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3화
07. 끝내주는 녀석 (4)
2
현존하는 고교 야구 전국 대회는 총 5개.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 협회장기, 청룡기, 봉황기였다.
이 중 한국 야구 협회에 소속된 모든 학교가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대통령배와 협회장기 뿐이었다.
황금사자기와 청룡기는 주말 리그에서 성적을 낸 학교들만 참가할 수 있고.
드래프트 직전에 열리는 봉황기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에서 16강 안에 든 학교들에게 우선적으로 초대장이 발부된다.
그래서 강호라 불리는 학교들은 보통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모두에게 열린 대회보다는 강호들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더 그럴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대통령배 본선 진출 티켓을 손에 넣은 나승균 감독은 이 대회를 그냥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무조건 8강 가는 거야! 다들 알겠지?”
8강이라는 말에 김석률 수석 코치는 물론이고 박유성까지 헛웃음을 흘렸다.
32강전부터 시작하는 본선에서 8강에 가려면 두 번을 이겨야 한다.
첫 대진이야 운 좋게 강호를 피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전력으로 김동화를 내세워야 하는 16강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32강전에서 강팀이 떨어지는 이변이 일어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소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누가 졌다고?”
“북익이요. 한라고등학교한테 발목 잡혔답니다!”
경기 직전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북익 고등학교는 공주 제일 고등학교와 함께 충청권을 대표하는 팀이었다.
대통령배 3회 우승을 비롯해 전국대회에서 12번이나 우승을 차지했고.
이성군과 한용득, 김태윤 등 수많은 프로 야구 선수들을 배출해 냈으며 지금도 전국 대회 우승권 팀을 꼽을 때 거의 빠지지 않을 만큼 탄탄한 전력을 갖춘 곳이었다.
그런데 그 북익 고등학교가 탈락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북익 고등학교에서 선발을 돌렸나봅니다. 주말에 공주 제일고하고 경기가 있어서요.”
“그래서 2선발을 쓴 거야?”
“2선발이 아니라 2학년 선발을 내세웠답니다.”
“2학년 선발?”
“네. 유영진이라고 그쪽에서는 제 2의 이관우 소리를 듣는 녀석인데 만루 홈런을 얻어맞았답니다.”
유영진은 박유성도 아는 이름이었다.
해마다 전국 대회가 시작되면 지역 언론을 타고 스타성을 갖춘 기대주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유영진도 그 중 하나였다.
186cm의 키에 155km/h에 육박하는 빠른 공은 이관우를 연상케 했지만 실제 프로 시절의 활약상은 미비했다.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말고는 던질 줄 아는 구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구력이라도 좋았다면 불펜에서라도 버텼겠지만 유영진은 제구보다 구속에 집착하는 투수였다.
자신의 빠른 공이 타자의 힘을 이겨냈을 때 희열을 느끼는 스타일이라 이름난 투수 코치를 붙여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2루타 치고 나가니까 다음 타석 때 곧바로 엉덩이를 맞춘 녀석이었으니까.’
오래 상대한 건 아니지만 앞선 회차에서 유영진의 이름은 악연에 가까웠는데 막상 이런 결과가 나니까 다음번에 만나면 적당히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 진짜 8강 가는 겁니까?”
“경기는 해 봐야겠지. 북익도 떨어졌잖아.”
“자, 자. 다음 경기 신경 쓰지 말고 오늘 경기부터 집중하자고. 오늘 지면 16강전도 없어.”
신성 고등학교의 32강 상대는 인천 제일 고등학교.
한때 인천 지역 최강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야구부 해체 위기를 겪으면서 지금은 중위권으로 내려왔다.
물론 지금까지의 전국 대회 성적만 놓고 보자면 인천 제일 고등학교가 한참 앞서고 있지만.
박유성을 앞세운 신성 고등학교는 서울 지역 다크호스로 꼽혔다.
인천 제일 고등학교 고봉열 감독도 선발인 홍진석을 불러다 놓고 신신당부를 했다.
“박유성을 내보내면 안 돼. 무조건 잡아라. 알았지?”
“네. 감독님.”
홍진석의 체격은 평범했다.
아직 더 클 수는 있겠지만 180cm는 기본으로 넘고 간다는 요즘 고교 야구에서 178cm에 71kg의 체격 조건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홍진석을 처음 보면 다들 만만하게 여기고 달려들지만.
고교 수준을 상회하는 제구력과 묵직한 포심 패스트 볼 맛을 보면 다들 혀를 내두르기 바빴다.
오죽하면 이글스에서도 홍진석을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머리를 쓰는 중이었다.
펑! 퍼엉!
포수 임정욱의 미트 속에 연습구를 꽂아 넣던 홍진석은 구석에 모여 자신을 바라보는 신성 고등학교 타자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맘껏 까불어라. 나중에 타석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홍진석은 신성 고등학교 타자들도 자신을 만만하게 여긴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봤지? 가볍게 던지는데 묵직하게 깔려서 들어오는 거. 홍진석이 공은 끝까지 뻗어 오는 스타일이야. 게다가 제구도 좋아서 정타를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태수 너는 좋은 공이 들어오면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쳐. 볼카운트 신경쓰지 말고 힘껏 휘두르라고.”
“내가 또 그런 건 전문이지.”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진욱이 너는 최대한 까다롭게 승부해야지. 넌 2번이잖아.”
“너처럼 커트 커트 하라고?”
“그러다 삼진 당하지 말고. 나쁜 공은 걸러. 넌 할 수 있어.”
“선배님. 저는요?”
“선우 너는 자신있어하는 몸 쪽 공 기다려.”
“몸 쪽 공을 줄까요?”
“줄 거야. 네 앞에 누구냐?”
“병욱 선배님이요?”
“그래. 병욱이가 시원하게 삼진을 당해 줄 거니까 넌 침착하게 노림수를 가져가.”
“유성아. 설마 네가 말하는 병욱이가 날 말하는 건 아니지?”
“뭐야, 병욱이 너 듣고 있었어?”
“설마 내가 있는 줄도 몰랐던 거야?”
“존재감이 없어서 미안.”
“크흐흐. 존재감이 없대.”
“유성아. 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야 인마,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냐?”
“두고 봐, 유성아. 나 오늘 일 낸다. 진짜 낼 거야.”
“제발 좀 내라. 네 홈런 구경한지 백만 년이야.”
프로시절 홍진석을 자주 상대한 건 아니지만.
박유성에게는 프로 40년차 데이터가 있었다.
홍진석처럼 제구가 좋고 묵직한 공을 던지는 투수들을 공략하는 법은 간단했다.
유인구에 속지 않고 눈 크게 뜨고 잘 보고 때리면 되는 것이다.
뻔한 팁을 선수들마다 다르게 일러준 건 타자마다 스타일이 달라서였다.
기본적으로 선구 능력이 좋은 장태수는 초구부터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둘러도 상관없지만진루타에 집착하는 오진욱은 공을 쫓아다니는 편이라 조금 더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장태수와 김병욱 뒤에서 타점을 쓸어 담고 있는 2학년 홍선우는 당장의 성적보다 앞으로의 성장을 위해 경험을 쌓아야 할 때.
‘병욱이야 애당초 기대감이 없지만······.’
은근 자존심이 센 김병욱을 긁어 놓았으니 오늘 경기에서만큼은 발톱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차로 다른 선수들에게도 홍진석의 공략법을 설파한 뒤 박유성은 검은 색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섰다.
“야, 너 방망이 멋지다? 얼마 주고 산거야? 30장? 50장? 근데 그거 부정 배트는 아니지?”
평소처럼 오른 발을 내딛은 뒤에 방망이를 쭉 뻗어 타격 위치를 잡으려는데 포수 임정욱이 능청스럽게 말을 걸었다.
‘루틴을 방해해 보시겠다?’
솔직히 지금의 루틴은 40년 간 익숙해진 스트레칭 같은 거라서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었지만.
박유성은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을 굳혔고.
‘역시. 코치님 말씀이 맞았어.’
임정욱은 박유성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착각했다.
‘조금 더 몰아 붙여볼까?’
신이 난 임정욱은 초구에 몸 쪽으로 붙는 공을 주문했다.
이번 타석에서 박유성을 혼쭐 내 놓는다면 신성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달리는 야구도 무너질 거라 여겼다.
홍진석도 길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퍼엉!
박유성의 몸 쪽 깊숙이 빠른 공을 찔러 넣었다.
‘이 녀석들. 귀엽게 노네.’
다른 또래의 선수 같았다면 신경이 곤두섰겠지만 박유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 40년 간 이런 식의 견제와 도발을 숱하게 당하다보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홍진석은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2구를 몸 쪽 정직하게 찔러 넣었고.
따악!
박유성은 그 공을 놓치지 않고 잡아당겼다.
“잡았다!”
높이 솟구친 타구를 보며 홍진석이 씩 웃었다.
얻어맞긴 했지만 중심 타자도 아니고 1번 타자인 만큼 결국 중견수 플라이로 끝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타구는 마지막까지 쭉쭉 뻗어 나가더니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타구는 오늘 경기의 결승타로 기록됐다.
3
“김 코치.”
“네. 감독님.”
“어때? 우리 이만하면 강해진 거 같지 않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전광판을 바라보며 나승균 감독이 웃었다.
신 성 3 2 3┃2 2 0┃0 0 0┃ 12 16 06
인천제일 0 1 0┃0 1 0┃0 0 0┃ 02 04 01
인천 제일 고등학교를 상대로 이기기만 해도 만족이었는데.
무려 장단 16안타를 몰아친 끝에 12대 2, 5회 콜드 게임 승리를 따냈다.
“네. 강해진 거 맞습니다.”
김석률 수석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 대회 우승을 노릴 만큼 강해진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던 지난 2년보다는 확실히 나은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아까 고 감독님하고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 그거? 고 감독이 반칙 아니냐고 그러더라고.”
“반칙이요?”
“유성이 작년까지 별 볼일 없었잖아. 고 감독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라긴. 애가 좀 천둥벌거숭이 같았는데 우리 김 코치가 사람 만든 거라고 했지.”
“정말이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가던데? 암튼 김 코치가 있어서 든든해.”
박유성이 활약하기 전까지 신성 고등학교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장태수도 나승균 감독도 누군지도 모를 졸업생들도 아니었다.
바로 김석률 수석 코치.
커리어도 커리어지만 자비로 일본과 미국 연수를 다녀 온 것으로도 모자라 프로 야구 구단들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아마추어 야구부터 시작한 그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성이가 들으면 비웃을 겁니다.”
“비웃긴. 김 코치가 유성이한테 신경 많이 쓴 건 사실이잖아.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유성이가 하루아침에 저렇게 됐겠어? 도핑 검사 결과도 깨끗하다며?”
“네. 지난 플레이오프 경기 끝나고 검사 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나왔습니다.”
“도핑이 아니면 잠재력이 터진 거겠지. 그리고 그 잠재력을 키운 건 김 코치, 자네고.”
“······.”
“그냥 그렇다고 해. 나도 유성이 저 놈 볼 때마다 외계인처럼 느껴지니까.”
나승균 감독이 너스레를 떨었다.
야구부 운영에 관한 전권을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위임했다고 해서 야구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 결코 아니었다.
가르치는 방식이 올드해서 직접 나서지 않을 뿐.
후학 양성에 대한 열정만큼은 김석률 수석 코치 못지않았다.
“유성이 녀석, 몇 라운드에 뽑힐까?”
“아직 드래프트까지 많이 남았습니다. 감독님.”
“알아. 아는데 태수보다는 먼저 뽑힐 거 같지 않아?”
“지금 실력대로라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스타즈에서 우선 지명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는 안 하겠지?”
“네. 지난 일도 있고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