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51화 (51/412)

타자 인생 3회차! 51화

09. 누가 1번이야? (1)

1

박유성의 선발은 어렵지 않게 확정지었지만.

박유성을 대신해 누굴 빼야 하느냐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저는 박유성이 선발된 것으로 만족합니다.”

의제를 꺼냈던 방용택 감독은 이득만 챙기고 발을 빼 버리면서 다시 팽팽한 정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래도 김현중이나 배성열이 빠져야 하지 않을까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경성 고등학교 선수만 네 명이니까 한 명은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니, 경성이 야구를 잘 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선수 선발 위원회를 왜 만듭니까? 그냥 학교별로 잘하는 애들 한 명씩 모아서 대회 치르는 게 낫죠.”

“정말 그렇게 할까요? 그럼 서울 쪽 선수들 대거 탈락할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여기서 서울 선수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세요. 무슨 대한민국 야구는 서울에서만 하는 줄 알겠네.”

“자, 자 진정들 하시고. 노 교수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4대 4로 나뉜 양 측의 싸움이 과열되자 김윤철 위원장이 노정우 교수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노정우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일단 투수하고 포수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야 당연하죠.”

“투수는 무조건 8명으로 가야 합니다. 일본은 투수를 9명이나 데려 온다는데 여기서 줄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포수는 2명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얘기는 지난번에 했지 않습니까. 세 번째 포수가 불펜 포수 역할도 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두 명으로 감당이 되겠습니까?”

“기간이 짧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홍 이사님이 포수 마스크 써 보세요. 그게 얼마나 중노동인지.”

일주일에 6일 이상 경기를 치르는 프로 야구와 달리 고교 야구는 연전을 치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정이 빡빡한 전국 대회도 심하면 이틀에 하루 꼴이다 보니 포수 두 명으로 대회를 치르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럼 결국 야수 쪽에서 자리를 내야겠네요.”

“설마 내야수를 줄일 생각은 아니시죠? 뺀다면 강준혁이나 이동엽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꼭 필요한 선수들입니다.”

“걔들 빼면 난리 날걸요?”

“걔들을 빼느니 차라리 홍상철이나 배성열을 빼는 게 나을 겁니다.”

이번 청소년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내야수 경암 고등학교 1루수 강준혁과 충열 고등학교 3루수 오대석, 선인 고등학교 1루수 이동엽, 휘명 고등학교 유격수 채준영, 북익 고등학교 2루수 홍우진이었다.

이 중 이동엽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멀티 포지션이 가능했다.

강준혁은 2학년 때 까지 팀에서 3루수로 활약했고.

오대석과 채준영은 중학교 때 각각 유격수와 2루수로 뛰었으며 홍우진은 내야 전 포지션 수비가 가능했다.

내야수 숫자를 5명으로 줄인 것도 포지션 돌려막기가 가능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한 명을 더 줄이면 그 구상 자체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외야수 쪽에서 교통정리를 해야겠네요.”

“그게 맞습니다. 새 외야수를 넣을 거면 기존 외야수를 빼야죠.”

“누굴 뺍니까? 뺄 사람이 없는데.”

“뺄 사람을 찾는 게 우리 일 아니겠습니까?”

“일단 빼기 어려운 선수부터 정리합시다.”

“고우일은 안 됩니다. 지방 선수고 좌익수를 봐야 해요.”

“홍상철도 데려 가야죠. 요즘 타격감에 물이 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방 선수고요.”

“박유성은 서울이니까 김현중이나 배성열 중에서 한 명 빼는 게 맞지 않을까요?”

“배성열을 빼면 클린업이 헐거워질 겁니다.”

“그럼 김현중밖에 없네요.”

“김현중은 수비를 잘 하잖아요. 공격의 첨병이고요.”

“그런데 그 역할은 박유성도 가능한 거 아닙니까?”

무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도돌이표 회의는 결국 테스트를 통해 결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최진태 교수도 테스트 결과에 따라 박유성이 탈락할 수 있다는 조건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 교수. 이러다 현중이가 떨어지는 거 아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까다로운 선수로 준비를 시킬 테니까.”

사흘 후.

갑작스런 테스트 통보를 받고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을 찾은 박유성은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형!”

“왔냐?”

“뭐예요? 형이 여기 왜 있어요?”

“왜 있긴. 내가 그 비밀 투수다.”

“오호, 오늘 준비된 투수가 형이었어요?”

박유성을 잡기 위해 최진태 교수가 선택한 건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동호 대학교 김혜성.

“왜? 놀랐냐? 쫄려?”

“아뇨. 완전 반가운데요?”

“어쭈. 이 놈 봐라? 나 예전에 김혜성 아니다. 완전 다시 태어났어.”

“형. 저는 인생 3회차에요.”

“뭐? 2회차도 아니고 3회차?”

“에이, 2회차는 흔하죠.”

“하하. 말로는 너 못 이기겠다.”

오랜만에 만난 김혜성은 얼굴이 좋아보였다.

에이전트 최상규와 결별하고 마음 고생 좀 했을 줄 알았는데 훌훌 털어내고 앞선 회차 때의 김혜성으로 나아가는 모양이었다.

“암튼 형. 알죠?”

“그럼 알지.”

“역시. 형은 말이 통할 줄 알았어요.”

“전력을 다 하라는 거잖아. 절대 봐주지 말라고. 그렇지?”

“아니 형. 그게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암튼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으니까 각오해. 알았지?”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는 김혜성을 보며 박유성도 피식 웃었다.

박유성 또한 김혜성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후.

“너희가 전부 좌타자라서 일부러 좌완 투수를 섭외했다. 김혜성이라는 이름은다들 들어 봤지? 요즘 대학 리그에서 날아다니는 투수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방용택 감독의 당부에 이어 청소년 대표팀 최종 탈락자 1인을 가리는 라이브배팅이 시작됐다.

첫 번째 타자는 가위바위보에서 제일 먼저 탈락한 고우일.

“감독님. 안타만 쳐도 되는 거죠?”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렴.”

“넵. 알겠습니다.”

5명의 후보 선수들 중에 장타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평가를 받아서일까.

고우일은 일부러 방망이를 짧게 쥐고 안타를 만들어 낼 궁리를 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화끈한 타격쇼는 자신 없지만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내는 싸움이라면 충분히 할 만 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김혜성은 초구부터 157km/h짜리 빠른 공을 때려 넣으며 고우일의 기를 꺾었다.

“와, 씨. 뭐가 이렇게 빨라?”

“좌완이라 더 빠를 거다.”

김혜성을 따라 온 포수 한대욱이 피식 웃었다.

작년 겨울 이후로 확 달라진 김혜성의 빠른 공은 현재 대학 리그에서 언터처블로 통했다.

제구력은 조금 들쑥날쑥해졌지만.

김혜성과 4년 째 한솥밥을 먹는 입장에서 제구에 신경 쓰는 것보다 지금처럼 칠 테면 쳐 보라고 찍어 누르듯 던지는 게 더 마음에 들었다.

“으앗!”

2구 째 몸 쪽 깊숙이 찔러 들어온 공에 엉덩방아를 찧은 고우일은 이렇다 할 타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세 타석을 날렸다.

스탠딩 삼진.

헛스윙 삼진.

헛스윙 삼진.

“감독님. 이건 반칙 아닌가요?”

“왜? 억울하냐?”

“전 외야 전 포지션이 가능한데 타격으로만 승부를 보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벌써 꼴등이라고 단정 짓는 거야? 다른 애들 하는 것도 봐야지.”

방용택 감독이 고우일을 달래는 동안 두 번째 타자 배성열이 타석에 들어왔다.

“경성 고등학교 4번 타자 아니야?”

배성열을 알아 본 김혜성이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퍼엉!

159km/h까지 구속을 끌어 올렸다.

“이걸 어떻게 치라는 거야?”

자신만만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던 배성열도 안타 없이 물러났다.

대기 타석에서 얼추 타이밍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타석에 서 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공이 더 빠르고 날카로웠다.

삼진. 2루 앞 땅볼. 중견수 쪽 뜬공.

세 타석 연속 삼진을 당한 고우일보다는 나았지만 그 정도로는 방용택 감독의 눈도장을 받기 어려웠다.

“다음 누구지?”

“제 차례입니다!”

세 번째로 타석에 들어선 건 경복 고등학교의 홍상철.

빠른 공 변태라는 별명답게 빠른 공은 동물적으로 때려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안타가 나오겠지?”

방용택 감독도 홍상철이 하나 해 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홍상철의 미래가 훤히 보였다.

‘보나마나 빠른 공에 정신이 팔려서 막 휘둘러대겠지.’

그 예상대로 홍상철이 초구 빠른 공을 건드리자 김혜성은 곧바로 슬라이더를 꺼내 들었다.

따악!

몸 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무작정 걷어낸 홍상철은 뒤이어 들어 온 바깥쪽 스플리터를 크게 헛치며 첫 번째 기회를 날려먹었다.

“빠른 공만 던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른 애들은 빠른 공만 들어오던데요?”

“그건 쟤들이 빠른 공을 못 쳐서 그런 거고. 넌 좀 치더만?”

“네. 제가 좀 칩니다.”

“그러니까. 넌 좀 진지하게 상대해 줄게.”

김혜성이 변화구를 섞어 던지자 홍상철이 자랑하는 빠른 공 공략법도 무위로 돌아갔다.

좌투수의 터무니없이 빠른 공을 잡아내려면 좌타자도 그만큼 빨리 준비를 하고 스윙을 해야 하는데 슬라이더에 스플리터까지 날아드니 타이밍을 맞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홍상철의 타석도 안타 없이 끝이 났고.

문제의 김현중이 타석에 들어섰다.

‘짜식. 오랜만인데 눈도 안 마주쳐주네.’

어쩌다보니 지금은 포지션 경쟁자로 만나게 됐지만.

박유성과 김현중은 가끔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였다.

나눔 리그(파이터즈)와 드림 리그(베어스)를 대표하는 교타자로 언론에서 자주 묶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서로를 진짜 라이벌처럼 의식했지만.

시간이 지나 더 잘난 후배들에게 치이기 시작하니까 동병상련처럼 서로를 챙기게 됐다.

“암튼 네 자리 뺏을 생각 없으니까 잘 해라.”

박유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앞선 회차의 친분을 떠나 기왕이면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김현중이 살아남길 바랐다.

하지만 프로 시절에 제법 쳤다는 김현중도 김혜성의 공은 버겁기만 했다.

첫 타석은 헛스윙 삼진 아웃.

두 번째 타석은 2루수 앞 땅볼.

그나마 마지막 타석에서 방망이를 짧게 잡고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는 기지를 보여줬지만.

“들어왔다.”

무릎 높이로 내리꽂히는 158km/h짜리 빠른 공 앞에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김현중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타석을 내려갔고.

김혜성도 마운드에서 내려와 3루 쪽 벤치에 앉았다.

앞서 후배들을 상대할 때는 간단하게 땀만 닦고 다시 마운드로 나왔지만.

“유성이를 상대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김혜성은 적당히 번들거리는 얼굴을 수건으로 훔쳤다.

그 다음에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바나나를 하나 꺼내 먹었다.

“뭐 해? 벌써 지쳤어?”

김혜성이 뜸을 들이자 한대욱도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지치긴. 본 게임은 이제부터인데.”

“본 게임?”

“내가 지난번에 말 했지? 고딩한테 제대로 털렸었다고.”

“그거 뻥 아니었어?”

“누가 그래?”

“윤식이가. 너 허언증 있다던데?”

“허언증은 무슨. 저기 쟤야.”

“······?”

“저기 저 녀석이 나하고 윤식이 박살낸 놈이라고.”

잔뜩 상기된 김혜성의 두 눈이 대기 타석 쪽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박유성이 새까만 방망이를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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