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0화
07. 끝내주는 녀석 (1)
1
“어디라고?”
“신성 고등학교입니다.”
“신성 고등학교라. 이거 하늘이 돕는구먼?”
청송 고등학교 한태열 감독이 씩 웃었다.
인천 경기 지역 예선 12강전에서 라이벌인 청라 고등학교에게 패배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번 대통령배 결승은 힘들어보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낸 것으로 모자라 상대가 전국대회 경험이 거의 없는 신성 고등학교라고 하니까 야구의 신이 극적인 진출을 위해 판을 짜 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김응환 수석 코치도 맞장구를 쳤다.
“신성 고등학교가 덕우고와 선인고를 잡았다고 해서 좀 걱정했는데 기우였습니다. 최근에 덕우고가 신성고를 12대 2로 박살냈더라고요.”
“12대 2면 전력 차이가 상당히 난다는 거잖아?”
“게다가 덕우고는 이관우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우린 어떨까?”
“우리가 이관우 없는 덕우고하고 붙는 다면요? 글쎄요. 해 봐야겠지만 지더라도 서너 점 차 이상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친구가? 말이라도 이긴다고 해야지.”
“이길 수야 있죠. 신성고도 덕우고를 한 판 잡았는데 저희라고 못 잡겠습니까?”
대통령배 전국 예선을 시작으로 전국 대회의 막이 열렸지만 아직까지 다른 학교의 전력 파악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주말 리그로 맞붙는 팀들은 데이터가 많은 반면 타지역 팀들은 전국대회에서 만나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청송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지역 학교들의 경기력은 주로 고교야구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경기 결과와 고교 야구를 다루는 일부 언론의 기사를 통해서만 체크했다.
그렇다보니 서울 지역에서 경계 경보가 뜬 박유성에 대해서도 안이하게 대처했다.
“참, 그 녀석 말이야.”
“누구 말씀이십니까?”
“거 왜, 베이스볼 패치에서 빨아주던 녀석.”
“아, 박유성이요?”
“그 녀석이 신성고 아냐?”
“네. 맞습니다.”
“걔는 좀 어때?”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
“그 때 감독님이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시즌 초반에 반짝하는 애들이 한 두명이냐고. 딱 그 꼴 났습니다.”
“드디어 밑천이 드러난 거야?”
“최근 두 경기에서 안타가 하나입니다.”
“아이구야. 완전히 망가졌는데?”
덕우 고등학교 전에서 박유성은 3차례 연속 볼넷으로 출루했다.
최명룡 감독이 박유성과 절대 승부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고.
덕우 고등학교 배터리는 철저하게 그 지시를 따랐다.
충열 고등학교도 덕우 고등학교의 전략을 차용했다.
첫 타석 때 박유성에게 안타와 도루를 내주고 선제 실점을 하자 다음 타석부터 고의4구나 다름 없는 볼넷 작전을 펼쳤다.
덕분에 8번 타석에 들어섰던 박유성의 기록은 1타수 1안타. 볼넷 7개.
경기 기록을 제대로 체크했다면 볼넷 7개에 중점을 뒀겠지만.
눈으로 대충 결과만 훑은 김응환 수석 코치는 박유성이 8타수 1안타라고 착각했다.
“덕우고와 충열고를 만나긴 했지만 멀티 히트를 치던 녀석이 1안타면 타격감이 확 죽었다고 봐야겠죠.”
“내가 말 했잖아. 원래 이맘때 쯤 예상 못한 애들이 하나씩 튀어 나온다고.
하지만 결국은 잘 하는 애들이 잘 할 수밖에 없어. 박유성이 원래부터 잘 했어봐. 신성 고등학교가 작년에 그 꼬라지였겠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도 발이 빨라서 내보내면 골치 아픈 녀석이니까 신경 좀 쓰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호가 있으니까 문제없을 겁니다.”
청송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에이스 안경호는 인천 경기 지역에서도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혔다.
인천 지역에 연고를 둔 랜더스의 우선 지명 후보 3인 중에 안경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기자들도 안경호가 서울 지역 우승권 팀에서 뛰었다면 서울권 팀들 중에서 무조건 우선 지명을 행사했을 거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앞서 청라 고등학교와의 12강전에서도 안경호가 마운드에서 버틸 때 까지는 두 점차 리드를 지켰을 정도.
한 수, 아니 냉정하게 두 수쯤 아래로 보이는 신성 고등학교를 상대로 확실한 1승 카드를 내세울 수 있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해 보였다.
뒤이어 들린 주말 리그 경기 결과도 청송 고등학교를 웃게 했다.
청송 고등학교가 약체 송탄 고등학교와 12강전 패배를 안겨 준 청라 고등학교를 연달아 잡아내면서 한껏 기세를 끌어올린 반면.
신성 고등학교는 성현 고등학교에 역전패를 한 데 이어 선인 고등학교에게 13대 3으로 대패하며 4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이거 오늘 싸움이나 되겠어?”
“저도 왠지 콜드 게임 냄새가 납니다.”
“이 친구가. 말 가려 해. 요즘 기자들 별 것도 아닌 걸로 부풀려서 기사 쓰는거 몰라?”
“그렇습니까?”
“박유성이 있잖아. 박유성이. 초반에 반짝 한 걸로 뭐랬더라? 뭐? 기종버엄?
송현미인?”
“하하. 맞네요. 진짜 요즘 기자들 기사거리 더럽게 없나 봅니다.”
청송 고등학교 더그아웃은 경기 시작 전부터 웃음꽃이 피었고.
그 분위기는 다시 선수들을 타고 퍼져 나갔다.
퍼엉!
“나이스 볼!”
청송 고등학교 선발 안경호도 연습구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을 보러 온 스카우트들을 신경 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저 사람은 아닌가? 어쨌거나 늘어난 거 같은데?”
기자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자리를 잡은 사내들을 보며 안경호가 씩 웃었다.
주말 리그 초반만 하더라도 랜더스 쪽 스카우트만 찾아 왔는데.
요즘 들어 숫자가 늘어난 게 다른 구단에서도 2차 1라운드 지명 선수로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그러게 관우야. 좀 잘 하지 그랬니?”
안경호는 그 이유로 이관우의 부진을 꼽았다.
시즌 초까지만 해도 체격 조건이 좋고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이관우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관우가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니까 자신에게 돌아선 거라고 여겼다.
“얘들아. 미안하다. 내가 미리 사과할게. 오늘 내가 좀 잘 던져야 할 거 같거든? 그러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마라.”
나승균 감독 주변으로 우르르 모인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을 바라보며 안경호가 특유의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이럴 때마다 단짝인 포수 강해승은 애니메이션 좀 그만보라며 짜증을 냈지만.
안경호는 이렇게 설레발을 쳐야 마음이 편해지고 경기가 잘 풀렸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고 신성 고등학교의 1번 타자가 왼쪽 타석에 들어왔다.
“네가 박유성이야?”
제법 요란스럽게 준비 동작을 펼치는 박유성을 보며 안경호가 피식 웃었다.
평소 즐겨 보는 베이스볼 패치에서 너무 극찬을 해서 얼마나 잘하는 녀석일까 기대했는데.
벌써부터 프로 흉내를 내는 걸 보니까 살짝 실망스러워졌다.
“그래도 코치님이 신경 쓰라고 했으니까.”
마운드로 내려가 로진 백을 한 번 주무른 뒤 안경호는 강해승의 사인을 기다렸다.
잠시 1루 쪽 벤치를 바라봤던 강해승은 초구에 몸 쪽 슬라이더를 요구했고.
안경호는 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해승의 미트 속에 정확하게 공을 찔러 넣었다.
“스트라이크!”
옆구리를 맞출 듯 날아들던 공이 마지막 순간에 스트라이크 존을 긁고 지나자 구심은 팔을 들었고.
“와아.”
박유성은 나직한 탄성으로 판정에 대한 아쉬움을 어필했다.
솔직히 프로 야구였다면 볼이었을 텐데.
고교 야구는 몸 쪽 공이 프로 야구보다 후하다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안경호. 뭣같이 던지는 건 여전해.’
안경호는 박유성이 처음이지만.
박유성은 안경호를 잘 알고 있었다.
1회차와 2회차 시절 모두 랜더스는 안경호를 1차 지명했다.
그리고 안경호는 랜더스의 레전드, 김강현 투수 코치의 지도 속에서 더 엿 같은 투수로 진화했다.
파이터즈에서 16년을 뛴 2회차 때는 리그가 달라서 안경호를 몇 번 상대하지 않았지만.
1회차 시절 랜더스와 같은 리그 소속인 스타즈로 이적한 이후에는 안경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쓰리 쿼터 형 좌완 투수인 안경호는 좌타자들에게 언터처블로 통했다.
키킹 후 오른 발을 1루 베이스 쪽으로 비틀어 디디면서 공을 끝까지 숨겨 던지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도 어렵고.
투심에 슬라이더, 커터의 릴리스 포인트가 거의 같다보니 노림수를 갖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스플리터까지 레퍼토리에 추가하는 추잡함을 보였고.
‘너 때문에 까먹은 타율이 얼마인 줄 아냐?’
박유성이 안경호를 매섭게 노려봤다.
기억하기로 안경호 상대 통산 성적은 2할 대 극초반.
5번 상대해서 겨우 한 번 정도 안타를 때려내다 보니 안경호만 만나면 타율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박유성은 아직 김강현을 만나지 못한 안경호에게 제대로 복수를 해 줄 생각이었다.
‘아직 스플리터는 익히기 전이니까 커터를 던지겠지? 코스는 몸 쪽일 테고.’
프로 시절 안경호는 커터를 볼 카운트를 잡는 목적으로 썼다.
볼 카운트가 불리하거나 포심 패스트 볼이 잘 통하지 않을 때 의도적으로 커터를 던졌는데 피칭 터널, 그러니까 공이 절반 쯤 날아오는 순간까지 포심 패스트 볼과 거의 유사한 궤적을 그려서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속으면 안 돼. 너는 3회차고 쟤는 고딩이라고.’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들며 박유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고등학교 선수를 상대로 이렇게 악착같이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초구에 들어 온 엿같은 슬라이더를 보니까 지난 회차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 때 투구판을 박차고 나온 안경호의 손끝으로 공이 튕겨 나왔다.
후앗!
바람 소리와 함께 또 다시 몸 쪽을 파고 든 공은 박유성의 무릎 앞쪽을 지나 강해승의 미트 속에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고.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구심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 팔을 들어 올렸다.
“후우······.”
박유성이 긴 한숨을 내쉬며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나승균 감독이 불안함을 내뱉었다.
“뭐야? 유성이 녀석 왜 저래? 어디 안 좋은 거야?”
오늘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 건 청송 고등학교 한태열 감독만이 아니었다.
나승균 감독도 청라 고등학교가 아니라 청송 고등학교라는 사실에 입가를 찢어 올렸다.
“경기도에서나 좀 쳐주는 거지 서울 왔으면 승리자판기잖아. 아니야?”
김석률 수석 코치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격의 첨병인 박유성이 스윙 한 번 못 해보고 투 스트라이크로 몰렸으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늘 컨디션은 좋아 보였습니다.”
애써 담담하게 답한 김석률 수석 코치의 시선도 박유성을 향했다.
평소 박유성은 지나쳐 보일 만큼 공격적이었다.
스트라이크 존에 적당히 들어왔다 싶으면 여지없었고.
초구를 때리고 나간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관우를 비롯해 서울 지역 내 이름난 투수들을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주눅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었는데.
‘뭐가 안 맞는 건가?’
김석률 수석 코치가 타임을 부르고 박유성의 상태를 살펴야 하나 고민하던 그 때.
박유성의 입가가 슬쩍 삐쳐 올라왔다.
“하아. 저 녀석. 사람 놀래기는.”
김석률 수석 코치의 입에서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안경호의 공이 까다롭긴 해도 박유성이 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여겼는데 역시나였다.
박유성은 답을 알고 있었다.
타석에 선 박유성도 2구 째 들어 온 커터를 보며 확신했다.
‘달라.’
프로 시절에 비해 피칭이 투박할 거라 예상은 했는데 초구 슬라이더와 2구 째커터의 릴리즈 포인트가 완전히 달랐다.
눈썰미 좋은 타자라면 어렵지 않게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