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1화
07. 끝내주는 녀석 (2)
연거푸 6개의 파울을 때려 낼 땐 그냥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9구 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홈런을 때려 낼 줄이야.
‘이제 다 구분할 수 있어.’
매니저가 만들어 온 전략 분석 자료에 따르면 안경호가 구사하는 구종은 총 5개.
포심 패스트 볼과 커터,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였다.
그 중 좌타자를 상대로 주로 던지는 공은 포심 패스트볼과 커터, 슬라이더.
커브도 간간히 던지긴 하지만 그건 서두르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고.
포심 패스트 볼과 커터, 슬라이더의 릴리즈 포인트 차이만 확인하면 안경호의 공략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안타를 치고 나가 잔뜩 괴롭혀주고 싶었지만.
‘진정해. 박유성.’
오늘따라 넓게 느껴지는 구심의 스트라이크 존과 상당히 좋아 보이는 안경호의 컨디션을 감안했을 때 커트 신공이 필요해 보였다.
‘지원이 부담을 덜어주려면 무조건 다득점을 해야 해.’
주말 리그와 배대 고등학교와의 대통령배 서울 예선 24강전까지 4연승 행진을 달리던 손지원의 페이스는 충열 고등학교를 만나면서 꺾였다.
손지원이 못했다기보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패배한 거지만.
자신 때문에 플레이오프까지 밀렸다는 자책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초반 분위기가 청송 고등학교 쪽으로 넘어간다면 손지원도 자신 있게 공을 던지지 못할 터.
“경호야. 오늘 고생 좀 하자.”
박유성은 평소보다 손바닥 반 뼘 정도 짧게 방망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따악!
몸 쪽을 빠르게 파고드는 공을 가볍게 걷어냈다.
“저 녀석. 전혀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데?”
“경호 공이 쉽지 않을 겁니다. 괜히 랜더스에서 탐내는 게 아니니까요.”
박유성이 3구에 이어 4구 파울을 만들 때만 해도 한태열 감독과 김응환 수석 코치는 웃었다.
초구와 2구를 놓치고 삼진에 당할 위기에 몰리니까 부랴부랴 공을 쫓아다닌다고 여겼다.
하지만 5구, 6구, 7구, 8구까지.
따악!
박유성이 아슬아슬하게 공을 걷어내니까 한태열 감독도 짜증이 났다.
“저 새끼 뭐야?”
“왠지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요?”
“하,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못 된 것만 처배워가지고.”
“실력으로 안 될 거 같으니까 별 짓을 다 하네요.”
다시 새 공을 전해 받은 안경호도 부글부글 끓었다.
“왜 계속 파울을 치고 지랄이야? 뭘 얼마나 좋은 공을 줘야 해?”
4구까지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했던 안경호는 5구 째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6구 째는 잘 안 던지는 몸 쪽 커브.
다시 7구 째 몸 쪽 높은 코스의 커터를 던졌는데 그것도 파울이 났고.
여기서 더 승부를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서 8구째는 바깥 쪽으로 빠른 공을 찔러 넣었는데 그것까지 걷어냈다.
마운드 뒤로 내려가 로진백을 힘껏 움켜쥔 안경호는 타석 뒤쪽의 볼카운트 상황판을 봤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분명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볼 카운트인데 꼭 만루 상황에서 쓰리 볼노 스트라이크로 몰린 기분이었다.
“후우. 침착하자.”
애써 마음을 다잡은 안경호가 다시 마운드 위에 올랐다.
그러자 포수 강해승이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체인지업?’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안경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좌타자를 상대로 체인지업은 자신이 없었지만.
포심 패스트볼부터 시작해 커브와 커터, 슬라이더까지 전부 커트를 당했으니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박유성도 슬슬 커트 놀이를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구종 별 릴리즈 포인트는 확실히 파악했어. 병욱이는 힘들겠지만 눈썰미 좋은 태수나 진욱이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타격적인 재능이 좋은 선수들은 최대한 전진배치를 시켰다.
자신의 활약에 가려져 있지만 2번 타자 오진욱은 이번 시즌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 중이고.
장태수도 5개의 홈런을 포함해 1,2회차 때 보다 나은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말이라면 똥도 된장이라고 믿을 2학년 홍선우까지 힘을 보탠다면 안경호를 일찍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이제 나가 보실까?”
다시 평소처럼 방망이를 고쳐 잡은 뒤 박유성은 간결한 타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장타를 욕심냈다가 야수 정면에 가 버리거나 하면 안경호의 기분만 좋아질 터.
나중에 같은 팀에서 만나더라도 손절당할 만큼 몰아붙였으니 어떻게든 루상에 나가야 했다.
‘슬라이더? 커터? 아니야. 낮은 코스의 포심. 그래. 그거야.’
8구까지의 구종과 코스를 복기하며 박유성은 몸 쪽 낮은 공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해승은 박유성의 무릎 옆쪽으로 미트를 붙였고.
안경호도 이를 악물고 공을 내던졌다.
후앗!
비산하는 로진 가루를 뚫고 새하얀 공이 튕겨져 나가는 순간.
경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박유성에게 향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돌렸고.
홈플레이트 앞쪽까지 빠져 나온 시커먼 방망이는.
따악!
그대로 새하얀 공을 집어 삼켜버렸다.
“······!”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머리 뒤로 사라지자 안경호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하늘 높이 치솟은 타구는 그대로 전광판을 향해 뻗어 나갔고.
툭!
전광판 상단을 때린 뒤에 그라운드 안으로 떨어졌다.
“어이구. 얻어 걸렸네.”
설마하니 이 타이밍에 체인지업을 던질 줄 몰랐던 박유성은 씩 웃으며 그라운드를 돌았다.
1루 베이스를 지나 2루로. 다시 3루를 밟고 홈으로.
“크아아아아!”
“이 미친놈아!”
박유성의 선두 타자 홈런에 신성 고등학교 더그아웃은 자지러졌고.
청송 고등학교 선수들은 끝내기 홈런이라도 맞은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와우.”
한 쪽 구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랜더스의 스카우트 황인석 과장도 혀를 내둘렀다.
연거푸 6개의 파울을 때려 낼 땐 그냥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9구 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홈런을 때려 낼 줄이야.
“노리고 친 건가?”
황인석 과장이 옆에 앉은 이명진 대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명진 대리가 가볍게 웃었다.
“에이. 얻어 걸린 거죠.”
“그렇지? 저 타이밍에 체인지업을 노리지는 않았겠지?”
“그건 프로 선수들도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프로 야구에도 상성을 무시하고 좌투수의 공을 잘 치는 좌타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다른 좌타자들에 비해 잘 치는 거지 좌투수를 상대로 압도적인 타격감을 뽐내는 좌타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프로 야구에서 좌완 투수의 비율은 20퍼센트 남짓.
그마저도 선발로 뛰는 선수는 더 적다 보니 좌투수의 공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각설하고 좌투수를 잘 공략한다는 좌타자들을 방금 전 타석에 대입시킨다 해도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몸 쪽 낮게 떨어지는 유인구를 노려 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할 거 같은데?”
“담이 큰 선수들은 일단 지켜볼 테고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걷어내려 들겠죠.
볼카운트가 몰렸는데 빠른 공과 커터를 주로 던지는 투수를 상대로 체인지업을 노리는 건 미친 짓이잖아요.”
“어이구. 제법인데? 이 대리 말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가져가면서 실투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긴 하지.”
“무엇보다 고교 야구에서 노리고 치는 게 가능할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타구가 정확하게 센터 쪽으로 뻗었어.”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센터 쪽이면 잘 맞은 거잖아요?”
“구종까지는 몰라도 몸 쪽 낮은 공은 노리고 친 거 같은데······ 이거 헷갈리 네.”
보통 얻어 걸리는 홈런은 잡아당기는 스윙에 공이 와서 맞아주는 경우가 대부 분이었다.
그렇게 되면 좌타자 기준으로 타구가 우익수 방면으로 뻗기 마련인데 박유성의 방금 전 타구는 그라운드를 좌우로 정확하게 가르며 센터 정중앙으로 날아갔다.
이게 가능하려면 히팅 포인트가 완벽해야 하고 중심 이동과 팔로우 스윙까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그건 프로 레벨의 선수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 녀석. 경호는 처음이지?”
“네. 처음입니다. 경호가 신성 고등학교를 상대한 적이 없어요.”
“진짜 뭐지?”
“그냥 얻어 걸린 걸로 하시죠. 우리 지금 경호 보러 왔습니다. 과장님.”
이명진 대리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평소 안경호를 우선 지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온 터라 황인석 과장의 관심이 다른 선수에게 가는 게 못마땅했다.
게다가 랜더스에는 박유성의 자리가 없었다.
즉시 전력감으로 대학 졸업 선수들을 선호하는 프로 야구 추세에 맞춰 랜더스도 외야 유망주들을 많이 뽑아 놓은 상태였다.
‘장태수라면 또 모를까 무슨 박유성이야.’
이명진 대리의 잔소리에 황인석 과장도 다시 안경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유성에게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았으니 평정심을 되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안경호는 오진욱과 장태수, 김병욱을 깔끔하게 처리내고 이닝을 끝냈다.
“안경호 투구수가 몇 개지?”
“다 해서 17구입니다.”
“그거밖에 안 던졌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녀석 대단하다니까요?”
“무슨 입만 열면 안경호 칭찬이야?”
“4번 타자를 뜸 들이지 않고 3구 삼진으로 잡아내는 거 보셨잖아요! 안경호는 경기를 풀어나갈 줄 알아요. 올 해 매물 중에 저런 녀석 없습니다.”
1회 투구수 중 박유성을 상대로 던진 9구를 빼면 8구.
고작 공 8개로 세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며 평균 투구수를 낮추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잘 하네. 박유성한테 얻어맞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과장님.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반대?”
“박유성한테 그렇게 당해놓고 끄떡 안 하는 거 보세요. 이 정도면 멘탈갑입니다. 멘탈갑. 메이저리그 식으로 메이크업이 좋은 녀석이에요.”
“듣고 보니 그러네.”
황인석 과장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유성에게 홈런을 내준 상황 자체를 이겨내고 추가 안타 없이 이닝을 마쳤으니 가산점을 줘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황인석 과장의 관심은 또 다시 박유성에게 튀었다.
1회 말.
따악!
1사 2루 상황에서 3번 타자 강민석이 때려 낸 중견수 키를 넘어가는 타구를 박유성이 끝까지 쫓아가 잡아낸 것이다.
박유성의 호수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이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고 3루를 돌아 홈까지 내달렸던 이윤기가 서둘러 귀루하려 들자 2루 베이스를 지키던 2루수 오진욱에게 정확하게 송구 배달을 하면서 마지막 아운 카운트까지 잡아냈다.
“허허. 진짜 저 녀석 뭐지?”
“그러게요. 수비도 제법 하는데요?”
“저건 제법 정도가 아니잖아. 프로에서 저만큼 하는 선수가 몇이나 돼?”
“에이, 잘 하는 건 맞는데 무슨 프로까지 가십니까.”
이명진 대리가 피식 웃었다. 박유성의 수비가 제법 볼만했다는 것 까지는 인정하지만 아직 프로에 견줄 수준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명진 대리보다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을 지켜 봐 왔던 황인석 과장의 생각은 달랐다.
“저 녀석 잘 해. 저기서 살만 조금 더 붙으면 제 2의 송현민이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