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53화 (53/412)

타자 인생 3회차! 53화

09. 누가 1번이야? (3)

2

“저 녀석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그러게 말이야.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참.”

“오올~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야. 나 초등학교 땐 영재 소리 들었거든?”

“그래서 이번 중간고사 반에서 몇 등?”

“야. 운동선수한테 성적 물어보는 거 맞아?”

박유성의 타격이 시작되기 전.

패잔병들은 1루 쪽 더그아웃으로 쪼르르 모여 앉았다.

만약 네 사람 중 누구라도 안타를 때려냈다면 분위기가 달랐겠지만.

안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김현중마저 빈손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모두가 하나가 됐다.

“그런데 김혜성 선배 공 엄청 빠르지 않냐?”

“난 태어나서 저렇게 빠른 공은 처음 봐.”

“이관우도 엄청 빠르지 않나?”

“이관우는 김혜성 선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걔는 그냥 덩치빨이잖아.”

“그래서? 이관우한테 안타는 쳐 봤고?”

“나는 못 쳤지만 현중이는 쳐 봤을 걸?”

홍상철과 말을 주고받던 배성열이 김현중을 소환했다.

그러자 애써 무게를 잡고 있던 김현중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관우 공도 빠르긴 하지.”

“와, 뭐냐 김현중. 이관우는 별 거 아니다 이거냐?”

“우일이 너하고 상철이는 지역이 달라서 이관우를 못 만난 거잖아. 막상 타석에 서 보면 칠만 할 걸?”

“그럼 성열이는 뭐가 되는데?”

“성열이는 원래 좌완 투수한테 약해. 만약에 오늘 우완 투수가 나왔다면 홈런을 때렸을 걸?”

“역시. 현중이 네가 뭘 좀 안다니까?”

김현중이 배성열을 추켜세우자 고우일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같은 경성 놈들 아니라고 서로 물고 빨고 지랄도 풍년이네.”

“청대에 인흥고는 너 한 명 뿐이야?”

“나 혼자야. 지방 선수들은 여러 명 뽑히기 어렵다고. 경복도 상철이 혼자일걸?”

인흥 고등학교와 경복 고등학교는 여러 차례 전국 대회 우승을 거머 쥔 전통의 강호였다.

이번 황금사자기에도 두 학교 모두 8강에 올라 온 상태였다.

하지만 청소년 대표팀을 선발할 때면 지방팀 학교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우선적으로 수도권 쪽 학교에서 선수들을 수급하다보니 드래프트 상위 라운드지명을 받을 만 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태극 마크를 달기 어려웠다.

“그런데 왜 우리는 4명이나 뽑힌 거야?”

“놀리냐?”

“이래서 경성 놈들은 안 된다니까.”

“미안한데 그 경성 놈에 나는 좀 빼 줄래?”

“야! 너도 경성 놈 맞거든?”

배성열은 어떻게든 김현중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김현중은 이런 그림 자체가 싫었다.

김혜성을 상대로 첫 안타를 때려냈다면 지금쯤 모두의 부러움을 받고 있었을 텐데.

마지막 타석 때 생각이 많아져서 한복판에 들어온 빠른 공을 놓친 게 후회가 됐다.

“야. 시작한다.”

그 때 더그아웃에서 휴식을 취하던 김혜성이 마운드로 돌아왔다.

“저 녀석. 안타를 칠 수 있을까?”

고우일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테스트를 받는 5명 중에 타율은 박유성이 가장 높았다.

2등은 김현중.

‘그리고 내가 3등.’

김현중과 고우일의 타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

고우일이 멀티 안타를 때려내거나 김현중이 한 경기 부진하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하지만 박유성의 타율은 쫓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애당초 시즌 내내 6할을 치는 게 반칙이지.’

고우일은 냉정하게 박유성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클린업도 아닌 1번 타자가 팀의 공격을 주도하면서 개인 성적까지 챙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현중의 생각은 달랐다.

“못 칠 거야.”

요즘 이곳저곳에서 박유성의 이름이 들리고 있지만.

김현중은 아직 자신을 따라오려면 멀었다고 여겼다.

애당초 우승권 팀의 1번 타자와 전국 대회 16강만 올라가도 칭찬받는 팀의 1번 타자가 받는 중압감은 같을 수가 없었다.

타율이 더 좋은 것도 그만큼 견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일 터.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자. 그래야 다시 하지.’

김현중은 박유성도 자신과 다를 바 없을 거라 확신했다.

지금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막상 김혜성의 공을 맛보고 나면 동공지진이 일어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첫 타석이 생각보다 오래 갔다.

“뭐야? 빠진 거야?”

“아슬아슬하게 빠진 거 같은데?”

“아까비. 미트질 했으면 스트라이크 잡아 줬을 건데.”

“심판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유성이 녀석. 운 좋네.”

“그러게 말이야.”

“뭐야? 이것도 볼이야?”

“이건 깊었어.”

“근데 유성이 녀석 뭐 하냐? 설마 쫀 거야?”

“바짝 쫄았네.”

“저러다 지리는 거 아니냐?”

“이미 촉촉하게 적셨을지도 모르지.”

초구 슬라이더에 이어 2구 몸 쪽 빠른 공이 들어왔을 때 까지만 해도 박유성은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3구 째.

몸 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잡아당겨 1루 쪽에 날카로운 파울 타구를 만들자 패잔병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방금 뭐야? 뭘 친 거야?”

“스플리터 같았어.”

“스플리터? 혜성 선배 스플리터도 던져?”

“내 타석에는 안 들어와서 잘 모르겠는데?”

“스플리터 맞아. 영상 본 적 있어.”

“뭐? 영상? 언제?”

“그냥. 예전에 잠깐.”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던 김현중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김혜성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파울이잖아.”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원 스트라이크 먹었다.”

“이제 원 스트라이크야?”

“초구하고 2구는 볼이었잖아. 너 야구 안 봤어?”

“난 초구 스트라이크인 줄 알았는데?”

“하아. 나 지금 누구하고 야구 보니?”

비록 스플리터를 얻어맞긴 했지만 패잔병들의 눈에는 여전히 김혜성이 앞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김혜성은 섣불리 승부를 걸지 못했다.

4구 째 바깥 쪽 꽉 차게 들어가는 빠른 공으로 파울을 유도해내며 볼카운트를 끌고 오는 데 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따악!

5구 째 몸 쪽 낮게 떨어진 체인지업은 가볍게 커트가 됐고.

퍼엉!

6구 째 다시 한 번 바깥쪽으로 던진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났다.

따악!

7구 째 허를 찌르듯 커브를 던져봤지만 그마저도 커트.

“하아. 진짜 사람 성격 나오게 하네.”

던질 수 있는 공을 전부 던진 김혜성은 다시 한 번 스플리터 그립을 쥐었다.

그리고는 박유성의 몸 쪽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김혜성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제법 날카롭게 인코스를 파고 들었지만 한대 욱은 웃을 수가 없었다.

어깨에 과하게 힘이 들어간 탓에 공이 제대로 채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제발 놓쳐라!’

한대욱은 박유성이 타이밍을 잡지 못하길 바랐다.

빠른 공인 줄 알고 덤벼들었다가 스플리터인 걸 알고 방망이를 멈춰 세워주길 기도했다.

하지만 40년 간 수많은 실투를 때려낸 박유성이 이 공을 놓칠 리 없었다.

‘왔다!’

스플리터가 밀려들어온다는 걸 알아챈 박유성은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맞춰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방망이 중심에 찍히듯 걸린 공은 그대로 펜스를 직격했다.

“와, 이게 안 넘어가네.”

이번에는 홈런일 줄 알았던 박유성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후우······.”

이번에는 넘어갈 줄 알았던 김혜성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용택 감독도 혀를 내둘렀다.

“역시 박유성이야. 실투를 놓치지 않았어.”

방용택 감독이 박유성에 대해들은 건 대통령배 4강전 직후였다.

“형! 대박!”

“왜? 또 길 가다가 아이돌이라도 봤냐?”

“나 방금 제 2의 전근우를 찾았어.”

“뭘 찾아?”

“제 2의 전근우. 난 내 뒤를 이을 건 현민이 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착각이었어.”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라면 전국 대회는 8강부터 챙기는 게 기본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던 방용택 감독은 후배인 전근우 수석 코치에게 전력 분석을 일임했다.

“근데 전력 분석 할 필요 있어? 전력분석팀에서 알아서 다 할텐데?”

“그게 수석 코치란 놈이 할 소리냐?”

“뭐래. 감독도 농땡이 부리는데.”

나름 중요한 임무였지만 전근우는 시큰둥해했다.

예년보다 빨라진 U-18 야구 월드컵 일정에 맞춰 선수 선발 위원회까지 가동되고 있으니 자신이 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4강전에서 박유성을 본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형. 그 녀석은 진짜야. 무조건 데려가야 해.”

“신성의 2루수가 그렇게 잘 해?”

“무슨 소리야. 걔는 중견수인데.”

“제 2의 전근우라며?”

“플레이 스타일이 나를 닮았다는 거지. 그리고 나 중견수도 봤는데?”

“그렇게 따지면 제 2의 방용택이 맞지 않냐?”

“에이, 형. 형하고는 안 닮았어. 우리 유성이는 형처럼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는다고.”

“오랜만에 좀 맞아 볼래?”

한결같이 깐족거리는 전근우는 얄미웠지만.

뒤늦게 도착한 4강전 영상을 확인한 방용택도 박유성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하네.”

“장난 아니지?”

“13대 3이면 기가 죽을 만한데 이 녀석은 눈빛이 살아 있어.”

“내 말이 그거라니까? 우리 유성이는 싸울 줄 알아. 근성이 있다고.”

뒤늦게 박유성을 발견해 낸 걸 아쉬워하던 것도 잠시.

박유성의 터무니없는 성적을 확인한 방용택은 곧바로 선수 선발 위원장인 김윤철 이사를 찾아갔다.

“위원장님. 지난번에 감독 추천권 있다고 하셨죠?”

“그렇긴 한데 선수 선발은 다 끝나지 않았나요?”

“꼭 데려가고 싶은, 아니 데려가야 할 선수가 생겼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박유성입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려 했던 김윤철 위원장도 박유성의 성적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 정도 성적이면 지난 심사 때 올라왔어야 했는데 왜 빠진 거야?’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 박유성을 누락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김윤철 위원장은 직권으로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그 덕분에 방용택 감독은 박유성의 타격을 직접 직관할 수 있었다.

“근우 녀석이 봤으면 난리났겠는데?”

비공개 테스트라 기자들은 물론이고 협회 관계자들까지 제안을 한 상태인 게 아쉽다고 느껴지려던 찰라.

따악!

박유성의 방망이가 다시 한 번 불을 뿜었다.

김혜성이 전력을 다 해 내던진 공을 박유성이 힘들이지 않고 좌중간 깊숙한 곳으로 밀어낸 것이다.

“하아. X발 진짜.”

연달아 안타를 허용한 김혜성의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고맙고 대견한 후배인 걸 떠나 계속 얻어맞기만 하니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차피 프로 가면 까먹을 거니까 칠 수 있을 때 최대한 쳐야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 쥔 박유성은 초구와 2구를 골라낸 뒤 3구 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가볍게 밀어 쳐 라인 안쪽에 떨어뜨렸다.

그 신기에 가까운 배트 컨트롤을 보며 방용택 감독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 녀석 진짜 딱 나네. 리틀 방용택이야. 하하하.”

세 타석 연속 안타를 때려 낸 박유성은 당당히 3루 쪽 더그아웃으로 걸어가 김혜성의 가방에서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야 인마! 그거 내 거야!”

“좀 나눠 먹읍시다.”

“그럼 삼진이라도 당해 주던가!”

“에이. 그건 승부 조작이죠.”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던 김혜성은 그 자리에서 재대결을 요청했고.

박유성을 빼고 진행한 2라운드에서 배성열만 안타를 때려 내지 못하면서 청소년 야구 대표팀 최종 명단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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