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7화
06. 박유성이 누구야? (5)
나해준의 키는 181cm.
발육이 좋은 요즘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작은 키라 프로 입시에 불리했다.
하지만 정작 12개 구단 스카우트들은 나해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체격을 떠나서 공을 던지는 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해준은 원래 영리한 투수야. 어떻게 하면 타자들이 휘둘리는지 아는 녀석이라고. 그런데 봐. 유성이 때문에 자신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잖아.”
“무사 1,3루라 한 점은 줘야 하는데 유성이 무시하고 장태수에 집중했으면 되지 않아요?”
“그게 가능하면 아마추어겠냐? 그리고 그런 건 프로 10년차쯤은 되어야 가능한 거야.”
“그런가?”
공윤경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구 기자 생활 4년차이다 보니 고작 주자 하나 때문에 나해준의 멘탈이 무너졌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석에서 보는 것과 실제 마운드에서 느끼는 건 차이가 컸다.
공윤경 기자의 눈에는 박유성이 조금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정도로만 보였겠지만.
“하아. X발.”
나해준은 3루 베이스에 박유성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4번 타자 김병욱은 공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스트라이크, 아웃!”
4구 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속아 삼진을 먹고 말았다.
“어이구. 저 놈 진짜.”
나승균 감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은 김병욱이 시원시원하게 한 방 때려주길 바랐건만.
공 한 번 맞추지 못하고 아웃 카운트만 까먹었으니 그저 한숨만 났다.
하지만 배성일 배터리 코치와 이민우 투수 코치는 김병욱의 삼진을 반겼다.
“나이스, 김병욱. 혼자 죽었어.”
“그러게요. 괜히 땅볼 건드렸다가 병살 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런데 나해준이 공이 갑자기 좋아진 거 같지 않아?”
“배 코치님도 느끼셨어요?”
“이 친구가? 내가 포수 경력이 얼마인데 그걸 몰라? 공 빠지는 소리만 들어도 아는데.”
“에이, 그건 너무 가셨다. 공 던지는 소리가 구분이 가능해요?”
“이 코치야말로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나 불펜 포수까지 하다가 은퇴했어. 이거 왜 이래?”
힘이 좋은 4번 타자 김병욱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킨 나해준은 5번 타자로 올라온 홍선우와 6번 타자 김 산을 중견수 플라이와 2루수 앞 땅볼로 유도하고 이닝을 마쳤다.
홍선우와 김 산 모두 장타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리한 코스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나해준의 돌직구를 이겨내지 못했다.
생각보다 길었던 1회 초 공격이 끝이 나자 장태우 감독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 점 주고 시작할걸 그랬어.”
만약 오진욱 타석 때 번트를 줬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최소한 6번 타자까지 타석에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남훈 수석 코치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감독님. 쉽게 점수를 주는 버릇 하면 긴장감이 풀어집니다. 해준 이도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까 문제없을 겁니다.”
비록 한 점을 내주긴 했지만.
아직 선인 고등학교는 9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신성 고등학교의 선발 투수는 에이스 손지원이 아니라 2선발 김동화였다.
오늘 경기를 잡을 의지가 있었다면 어제 손지원이 아니라 김동화를 등판시켰겠지만.
신성 고등학교는 확실한 1승을 위해 서울 상업 고등학교 전에 손지원을 내세웠고.
오늘은 결점 투성이인 김동화에게 기적 같은 호투를 바라는 중이었다.
‘이런 팀을 상대로 지는 건 말이 안 돼.’
김남훈 수석 코치는 타자들이 어렵지 않게 동점을 만들어 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늘의 김동화는 평소의 김동화가 아니었다.
“스트라이크!”
선두타자 조일우(좌타자)의 몸 쪽을 예리하게 파고든 슬라이더에 구심의 손이 들린 그 순간 박유성은 씩 웃었다.
“오늘 날이네.”
김동화도 10퍼센트의 확률로 긁히는 날이 있는데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 예상대로 김동화는 1회를 안타 하나만 내주고 깔끔하게 틀어막았다.
선두 타자 조일우는 2루수 앞 땅볼로 잡아내고.
2번 타자 김우현을 중견수 플라이로 유도한 뒤 4번 타자 조영진을 유격수 앞 땅볼로 처리했다.
중간에 3번 타자 이동엽에게 중앙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 성 장타를 얻어맞긴 했지만 그건 박유성이 완벽한 타구 판단과 송구를 통해 단타로 만들어버렸다.
“유성아. 나이스 플레이.”
“방금 나 하는 거 봤지? 내가 최대한 커버 할 테니까 자신 있게 던져.”
“알았어. 너만 믿는다.”
2회 공방은 양 팀 모두 삼자 범퇴로 끝이 났다.
쉬는 동안 김남훈 수석 코치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들은 나해준은 7번 타자 김경준과 8번 타자 이현재, 9번 타자 이재윤을 전부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김동화도 5번 타자 강정욱과 6번 타자 김영민을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한 뒤에 7번 타자 이진호에게 오늘 경기 첫 삼진을 빼앗아냈다.
“뭐야? 경기가 왜 이렇게 팽팽해?”
“그러게. 쟤들 신성 맞아? 덕우고 아냐?”
“덕우는 어제 발렸는데 무슨 덕우고 타령이야?”
“과연 다시 붙으면 덕우가 질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기자들이 덕우 고등학교를 운운할 만큼 신성 고등학교의 초반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끝까지 유지될 거라고 보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쯤 점수가 날까?”
“빠르면 다음 이닝?”
“한 타순 돌면 선인고 타자들도 감 잡겠지?”
“이관우도 털었는데 김동화가 버티겠어?”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공윤경 기자가 나영진 기자의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뭐? 왜?”
“선배 의견은요?”
“무슨 의견?”
“다음 이닝에 점수가 날 거 같아요?”
“글쎄. 다음 이닝보다 이번 이닝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영진 기자의 시선이 잠시 전광판을 향했다.
신성 고등학교 타순 중 가장 높은 곳에 적힌 박유성이라는 이름 옆에 램프가 들어와 있었다.
“후우······. 왔냐?”
손에 잔뜩 묻힌 로진 가루를 불어내며 나해준이 씩 웃었다.
앞서 1회 초 때는 경황이 없어서 휘둘렸지만 두 번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나해준의 도발이 귀엽기만 했다.
지난 회차 때 나해준은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받고 위즈에 입단했다.
이후 위즈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거듭나면서 통산 100승의 위업을 달성했을 만큼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프로시절 커리어만 따졌을 때 라이벌인 김영진은 물론이고 오늘 경기에서 뛰고 있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나해준의 천적은 존재했으니.
‘그게 나야. 빠둠빠두비두바~’
1,2회차를 통틀어 나해준 상대 타율은 4할이 넘었다.
그것도 스플리터를 장착하면서 좀 떨어진 거고.
스플리터 장착 전에는 5할에 육박했다.
프로 시절도 이럴 진데 아직 멋모르고 던지는 고교 야구에서의 승부는 쉬워도 너무 쉬울 수밖에 없었다.
“해준아. 너무 열 내지 말고 받아 들여.”
방망이를 어깨 위로 걸치며 박유성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포수 박명수가 박유성을 한 번 바라봤다.
‘뭐야? 해준이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지만.
박명수는 몸 쪽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표정을 보니까 해준이 공에 자신이 있는 거 같은데······ 왠지 불안해.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야겠어.’
박명수가 바깥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요구하자 나해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구종이 달라졌을 뿐 첫 타석 때 3루타를 얻어맞은 코스였다.
만약 이관우였다면 헛소리 말라며 투구판에서 발을 뺐겠지만 선인 고등학교는 철저하게 포수의 리드를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명수가 저런 사인을 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길게 숨을 고르며 나해준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박유성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른 템포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나해준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오자 박유성도 반사적으로 오른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타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체인지업.’
공의 궤적과 구종을 파악한 순간 빠졌다고 확신을 한 것이다.
퍼억!
박유성이 속지 않자 박명수가 마지막 순간 미트를 들어 올리며 스트라이크 판정을 유도해 봤지만.
“볼.”
구심은 짧고 단호한 콜과 함께 박명수의 뒤통수를 툭 때렸다.
“그게 되겠냐?”
박유성도 박명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방금 전 공은 국가대표 포수를 앉혀놔도 살리기 불가능했다.
스트라이크를 노리고 던진 공이 예상보다 조금 낮게 들어 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유인구로 던진 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로 레벨의 베테랑 투수들은 보다 정교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유인구를 던질 수 있지만 고교 레벨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박명수는 2구째도 바깥 쪽에 살짝 빠지는 포심 패스트 볼을 요구했고.
퍼엉!
볼 카운트만 까먹고 말았다.
‘뭐야? 왜 안 건드려?’
나해준에게 공을 돌려주면서 박명수는 박유성을 째려봤다.
분명 이 정도면 방망이가 나와야 정상인데 마치 사인을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를 멈춰 세우고 있었다.
‘설마 몸 쪽을 노리고 있는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박명수는 3구 째 몸 쪽 높은 코스의 빠른 공을 주문했다.
조금만 몰리면 장타로 이어질 수 있는 코스였지만.
나해준이라면 타자가 속을 만 한 공을 제대로 던져 줄 거라 믿었다.
사인을 확인한 나해준도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박유성의 몸 쪽을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비산하는 로진 가루를 꿰뚫으며 새하얀 공이 총알처럼 날아와 꽂혔지만 박유성은 이번에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다 보인다니까.’
3회차를 사는 만큼 어지간한 공은 너그럽게 속아줄까도 싶었는데 몸이 반응하질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볼 카운트가 3볼로 몰리자 나해준과 박명수도 승부를 반쯤 포기했다.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들다가 장타를 얻어맞느니 1루로 내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볼!”
4구 째 몸 쪽 깊숙이 파고든 슬라이더를 골라낸 뒤에 박유성은 터벅터벅 1루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다급히 2번 타자 오진욱을 불렀다.
“진욱아. 번트 대는 시늉만 해.”
“유성이가 도루 할 때 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투 스트라이크를 먹더라도 일단 유성이가 2루 갈 때 까지는 참아.”
“넵. 코치님.”
신성 고등학교 벤치가 움직이자 장태우 감독도 김남훈 수석 코치를 찾았다.
“번트 작전을 쓰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2회 때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았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할까? 1회처럼 수비를 당겨?”
“일단 번트를 대 준 다음에 장태수와 어렵게 승부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남훈 수석 코치가 덤덤히 말했다.
앞선 1회 초에 쓸 데 없이 자존심을 세우다 상황이 꼬였던 만큼 이번에는 정석대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좋아. 그렇게 가자고.”
마음에 드는 대답을 얻은 장태우 감독이 김남훈 수석 코치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벤치의 주문을 받은 박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1루수와 3루수에게 번트에 대비하라는 사인을 냈다.
타석에 들어선 오진욱도 능청스럽게 번트 자세를 취했고.
“서로 무리하지 않으려나본데?”
“그렇겠지. 아직 경기 초반이니까.”
“박유성하고 장태수 말고는 나해준이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잖아.”
“번트로 보내면 장태수로 1루 채우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기자들도 자연스럽게 다음 상황을 예상했다.
하지만 나영진 기자는 투수와 타자의 승부보다 박유성이 더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