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49화 (49/412)

타자 인생 3회차! 49화

08. 태극마크 어때? (4)

3

어른들은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라 부르는 U-18 야구 월드컵은 본래 쿠바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쿠바 협회에서 연초에 대회 개최를 포기하면서 새로운 개최지가 필요해졌고.

아마추어 야구 인프라를 확보한 서울에서 33회 U-18 야구 월드컵을 개최하게 됐다.

국내 개최는 지난 2019년 이후 9년 만.

29회 대회 때는 기장군의 따뜻한 날씨를 활용해 8월 말부터 대회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선 지명이 발표되는 7월 이전에 대회 날짜를 잡아버린 것이다.

“이거 대회가 빨라도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신성 야구장을 쓰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황금사자기 끝나고 주말 리그 후반기 전까지 딱 2주가 비잖아요. 그 때 바짝 해야지 아니면 또 경기장 알아본다고 우리만 죽어납니다.”

서울 연고의 11구단 창단 신청을 받았을 때 프로 야구 협회는 신청 구단들에게 아마추어 야구와의 공생안을 요구했다.

당시 태산 그룹을 비롯해 11구단에 눈독을 들인 구단들이 야구발전 기금을 내놓겠다고 말했지만 신성 그룹은 달랐다.

“국제 대회를 치르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한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을 만들겠습니다.”

결국 신성 그룹이 11구단 창단 기업이 됐고.

서울 한복판에 4개 경기장을 클로버 형태로 이어붙인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당초 계획보다 대지 인수 자금이 많이 들어가서 잠시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지만 신상욱 회장의 굳은 의지에 힘입어 계획대로 경기장이 완공됐고.

서울 지역 내 대부분의 경기를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을 통해 치르게 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회 일정도 철저하게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의 스케줄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8강부터는 목동이지?”

“네. 이번 주 목요일에 16강전 치르고 나면 그 때부터는 경기장 빕니다.”

“그럼 보수 시간은 충분할 테고. 또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게 있나?”

“좌석 좀 늘려야 할 걸요? 신성 구장 기본 500석이잖아요.”

“아이고. 의자 설치하느라 또 죽어나겠네.”

신성 고교 야구 경기장은 기본적으로 1루쪽과 3루쪽에 총 500석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좌석을 늘리는 게 가능했다.

고교 야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보니 평소에는 좌석들을 철거해서 쓰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2천석 규모로 바꿀 수 있었다.

“과장님도 하시게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런데 세계 야구 협회에서 뭐라고 했다며?”

“2천석이 너무 적다고 했답니다.”

“거기 스탠드까지 활용하면 3천명도 충분히 가능하잖아?”

“그냥 만만한 게 우리죠. 어떻게든 관중 수익 늘려보겠다는 건데 참······.”

“진짜 해주는 건 없으면서 따지는 건 더럽게 많네.”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입니다.”

대회 운영을 준비 중인 송기섭 과장과 노영운 대리가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제 대회 유치는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말들이 많지만.

대한민국 쯤 되는 나라에 아마추어 야구 대회는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치르는 대회 준비하는 게 속 편해.”

“그렇죠. 최근에는 신성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참, 올 해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신성이요? 신성 호텔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이야, 역시 신성이야. 다른 대기업들하고는 급이 다르다니까?”

“신성이 유별난 거지 다른 대기업들도 할 만큼은 하잖아요.”

“할 만큼만 하니까 문제지. 좋은 선수들은 땅 파면 나오나? 미리미리 거름을 줘야 잘 자랄 거 아냐.”

송기섭 과장이 혀를 찼다.

프로 야구 구단을 운영 중인 대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아마추어 야구를 지원하고 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인프라가 앞서는 일본이나 미국을 따라잡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그나마 신성 회장님이 야구를 좋아하시니 망정이지 참······.”

“다른 회장님들 뭐라고 할 거 없다니까요. 솔직히 누가 요즘 고교 야구를 봅니까.”

“그게 지금 협회 직원이 할 소리야?”

“저는 이번 대회도 기대 접었습니다. 우승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동메달이라도 땄으면 좋겠어요.”

노영운 대리가 푸념하듯 말했다. 그러자 송기섭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악담을 해라. 악담을 해.”

“솔직히 과장님도 기대 안 하시잖아요.”

“아닌데? 난 기대 하는데?”

“우리 마지막 우승이 언제인 줄은 아세요?”

“20년 전이잖아. 23회 대회 때.”

“어떤 대회요?”

“2008년 캐나다 대회.”

“오올, 그래도 기억은 하시네요?”

“그 때 2년 연속 우승하고 황금세대니 뭐니 떠들썩했잖아. 그런데 그 친구들도 이제 거의 다 은퇴를 했으니 원······.”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송기섭 과장이 씁쓸히 웃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 금메달을 땄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요즘 야구하는 친구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 때 노 대리는 몇 살이었어?”

“20년 전이면 열 살이죠?”

“어리다. 어려. 열 살이면 아무것도 모르겠네.”

“아무것도 모르긴요. 전 한일 월드컵도 다 기억이 나는데.”

“한일 월드컵 같은 소리 말고 이번에는 성적 낼 수 있게 힘 좀 써봐. 올 해도 광탈이면 우리 목숨도 장담 못 해.”

2008년 캐나다 대회와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 까지만 해도 한국 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설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을 정점으로 대한민국 야구는 계속 내리막을 걷는 중이었다.

2008년 이후 9번의 대회를 거치며 거둔 성적은 은메달 두 개에 동메달 두 개.

우승이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실망스러운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어게인 2008을 외쳤던 지난 2026년 대회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졸전 끝에 2패를 떠안고 슈퍼 라운드에 진출했다가 최종 6위로 끝이 났는데 지금껏 대한민국과 미국, 일본, 캐나다, 쿠바, 호주가 다 해먹었던 걸 감안하면 꼴지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올 해는 잘 해야죠. 지난 대회처럼 식중독 핑계를 댈 수도 없는데.”

“그런데 식중독에 걸리긴 한 거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배탈 난 선수들이 제법 많았나 보더라고요.”

대한 야구 협회는 지난 2026년 대회 실패 원인으로 관리 미숙을 꼽았다.

국제 대회 경기 성적은 당일 컨디션이 좌우하는데 열 명이 넘는 선수들이 크고 작은 장염 증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신성 그룹의 지원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근데 왜 배탈이 난 거야?”

“주는 거 안 먹고 이상한 거 주워 먹어서 그래요.”

“이상한 거?”

“조별리그 성적 개판내고도 슈퍼 라운드 진출했다고 휴식일에 싸돌아다녔나보더라고요.”

“그러다 뭘 잘못 먹은 거야?”

“정말로 신성 호텔 요리에 문제가 있었다면 코칭스태프들까지 전부 다 탈이 났어야죠. 외출한 선수들만 장염에 걸린 거면 걔들 문제 아니에요?”

“이거 올해는 더 빡세게 관리해야겠는데?”

“소용없을 겁니다. 요즘 애들 머리가 얼마나 굵어졌는데요? 외출 통제하는 순간 바로 부모한테 전화할 걸요?”

노영운 대리가 고개를 가로저었고.

송기섭 과장도 답답하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노정우 교수가 들어왔다.

“어이구, 교수님. 어서 오세요.”

“회의실 문이 잠겨 있어서요.”

“회의는 3시부터입니다. 교수님.”

“3시? 1시가 아니라 3시였어요?”

“혹시 13시로 보신 거 아니세요?”

“아이고. 그랬나보네.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요.”

노정우 교수가 자리에 앉자 노영운 대리가 시원한 녹차를 한 잔 내왔다.

“교수님. 여기요.”

“고마워요. 노 대리.”

녹차를 반쯤 들이켠 노정우 교수는 살 것 같다는 얼굴로 숨을 돌렸다. 그리고는 송기섭 과장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송 과장님. 오늘 긴급회의는 뭔가요?”

“말씀 못 들으셨어요? 추가 선수 선발 건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요. 이미 선수들 다 뽑아놨는데 추가 선발할 게 있어요?”

“그야 저도 모르죠.”

“그러지 말고 아는 거 있으면 좀 알려 줘요. 그래야 나도 회의 때 말을 하죠.”

노정우 교수가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송기섭 과장은 물론이고 노영운 대리도 속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운을 떼 놓고 사람 간 보는 게 노정우 교수의 주특기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견을 참고하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노정우 교수는 주변의 말을 여론처럼 호도했고 결국 말을 꺼낸 당사자들에게 불똥이 튀게 만들었다.

“저희는 진짜 모릅니다. 교수님.”

“저희 요즘 대회 준비하느라 정신없습니다. 다른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그래요?”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노정우 교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기룡 교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장 교수님.”

“회의 3시부터라면서요?”

“네. 3시라고 문자 보내드렸는데 못 보셨어요?”

“저기 저 인간이 1시라고 해서 참······.”

장기룡 교수가 노정우 교수를 째려봤다. 그러자 노정우 교수가 뻔뻔스럽게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기왕 일찍 온 거 빨리 와 앉아. 수다나 떨자고.”

“수다는 무슨. 난 생각 없으니까 떠들고 싶으면 혼자 떠들어.”

“그러지 말고 그 녀석 얘기 좀 해봐.”

“그 녀석이라니?”

“자네까지 모르쇠야? 박유성이 말이야, 박유성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데 이 난리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기록 안 봤어?”

“봤으니까 군 말 없이 온 거잖아.”

“하긴. 자네 성격에 낙하산 같았으면 당장 지랄을 했겠지.”

한국 야구 협회 선수 선발 위원회를 구성하는 11명의 위촉 위원 중에 노정우교수는 철저하게 마이웨이였다.

현 대한 야구 협회장인 김영문 협회장은 물론이고 차기 협회장 자리를 노리는 김경진 서울시 야구 협회장과도 거리를 두다 보니 터무니없는 선수를 들이밀었다간 대번에 욕지거리부터 쏟아냈을 것이다.

그런 노정우 교수가 군 말 없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건 박유성이 청소년 국가 대표로 뽑힐 최소한의 자격 조건을 갖췄다는 의미였다.

“내 얘기 하지 말고 자네 의견을 말 해 봐. 박유성을 뽑아야 해?”

“그럼 내가 반대로 물어보지. 박유성을 뽑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뭐야?”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답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국가 대표 선수 뽑는 것도 아니고 청소년 대표야. 다 애들이라고. 그 중에 잘 하면 얼마나 잘 할 것이며 못하면 또 얼마나 못 하겠어?”

“그 논리대로라면 원래 뽑았던 이름값 있는 애들을 뽑는 게 맞을 텐데?”

“그러니까 그 판단의 기준을 나한테 물어보지 말라고. 나는 내 기준이 있는 거고 자네는 자네 기준이 있는 거잖아. 안 그래?”

“흠······. 역시 장 교수는 만만치가 않다니까.”

사적으로는 친구지만.

장기룡 교수는 김영문 협회장 쪽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영문 협회장의 의중을 떠 보려 했던 건데 장기룡 교수가 호락호락당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룡 교수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기 어려웠다.

박유성이 밀어내려는 선수가 다름 아닌 김현중이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