 다음날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유성아.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

“뭐야? 너 날 샜냐?”

“3회차를 살면 돼. 그럼 완벽해져.”

“정신 차려. 미친놈아.”

김신우야 그냥 한 소리겠지만 막상 3회차를 사는 박유성은 경쟁자가 느는 걸 원치 않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선취점은 내가 무조건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넌 그거 목숨 걸고 지켜. 알았어?”

“무조건? 약속한 거다.”

“그래. 걱정하지 마. 첫 득점은 내 발로 만들 테니까.”

그렇게 U-18 야구 월드컵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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