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50화
08. 태극마크 어때? (5)
경성 고등학교 3학년 김현중의 스타일은 박유성과 비슷했다.
빠른 발을 이용한 적극적인 베이스러닝과 정확한 스윙을 바탕으로 한 타격.
그리고 클린업을 쳐도 될 정도의 장타력까지.
괜히 김현중을 제 2의 송현민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물론 단순히 성적만 놓고 보자면 박유성이 조금 더 나은 건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김경진인 게 커.’
서울시 야구 협회가 대한 야구 협회 산하 단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부들처럼 대한 야구 협회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시 야구 협회장을 역임한 사람들이 대한 야구 협회 요직을 꿰차다 보니 서울시 야구 협회장을 부회장이나 사무처장 급으로 쳐주곤 했다.
보통은 한국 야구 협회장 라인이 부회장과 사무처장, 서울시 야구 협회장을 차지하는 편이지만 현 구도는 달랐다.
현 김영문 협회장은 4년 임기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고.
다음 번 협회장은 김경진 서울시 야구 협회장이 유력한 상태였다.
‘애당초 부정 취업건이 아니었다면 지난 번 선거 때 김경진이 협회를 장악했겠지.’
4년 전 선거 때도 김경진 서울시 야구 협회장은 유력 후보였다.
김경진 협회장을 막기 위해 반대편에서 김영문 협회장을 밀었지만 역부족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서울시 야구 협회에서 부정 취업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김영문 협회장은 김경진 협회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맹공을 퍼부었고.
고작 취업 비리 때문에 모든 걸 잃을 수 없었던 김경진 협회장은 후보직 사퇴로 악재를 덮었다.
반 년 가까운 조사 끝에 해당 비리는 김경진 협회장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오히려 김영문 협회장 쪽에서 일부러 터트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김영문 협회장과 김경진 협회장 사이의 감정의 골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현중의 대체 선수로 박유성을 선발한다면?
김경진 협회장 쪽에서는 선전 포고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난 솔직히 다 끝난 선수 선발을 재론해야하는지도 의문이야.”
장기룡 교수가 일부러 싫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협회 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 은근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노정우 교수의 성향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노정우 교수도 바보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하면 내가 박유성이 편 들어줄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박유성이 뽑히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난 이대로 회의 취소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자네가 위원장님께 말씀드리던가.”
장기룡 교수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노정우 교수가 코웃음을 쳤다.
“이거 왜 이래? 막말로 위원장님이 무슨 힘이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직원들 앞에서 그런 말은 실례잖아.”
“아무리 그래도라는 말을 붙인 자네가 더 실례 같은데?”
“하아. 됐어. 자네하고 무슨 말을 하겠다고.”
선수 선발 위원회에 소속된 인원은 총 11명.
그 중 김영문 협회장 쪽 사람과 김경진 협회장 쪽 사람이 똑같이 4명씩 포진되어 있었다.
나머지 세 명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노정우 교수였다.
위원장인 김윤철 이사는 대세를 따르려 들 테고.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게 될 방용택 감독은 선수 선발 위원들과 얼굴을 붉혀 좋을 게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두 사람 다 기권을 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표를 받는 쪽으로 붙을 터.
‘저 능구렁이 같은 인간을 끌어들이긴 해야 하는데 참······.’
짜증을 내던 장기룡 교수의 시선이 다시 노정우 교수 쪽으로 향했다.
다른 걸 떠나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서 성적을 내려면 고교 야구 에이 스 급 투수들의 치를 떨게 만든 박유성이 꼭 필요해 보였다.
그 때였다.
“여기들 있었어?”
문이 열리고 최진태 교수가 들어왔다.
“최 교수님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장기룡 교수와 노정우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최진태 교수를 맞았다.
비록 직책은 같지만 최진태 교수는 동갑인 두 교수보다 4학번이나 선배였다.
게다가 협회 일도 오래 전부터 해 왔으니 예우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밥들은 먹었어?”
비어 있던 상석에 앉으며 최진태 교수가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는 노영운대리를 보며 말했다.
“노 대리. 시원한 녹차 한 잔 줘 봐.”
“아, 넵. 잠시만요.”
노영운 대리가 탕비실로 들어가자 노정우 교수가 한 마디 했다.
“직원들 좀 그렇게 부려먹지 마시라니까요.”
“부려먹긴 누가 부려먹어? 그리고 손님이 왔으면 물 한잔 가져다주는 게 기본 아냐?”
“우리가 왜 손님입니까.”
“뭐야? 같은 노 씨라고 편드는 거야? 그래?”
“그 얘기 왜 안하시나 했네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노정우 교수를 무시하고 최진태 교수가 장기룡 교수를 바라봤다.
“장 교수. 또 무슨 수작이야?”
“뭐가 말입니까?”
“뜬금없이 박유성이는 뭐야? 그리고 여기서 노 교수하고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박유성 건은 저도 모릅니다. 노 교수가 시간을 잘못 알려줘서 저도 불려 나온 거고요.”
“허, 거짓말을 하려면 좀 성의 있게 해라.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최진태 교수가 보란 듯이 콧방귀를 꼈다.
회의 시작 2시간 전부터 노정우 교수와 장기룡 교수가 협회로 나왔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부랴부랴 출동했는데 딴 소리라니.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비웃을 것 같았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더 얘기해 봐야 입만 아플 것 같자 장기룡 교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노정우 교수도 도망치려 했지만 최진태 교수가 냉큼 붙잡았다.
“노 교수는 나하고 얘기 좀 하지?”
“저요?”
“송 과장은 자리 좀 비켜 주고.”
“네? 아, 네. 그래야죠. 노 대리. 경기장 상태 한 번 보고 오자고.”
“경기장 좋죠. 가시죠, 과장님.”
송기섭 과장과 노영운 대리까지 내쫓은 최진태 교수는 노정우 교수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솔직히 말 해 봐. 장기룡이가 뭐라고 떠들었어?”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자꾸 이럴 거야?”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요? 남들이 들으면 진짜 뭐라도 있는 줄 알겠습니다.”
“이 친구가! 자네 협회 위촉될 때 내가 힘 써준 거 잊었어?”
선수 선발의 공정성을 위해 선수 선발 위원들은 내부 추천을 받은 외부인들로 꾸렸다.
물론 말이 좋아 외부인이고 말이 좋아 위촉이지만.
대회가 있을 때마다 얼굴을 비추고 적잖은 보수를 챙길 수 있는 꿀 보직이라한 자리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노정우 교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선배님. 아니 최 교수님. 자꾸 이러시면 저 때려칩니다.”
“에헤이.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고 그래?”
“저요. 지금껏 한국 아마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서 여기까지 온 거고요.”
“알지. 알아. 내가 설마 그걸 모를까?”
“아시면 제 앞에서 쓸 데 없는 소리 마세요.”
“그래. 알았어. 방금 말은 내가 실언한 걸로 하지. 취소. 됐어?”
“이번에는 저도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발끈하는 노정우 교수를 어렵게 달랜 최진태 교수가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박유성이 말이야. 도대체 뭐야?”
“성적 안 보셨습니까?”
“봤지. 봤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이미 선수 선발 다 끝냈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U-18 야구 월드컵의 선수 엔트리는 총 20명.
보통 투수가 8명, 포수 3명, 내야수 5명, 외야수 4명 정도로 엔트리를 채우는 편이었다.
이번 대표팀도 기존의 선수 선발 비율을 준수했다.
주전급 외야수 3명에 전 포지션 백업이 가능한 외야수 1명.
경성 고등학교를 2년 연속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끈 김현중과 배성열을 비롯해 인흥 고등학교 고우일, 그리고 경복 고등학교의 해결사 홍상철까지.
이름값만으로 치면 최고들만 뽑아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박유성까지 집어넣으면 누굴 빼야 할까.
백업 선수가 한 명 뿐인 내야수 자리를 빼야 할까?
아니면 가뜩이나 고생해야 하는 포수를 줄여야 할까?
“설마 투수 빼고 외야수를 5명 데려가자는 건 아니지?”
“투수는 빼면 안 되죠.”
투수 얘기가 나오자 노정우 교수가 냉큼 고개를 흔들었다.
많아야 9경기를 치르는 대회에서 투수가 8명이나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5일 연속으로 진행되는 조별 풀리그에서 성적을 내려면 최소 5명의 선발 투수가 필요했다.
만약 여기서 투수를 줄이면 불펜 투수 한 명과 마무리 투수 한 명으로 경기 후반을 버텨야 한다.
“그렇지? 그건 아니지?”
“투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지난 대회 보세요. 투수 세 명 식중독 걸리니까 아무것도 못 했잖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또 외야수를 뽑겠다니 제 정신인건지 원.”
박유성이 들어오면 외야수에서 자리를 만드는 게 맞겠지만 최진태 교수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김현중이 밀려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경성 고등학교 배성열과 경복 고등학교 홍상철은 대통령배에서 홈런왕 경쟁을 했을 만큼 힘이 좋은 타자였다.
둘 다 주 포지션이 우익수인 게 문제였지만 상대 투수에 따라 동시 출전을 고려할 정도로 대표팀의 중량감을 책임지고 있었다.
남은 김현중과 고우일 중에서는 김현중이 조금 더 앞서는 편이지만.
수도권과 지방 학교 선수들의 균형 선발 원칙 상 고우일을 빼면 지방 학교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말 하는 걸 보니까 김현중 자리는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거 같은데······ 타협을 보기가 쉽지 않겠어.’
이 때 까지만 해도 노정우 교수는 김영문 협회장 쪽에서 박유성을 테이블 위에 올린 거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예상 밖의 인물이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강력히 요청해서 마련된 자리입니다. 다들 바쁘실 텐데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선수 선발 때 자리만 채우고 있던 방용택 감독이 김윤철 위원장의 허락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박유성 선수를 요청한 게······?”
“네. 제가 요청했습니다. 솔직히 현민이 이후로 현민이만큼 잘 하는 녀석은 당분간 나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박유성 이 친구, 진짜 잘 합니다. 공격은 물론이고 주루에 수비까지. 이 친구는 무조건 데려가야 합니다.”
“······!”
판세를 보며 말을 아껴야 할 방용택 감독이 선수를 치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방 감독님이 이렇게까지 원하시면 뽑는 게 도리 아닐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성적을 내라고 압박하려면 원하는 선수를 뽑아 줘야죠.”
“그런데 지금 외야수 자리가 남아 있습니까?”
“없으면 기존의 선수를 빼서라도 자리를 만들어야죠.”
김경진 협회장 쪽 위원들이 반발했지만 표결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애당초 박유성의 성적 자체가 워낙에 좋았기 때문이다.
주말 리그 전반기와 대통령배, 황금 사자기를 거친 박유성의 이번 시즌 타율은 무려 0.67750타석 이상 들어선 국내 고교 야구 타자들 가운데 가장 높았다.
게다가 38개의 도루와 8개의 홈런, 26개의 볼넷은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된 그 누구와 비교해도 뛰어났다.
“총 11명이 투표한 가운데 찬성이 6명, 반대가 4명, 기권이 1명이네요. 그럼 박유성 선수를 추가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