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8화
06. 박유성이 누구야? (6)
“이대로 아웃 카운트를 까먹으면 점수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할래?”
그런 나영진 기자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일까.
나해준이 투구판을 박차기가 무섭게
타다다닥!
박유성이 스킵 동작 없이 곧바로 2루 베이스로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번트를 댈 것처럼 굴었던 오진욱도 방망이를 빼 버렸다.
“2루!”
공을 잡은 박명수가 다급히 2루 송구를 하려고 했지만.
박유성보다 유격수 이진호의 커버가 늦어서 차마 공을 던질 수가 없었다.
“좋아, 좋아!”
잠시 숨을 참고 상황을 지켜봤던 나승균 감독이 보란 듯이 손뼉을 쳤고.
“완전히 당했군.”
선인 고등학교 장태우 감독은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기자석도 소란스러워졌다.
“신성 대단한데? 단독 도루를 주문한 거야?”
“타자가 번트를 대려고 했으니까 단독 도루는 아니겠지.”
“작전이 나온 거라고 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 솔직히 선인을 상대로 저런 대담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학교가 몇 개나 돼?”
“선인이니까 나온 작전 아닐까? 솔직히 희생 번트로 2루를 보내면 득점한다는 장담이 없잖아.”
“하긴. 김병욱이는 정확도가 너무 떨어지니까.”
박유성의 도루가 신성 고등학교 벤치의 작전이었을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해요?”
“뭐가?”
“도루요. 벤치 지시였을까요?”
“그러는 네 생각은 어떤데?”
나영진 기자가 공윤경 기자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공윤경 기자가 건방지게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노놉.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봐요.”
“벤치 작전이 아니라 단독 도루다?”
“작전이었다면 저렇게 대놓고 뛰기 어렵지 않아요? 그러다 피치아웃이 나오면 어쩌려고요?”
“오오, 공윤경이 많이 컸는데?”
“저 원래 좀 크거든요?”
“뜬금없는 타이밍에 헛소리 좀 하지 마라. 정 떨어진다.”
“크흠. 암튼 선배도 같은 의견인 거죠?”
“조금 덧붙이자면 저건 박유성의 도루를 팀에서 서포트 해 준 느낌이야.”
“서포트요?”
“신성도 아는 거지. 박유성이 루상에 나가서 흔들어줘야 점수 내기가 쉽다는 걸.”
나영진 기자는 박유성의 질주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 예상대로 나해준의 손 끝에서 2구가 빠져 나가자.
타다다다닥!
박유성이 미친 듯이 3루를 향해 내달렸다.
“3루! 3루!”
1루수 조영진의 다급성을 들은 박명수는 다급히 3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타석에는 오진욱이 멀뚱히 서 있었고.
그런 오진욱을 피해 공을 던지려 했을 때는 이미 박유성이 레그 벤트 슬라이 딩으로 3루 베이스에 안착한 상태였다.
“크으, 좋아좋아!”
마치 전성기 시절 기종범처럼 3루 베이스를 훔쳐 낸 박유성을 향해 나승균 감독은 물개박수를 쏟아냈다.
김석률 수석 코치가 박유성을 자유롭게 풀어놓자고 했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덕우 고등학교에 이어 선인 고등학교까지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걸 보니까 김석률 수석 코치를 믿고 맡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선인 고등학교 장태우 감독은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신성은 저걸 노렸던 거야?”
박유성이 단독 도루를 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1루 베이스 쪽에 붙어 있었던 것도.
오진욱이 뻔뻔스럽게 번트 자세를 취했던 것도 모두 다 3루 도루를 위한 큰 그림이었다고 생각하니까 헛웃음만 났다.
김남훈 수석 코치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박유성의 발이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희생번트 없이 자력으로 3루를 훔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수석 코치씩이나 되어서 장태우 감독처럼 상대의 플레이에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감독님. 저 점수는 주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 줄 점수는 주자고. 그게 속 편할 거 같으니까.”
감남훈 수석 코치는 박명수에게 번트를 대 주라고 지시했다.
신성 고등학교에서 박유성을 무리하게 3루까지 보낸 건 스퀴즈 번트 작전을 쓰기 위해서일 거라고 넘겨짚은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박유성에게 시달리게 된 나해준은 공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따악!
오진욱이 한복판으로 몰린 공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박유성을 여유롭게 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어진 무사 2루 찬스에서
따악!
장태수가 다시 한 번 몰려 들어온 나해준의 빠른 공을 잡아당겨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4
서울 지구 1위 팀과 2위 팀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선인 고등학교와 신성고등학교의 경기는 신성 고등학교의 7대 5 승리로 끝이 났다.
신성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 제 2경기장에서 펼쳐진 오늘 경기에서 양 팀은 2선발인 나해준(3학년)과 김동화(3학년)를 각각 선발로 내세웠다.
선발 투수의 무게감만 놓고 봤을 때 선인 고등학교의 우세가 점쳐졌다.
2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 경험을 쌓은 나해준은 2경기에 선발 출전해 2승에 평균자책점 1.50을 기록한 반면 김동화는 1승 1패에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 중이었기 때문이다.
타선의 중량감도 선인 고등학교가 앞섰다.
이동엽과 조영진, 강정욱으로 이어지는 선인 고등학교 3학년 클린업 트리오는 지난 5경기에서 10홈런 21타점을 합작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보여준 반면 신성 고등학교는 3번 타자 장태수 홀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경기를 이끈 건 선발진도 클린업도 아니었다.
볼넷 1개를 포함해 3타수 3안타에 1타점 4득점.
그리고 도루 4개.
빠른 발로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팀의 득점 중 57퍼센트를 책임진 박유성의 활약이 없었다면 오늘 신성 고등학교의 승리는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유성은 1회 초 나해준의 초구를 밀어 쳐 선제 3루타를 때려내며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3회 초에는 볼넷으로 출루해 2루와 3루를 연거푸 훔치며 추가득점의 발판을 마련했고 2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5회 초에는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때려내며 타점까지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8회 초 네 번째 타석은 오늘 경기의 백미였다.
6회 말 폭발한 클린업 트리오에 힘입어 선인 고등학교가 5대 4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추가 득점이 절실했지만 5회 박유성의 1타점 적시타 이후 신성 고등학교의 공격은 멈춘 상태였다.
이닝의 선두 타자로 나온 이재윤이 삼진을 당하면서 경기의 저울추가 균형을 맞추려던 찰라 박유성의 타격쇼가 펼쳐졌다.
파울. 파울. 볼. 파울. 파울. 볼. 파울. 볼. 파울. 그리고 2루타.
구원 등판한 선인 고등학교 이민철은 타격감이 좋은 박유성에게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박유성은 끈질기게 커트를 해내며 공을 기다렸고 10구째 몰리듯 들어온 슬라이더를 잡아당기며 2루타를 때려냈다.
이후 다시 한 번 3루 도루에 성공한 박유성은 오진욱의 땅볼 때 홈을 밟으며 4번째 득점을 올렸고 9회에 신성 고등학교의 홍선우와 선인 고등학교 이동엽이 솔로 홈런을 주고받은 끝에 7대 5의 스코어가 만들어졌다.
오늘 경기의 MVP는 누가 뭐래도 박유성이었다.
보통 결승타를 친 타자나 호투를 펼친 승리 투수를 MVP로 뽑는 현장의 기자들도 박유성의 활약 앞에서는 감히 이견을 펼칠 수가 없었다.
패장이 된 선인 고등학교 장태우 감독은 박유성을 레인저스에 진출한 송현민처럼 대성할 선수라고 극찬했다.
“내가 처음 선인 고등학교 지휘봉을 잡았을 때 현민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처음에 2학년을 선두 타자로 배치한 걸 보며 코웃음을 쳤거든요? 그런데 그 경기에서 현민이가 말 그대로 날아다녔습니다. 안타치고 홈런도 치고 도루도 하고. 그 때 워낙에 충격을 받아서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해요. 그런데 오늘 꼭 그 경기가 떠올랐습니다.”
장태우 감독은 박유성이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해 정체됐던 국가대표팀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주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본 기자도 장태우 감독의 바람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2년 전 캐나다에서 열렸던 U-18 야구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슈퍼 라운드 전패를 기록하며 4강에서 밀려났다.
선발진을 비롯해 장타력을 갖춘 타선과 신성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한 점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지난 대회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대표팀에는 박유성 같은 선수가 꼭 필요하다.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것처럼 박유성은 승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타자다.
본 기자는 박유성이 대표팀의 공격력에 활기를 불러 일으켜 줄 적임자라고 확신한다.
아울러 송현민 이후 대가 끊기다시피 한 호타준족 형 타자로 계속 승승장구해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 기자
5
“자, 자! 마음껏 먹어라!”
덕우 고등학교에 이어 선인 고등학교까지 잡아내서일까.
나승균 감독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14라운드까지 진행되는 주말 리그 전반기 일정에서 벌써 5승째를 거뒀다.
그 중 2승은 약체로 꼽히는 서울 중앙 고등학교와 서울 상업 고등학교를 상대로 거둔 거지만.
절대 이기지 못할 줄 알았던 덕우 고등학교와 선인 고등학교를 한 번씩 잡아냈으니 4강 진출은 무난할 것 같았다.
다른 코치들도 주말 리그 전반기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 진출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작년에 턱걸이가 몇 승이었죠?”
“보통 9승에서 10승은해야 하는데 우린 덕우하고 선인이 있잖아.”
“덕우하고 선인이 다른 팀들을 잡아준다면 커트라인이 낮아지겠죠?”
“일단 8승만 하면 안정권이라고 봐.”
“8승이라. 이제 3승 남았네요.”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서울중과 서울상 경기가 남아 있지. 흐흐흐.”
팀당 2연전으로 치러지는 주말 리그 일정 상 최약체 팀과의 경기가 남아 있다는 건 든든한 보험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우명 고등학교와 성현 고등학교, 세명 고등학교는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인 만큼 3승을 추가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구석 자리에 앉은 김석률 수석 코치의 표정은 생각만큼 밝지 않았다.
“코치님. 식사 안 하세요?”
“응? 나는 괜찮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라.”
“그러지 말고 좀 드세요. 코치님이 안 드시니까 분위기 이상하잖아요.”
“분위기?”
박유성의 잔소리에 김석률 수석 코치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주변의 말소리들이 줄어들어 있었다.
“어이구. 이 녀석들. 왜 내 눈치를 보고 그래?”
“동화는 젓가락도 내려 놨어요.”
“동화가?”
김석률 수석 코치가 눈을 돌려 김동화를 찾았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먹성 좋은 김동화가 구석에서 물만 마시고 있었다.
“동화야! 잠깐 이리 와.”
자신의 무심함을 반성하며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의 빈 옆 자리로 김동화를 불렀다.
그러자 김동화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다가왔다.
“네. 코치님.”
“왜 안 먹고 있어?”
“네? 아, 그게······.”
“이 녀석아. 오늘 잘 했는데 많이 먹어야지.”
“아닙니다. 더 잘 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