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55화
09. 누가 1번이야? (5)
총 12개국이 참가한 이번 대회는 조별 풀리그(A,B조)를 거쳐 각 조 상위 3팀이 다시 슈퍼 라운드를 진행하며 최종적으로 성적이 가장 좋은 두 팀이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새롭게 청소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방용택 감독은 2년 전 대회 때 6위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만큼 홈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한편 이번 대회는 오는 21일 개막전을 시작으로 11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한국 야구 협회는 대표팀 선수들의 조직력 향상을 위해 황금사자기와 별도로 합숙 훈련을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후략>
황금사자기에서 조기 탈락한 학교들은 조기 합숙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전국 대회야 아직도 협회장기와 청룡기, 봉황기가 남아 있지만 U-18 야구 월드컵은 2년 주기였다.
게다가 국내에서 치러지는 대회인 만큼 대승적인 차원에서 협회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황금사자기 4강에 진출한 학교들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나 지난 대통령배에 이어 2연속 우승을 노리던 경성고등학교 염대성 감독은 경성고등학교를 시기질투하는 이들의 음모라며 반발했다.
“우석이에 우현이, 현중이 빼고 무슨 수로 우승하라는 거야?”
비록 배성열이 대표팀에서 최종 탈락했지만.
에이스와 주전 포수, 1번 타자가 없는 가운데 결승에 오른 강호를 상대로 승리를 차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감독님. 저희 정말 가지 마요?”
“가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전화도 받지 마. 알았어?”
“정말이죠?”
“너희 지금 가 봐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연습 경기만 뛰어야 해. 똥을 싼건 너희 선배들인데 왜 너희한테 난리야? 절대 가지 마. 알았어?”
에이스 강우석은 내심 불안해했지만.
배성열의 탈락을 불만스러워했던 포수 안우현과 김현중은 군말 없이 염대성감독의 지시를 따랐다.
갑작스럽게 열리게 된 대회에서 갑작스럽게 합숙 훈련 일정이 당겨졌으니 협회의 잘못이 크다고 여겼다.
하지만 합숙을 통한 팀워크 강화를 요구한 건 다름 아닌 방용택 감독이었다.
“정말 안 온대?”
“아예 전화도 안 받아.”
“이 녀석들이 감독 알기를 뭐로 아는 거야?”
“그냥 내가 경성고 갔다 올까?”
“됐어.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럼? 경성고 애들 다 탈락시키고 후보 중에서 뽑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그럼 또 시끄러워질 거니까 그냥 넘어가자.”
“넘어 가?”
“늦은 녀석들이야 불이익을 각오하겠지.”
“오호,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4강전 직전에 시작된 합숙 훈련에 불참한 건 경성 고등학교 선수들 뿐이었다.
선인 고등학교는 원투 펀치 김영진과 나해준, 4번 타자 이동엽이 전원 참가했고.
광일 고등학교도 에이스 김신우를 군말 없이 보내주었다.
경성 고등학교와 4강에서 맞붙는 휘명 고등학교는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감독인 방용택이 휘명 고등학교 출신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채준영을 합류시켰다.
“감독님이 이번에 4강에서 떨어지면 선배님 탓이랍니다.”
“인마. 너 하나 빠진 걸로 질 거면 그냥 지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이래 봬도 우리 학교 공격의 중심입니다.”
“공격의 중심은 유성이 같은 애들한테 하는 소리고. 넌 그냥 공격의 구멍.”
“아닌데요?”
“이 짜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째려봐? 너 아직도 내가 너희 학교 선배로 보여?
나 대표팀 감독이야. 정신 안 차려?”
“아직 입소식 안 했는데요?”
작년에 인스트럭터로 모교에 갔다가 알게 된 까불이 채준영에게 헤드록을 걸어준 뒤 방용택 감독은 정원을 체크했다.
코칭스테프 포함 총 27명 중에 자리한 사람은 24명.
경성 고등학교 3인방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염 감독님께 잘 말씀드려봤는데······.”
코칭스테프로 대표팀에 참가한 경성고등학교 민병욱 코치는 방용택 감독을 볼 면목이 없었다.
염대성 감독과 불화로 팀을 떠나려던 무렵에 대표팀 제의를 받긴 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전부 참가했는데 자신이 속한 경성 고등학교 선수들만 불참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방용택 감독은 후배인 민병욱 코치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다 힘없는 내 죄지.”
“아닙니다. 감독님. 제가 4강전 끝나는대로 데려오겠습니다.”
“4강전 끝나면 컨디션 조절해야지 무슨. 그냥 푹 쉬다가 시간 맞춰서 오라고 해. 나는 상관없으니까.”
본래 합숙 일정은 결승전 다음 날로 잡혀 있었다.
다만 결승전을 치르는 두 학교 때문에 나머지 선수들의 훈련을 늦춘다는 게 비효율적이라 일정을 앞당겼던 건데 소집에 불참하겠다면 원칙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 다들 반갑다. 내가 누군지는 알지?”
“방용택 감독님이요!”
“그래. 내가 너희들 감독이다. 선수 시절 방용택을 기억하는 녀석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야구 좀 했거든? 저기 전근우 코치한테 물어보면 아주 자세히 알려 줄 거다.”
“참고로 제가 감독님보다 더 잘 했습니다.”
“어쭈? 한 번 붙어 볼래?”
다소 굳어진 분위기를 감독과 수석 코치가 풀어주자 선수들의 얼굴에도 뒤늦은 웃음이 번졌다.
“다들 사정은 알겠지만 원래 우리나라에서 열릴 대회가 아니었어. 쿠바에서 치르기로 했었는데 그쪽 협회 사정이 좀 그런가 봐. 그래서 부랴부랴 우리나라에서 하게 됐다. 암튼 홈에서 치르는 대회니까 좋은 성적을 거둬야겠지?”
“넵!”
“그래. 나는 큰 욕심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결승만 가자. 우승은 하늘에 맡기고 일단 결승까지는 올라 가 보자. 어때? 할 수 있겠어?”
“네에엡!”
“좋아. 그런 의미에서 밥 먹고 바로 청백전 한 경기 뛰자.”
선수 선발 위원회에서 고르고 고른 선수들이지만 방용택 감독은 선수들의 실력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대학 리그 강호인 성강대학교를 섭외해 연습 경기를 진행했다.
“누가 먼저 던질래?”
방용택 감독이 운을 떼자 투수들이 전부 손을 들었다.
“앞으로 계속 연습 경기를 잡으며 테스트 할 거야.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사흘 이상 쉰 사람만 손 들어.”
불참한 강우석을 제외한 7명의 투수 중에 선발 자원은 6명.
그리고 당장 등판이 가능한 건 3명이었다.
“그럼 현준이부터 던지자.”
“넵. 감독님.”
방용택 감독은 선발 경쟁력이 가장 떨어지는 충열 고등학교 최현준을 선발로 내세웠다.
최현준을 초반에 테스트 한 뒤에 애매하다 싶으면 곧바로 불펜으로 전환할 계획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최현준은 덕우 고등학교 포수 최민석과 함께 불펜으로 달려 갔다.
“경호하고 해준이도 오늘 경기 등판할 거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둬.”
“네. 감독님.”
서운해하는 안경호와 나해준을 달랜 뒤 방용택 감독은 미리 짜 놓았던 스타팅라인업을 발표했다.
“포지션하고 같이 부를 거니까 잘 들어라. 1번에 좌익수 고우일. 2번에 유격수 채준영. 3번에 1루수 이동엽. 4번 지명타자 강준혁. 5번 좌익수 홍상철. 6번 3루수 오대석. 7번에 2루수 홍우진, 8번에 포수 송산아. 그리고 9번타자는 중견수 박유성.”
방용택 감독의 말이 끝나자 모든 선수들의 시선이 박유성에게 향했다.
외야수 테스트에서 전체 1등을 차지하고 배성열을 밀어낸 박유성이 9번 타순으로 밀릴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박유성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지금 타순은 아무 의미 없어. 그러니까 경기에 나가고 싶으면 최선을 다 해라. 알았지?”
“넵!”
방용택 감독이 다시 경각심을 심어주는 동안 수석 코치로 합류한 전근우 코치가 박유성을 따로 불렀다.
“유성아. 9번으로 밀렸다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나도 1번 치다 9번도 쳐 보고 그랬는데 솔직히 그거 은근 기분 더럽다? 타순 돌다 보면 선두 타자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지만 느낌이 다르잖아.
느낌이.”
“그렇죠.”
솔직히 9번 타자로 호명된 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지만.
1번을 치다 9번으로 밀렸을 때의 굴욕감과 비참함은 박유성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유성이 인생 3회차라는 걸 모르는 전근우 코치는 박유성이 이제야 솔직해졌다고 여겼다.
“감독님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오해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미리 말 해줄게. 너는 테스트 통과야. 이변이 없는 한 1번 타자 확정이고.”
“네.”
“뭐야? 안 놀라?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요. 대표팀에서 1번을 쳐야 하는 타자라면 타율이 가장 높은 타자인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짜식이. 제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전근우 코치가 피식 웃었다.
박유성의 말처럼 국가 대표 1번 타자는 정확도가 생명이었다.
국제 대회는 선취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고우일을 비롯해 채준형과 홍우진, 그리고 불참한 김현중까지.
각 팀에서 1번으로 뛰는 선수들은 많지만 그 누구도 박유성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일단 타율 자체가 압도적인데다가 발도 빠르고
무엇보다 투수를 괴롭히는 지능적인 플레이는 전성기 자신을 보는 듯했다.
“만약에 오늘 현중이가 왔다면 현중이가 9번에 들어갔을 거야.”
“그럼 우일이가 나중에 2번을 치는 건가요?”
“고민 중이야. 네 짝이 우일이가 될지 준영이가 될지, 아니면 현중이 그 놈이 될지.”
“저는 누가 와도 상관 없습니다.”
“너야 상관없지. 넌 알아서 잘 하니까. 하지만 우린 상관있어. 네가 만들어준 찬스를 최고의 결과로 만들려면 2번 타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박유성의 활약상에 가려지긴 했지만.
신성 고등학교 2번 타자 오진욱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3할만 쳐줘도 고마울 것 같았던 타율은 3할 6푼을 넘겼고.
희생 번트부터 시작해 진루타, 그리고 벤치 작전 수행 능력까지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프로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는 중이었다.
“그건 진욱이가 잘 하긴 하는데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진욱이 데려올까 했거든? 그런데 알잖아. 협회 사정. 솔직히 너 데려온 것도 감독님이 크게 무리한 거야.”
“그런데 저는 테스트로 통과한 거 아니었어요?”
“만에 하나 테스트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생각하셨을 걸? 감독님 구상에 너는 빼놓을 수가 없으니까.”
“감독님 구상이요?”
“지난 대회 때 일본하고 대만한테 어떻게 졌는 줄 아니?”
“그야······ 스퀴즈로 졌죠.”
“그래. 경기 초반에 스퀴즈 플레이에 당했지. 그래서 이번 대회 때 그거 갚아주려고.”
“스퀴즈로요?”
“꼭 스퀴즈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나하고 감독님은 네 발이라면 배로 갚아 줄수 있다고 확신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전근우 코치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원수는 배로 갚아 주는 게 맞다고 배웠습니다.”
“그래. 역시 너는 말이 통할 줄 알았다. 방 감독님은 무슨 자기 현역 시절 얘기하는데 아니야. 넌 딱 내 과야.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