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5화
07. 끝내주는 녀석 (6)
실시간 방송 채팅창으로 편파 중계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자 한윤재 해설 위원은 뒤늦게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신우를 무시한다는 채팅들이 올라왔다.
-어이구. 이거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네요.
-채팅창에 올라오는 것처럼 김신우 선수에게 사과하시겠습니까?
-아뇨.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생각은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한라 고등학교가 강호 북익 고등학교를 잡은 것처럼 오늘 경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신성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박유성 선수가 김신우 선수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낼 수도 있고요.
-실제로 박유성 선수가 올 시즌 때려낸 6개의 홈런 가운데 4개가 1회에 터져 나왔는데요. 김신우 선수도 이 점을 주의해야겠죠?
-김신우 선수뿐만 아니라 광일 고등학교 더그아웃에서도 박유성 선수에 대한 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성적을 떠나 발 빠른 1번 타자가 루상에 내보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한윤재 해설 위원이 채팅창과 싸우는 동안 박유성이 천천히 타석 안으로 들어왔다.
스윽. 스윽.
오른 발로 타석 앞쪽을 쓸고.
탁탁, 땅을 밟아 다진 뒤에 손에 든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 쪽 타석 앞쪽 선을 콕 찍었다.
‘오늘도 완벽해’
예전에는 루틴을 통해 타격 위치를 재조정했지만.
무려 40년간 같은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배트로 거리를 재지 않아도 정확한 타격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망이를 한 바퀴 회전시킨 뒤 어깨에 걸치며 박유성은 마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박유성의 루틴을 본 투수들의 반응은 크게 둘 중 하나였다.
어처구니없어 하거나 애써 무시하거나.
하지만 마운드에 선 김신우는 달랐다.
무표정.
무심한 척 구는 게 아니라 눈곱만큼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부처 녀석. 여전하네.’
타이거즈의 희망.
대한민국 우완 에이스.
리틀 선동연.
우리 신우.
킹신우.
김신우에게 붙은 수많은 별명들 중에 박유성이 생각하는 최고의 별명은 당연히 돌부처였다.
무사 만루의 위기 속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게 꼭 레전드 투수 오승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구 스타일은 오승완보다는 전성기의 선동연을 연상시켰다.
몸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온 뒤에 코앞에서 때려내는 공은 1회차 시절 공포의 대명사였다.
좌타자들은 우투수의 공이 잘 보인다는 말도 김신우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2회차 찍고 3회차였으니 망정이지 어휴······.’
파이터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탓에 2회차 때는 김신우를 만날 일이 많지 않았지만 상대 타율은 나쁘지 않았다.
1회차 시절에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1할 중후반 그 쯤 어디였다면.
그래도 2회차 때는 김신우의 공을 제법 잘 때려내는 선수 축에 들었다.
그런 김신우가 새파랗게 어린 얼굴로 마운드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나는 3회차고.’
불현 듯 박유성은 신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점에 다시 만난 것도 앞선 회차 때 고생을 했으니 이번에는 복수를 하라는 야구의 신의 계시 같았다.
“자. 신우야. 겁먹지 말고 들어 와. 나 아직 고3이야. 너랑 같은 고3이라고.”
박유성은 앞서 만난 안경호처럼 김신우가 안이하게 승부를 걸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경기 전 박유성의 동영상만 수십 번 돌려 본 김신우는 절대 좋은 공을 주지 않았다.
퍼엉!
초구에 바깥 쪽 먼 코스의 빠른 공을 찔러 박유성의 반응을 살핀 뒤에.
따악!
2구 째 몸 쪽 낮은 코스의 슬라이더로 파울을 유도해 냈다.
“스트라이크!”
3구 째 초구와 비슷한 코스로 빠른 공이 들어왔는데 그걸 구심이 잡아주면서 볼카운트가 이상해졌다.
“에이, 선배님. 이건 좀 빠지지 않았나요?”
“들어 왔어. 인마.”
박유성이 가볍게 어필해 봤지만 구심은 꿈쩍하지 않았다.
‘바깥 쪽이 너무 넓은데.’
고교 야구 스트라이크 존이 프로 야구보다 후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방금 전공을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잡아주면 바깥 쪽을 파고드는 백도어 슬라이더에 고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바깥 쪽을 신경 썼더니
퍼엉!
곧바로 몸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이 날아들었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코스가 낮아 망정이었으니 조금만 높았거나 포심 패스트 볼이었다면 3회차 첫 삼진을 먹었을 터.
“좋아. 김신우. 나도 이제 안 봐준다.”
박유성도 단단히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다시 바깥 쪽 낮은 코스로 공이 날아오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가 좌익수 쪽 파울 라인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공을 좌익수 최동진이 잡아내면서 첫 번째 아웃 카운트가 올라갔다.
“저게 안 빠지네.”
내심 파울이 되길 바랐던 박유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렸다.
좌우 파울라인 폭이 좁은 신성 고교야구 전용 경기장이었다면 그대로 그물에 걸렸을 텐데.
목동 야구장은 프로 경기장만큼이나 좌우가 넓어서 어설픈 커트로는 파울 타구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박유성의 방금 전 타격만으로도 광일 고등학교 송경환 감독과 나영훈수석 코치의 눈은 똥그래졌다.
“방금 거 포크 볼 아니었어?”
“맞습니다.”
“저걸 저렇게 친다고?”
“포크 볼이 좀 덜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덜 떨어지더라도 신우 포크볼은 좌타자 바깥쪽으로 흐르잖아. 저걸 건드리려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스윙 궤적을 바꿨다는 게 되는데 이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렇긴 합니다. 그냥 맞추기만 했다면 땅볼이 났을 텐데 저건 타구가 뻗어 나갔으니까요.”
“저 녀석 배트 컨트롤이 보통이 아니야. 신우 들어오면 더 조심하라고 해.”
“넵. 감독님.”
믿었던 공격의 첨병 박유성이 아웃되면서 1회 초 신성 고등학교의 공격은 맥없이 끝났다.
그리고 이어진 1회 말 공격에서
따악!
따악!
2사 이후 박해영과 이윤식의 연속 2루타가 터지면서 광일 고등학교가 여유롭게 선취점을 뽑아 냈다.
“오늘 경기는 신성이 어렵겠는데?”
“상대가 김신우잖아. 박유성도 못 치는데 무슨 수로?”
경기를 지켜보던 기자들은 이대로 광일 고등학교의 페이스로 넘어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신성 고등학교에는 박유성만 있는 게 아니었다.
2회 초.
1사 주자 없는 가운데 타석에 선 홍선우가 몸 쪽으로 살짝 몰려 들어 온 포크볼을 잡아당겨 담장을 넘기는 순간 광일 고등학교 쪽으로 기울던 저울추가 다시 팽팽한 균형을 되찾았다.
“잘했어, 선우야!”
“와, 너 어떻게 쳤냐?”
선수들과 코칭스테프의 칭찬 속에서 홍선우는 가장 먼저 박유성을 찾았다.
“선배님! 사랑합니다!”
“떨어져, 인마. 누구 놀리냐?”
“선배님 말씀대로 똥꼬에 힘 빡 주고 쳤습니다. 그러니까 넘어가던데요?”
홍선우는 자신의 홈런이 박유성의 원 포인트 레슨 덕분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실제 이번 홈런은 정말 얻어 걸린거였다.
타석 전에 홍선우에게 몸 쪽 빠른 공만 노리라고 조언했는데 김신우가 몸 쪽으로 던진 포크볼이 하필 몰려버린 것이다.
무브먼트가 죽은 포크 볼은 치기 좋은 느린 패스트 볼이나 다름 없었고.
그걸 홍선우가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으로 받아 때리면서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따지고 보면 실투를 놓치지 않은 홍선우를 칭찬해야했지만 홍선우는 모든 공과 영광을 박유성에게 돌렸고.
“유성아. 나는?”
“나는 뭐 쳐야 하는데? 응?”
박유성은 한참 동안 시끄러운 녀석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손지원도 피식 웃고 말았다.
1회 초에 박유성이 범타로 물러나고 1회 말에 한 점을 내 줬을 때는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는데.
2학년인 홍선우가 김신우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니까 다시 해볼만하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 유신이만 잘 하는 게 아냐. 태수도, 진욱이도, 선우도 다 잘 해 주고 있어. 그러니까 나도 이 악물고 던져야 해.’
자신감을 되찾은 손지원은 5회 까지 추가 실점 없이 광일 고등학교 타선을 틀어막았다.
매 이닝 안타를 내줬고 볼넷도 2개나 허용했지만
“내가 잡을게!”
외야로 뻗어나가는 안타성 타구는 박유성이 몸을 날려 잡아주었고.
-유격수 이재윤이 공을 잡아 2루로, 2루에서 다시 1루로! 오늘 경기 두 번째 더블 플레이가 나옵니다.
오늘따라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이 기가 막히게 들어가면서 추가 실점을 막아냈다.
이에 질세라 광일 고등학교 김신우도 탈삼진 쇼를 펼쳤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2회 말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시작으로 5회까지 18명의 타자에게 무려 9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과연 김신우라는 찬사가 터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1대 1.
팽팽하게 맞선 6회 초에 박유성이 방망이를 뽑아 들었다.
-신성 고등학교 6회 초 공격은 1번 타자 박유성 선수부터 시작됩니다. 앞선 두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와 중견수 플라이. 0.714였던 대통령배 본선 타율이 0.556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중에서 타격 1위인데요. 신성 고등 학교가 8강에 오르지 못하면 의미가 없겠죠.
-대회 규정 상 정규 타석을 소화해야만 타격 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박유성 선수는 지난 타석까지 10타석 째라서요. 대회 규정인 16타석 이상은 채 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통령배의 바뀐 타격 타이틀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4강에 오른 팀의 선수이거나.
혹은 규정 타석을 채우거나.
결승전 포함 최대 5경기까지 치를 수 있는 대회에서 규정 타석은 반올림을 한 16타석.
팀 전력이 약한 팀의 선수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도 있겠지만 약팀을 상대로한 두 경기 운 좋게 몰아치고 타격왕을 차지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장외타격왕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일단 남은 타석의 승부가 중요합니다. 김신우 선수 컨디션으로 봐서 8회까지도 문제 없어 보이거든요.
-5회까지 김신우 선수의 투구수는 58구. 정말 효율적인 피칭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홍선우 선수에게 허용한 홈런이 없었다면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투포수 사인 교환을 마친 가운데 김신우 선수가 1구를 던집니다. 1구는 바깥쪽! 154km/h의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 존에 찍힙니다.
-오늘 구심이 바깥 쪽 공을 후하게 잡아주고 있거든요? 그래서 양 팀 투수들이 바깥쪽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박유성 선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멀다고 느껴진 것 같은데요.
-원래 타격 능력이 좋은 타자들은 자신만의 스트라이크 존 같은 걸 성정해 놓으니까요. 어느 정도 불만은 이해가 가지만 집중해야죠. 1번 타자로서 지금까지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한윤재 해설 위원의 질책을 들었을까.
후앗!
김신우의 2구가 몸 쪽 낮은 코스를 파고들자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솟구치자 김신우는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고.
휘리리릭!
박유성은 보란 듯이 배트를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