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6화 (36/412)

타자 인생 3회차! 36화

06. 박유성이 누구야? (4)

‘선인 더그아웃에서 유성이에 대해 일러줬을 테니까 어렵게 승부하겠지.’

사인 교환을 마친 나해준이 투구 자세에 들어가자 나영진 기자는 바깥 쪽 꽉찬 코스의 빠른 공이 들어 올 거라 예상했다.

예상대로 나해준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최단거리를 가로질러 타자의 바깥쪽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박유성이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방망이를 휘두르더니

따악!

좌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완전히 갈라버렸다.

“뭐, 뭐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해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팀 내에서 가장 발이 빠르고 수비 범위가 넓은 중견수 조일우가······ 백스텝이 아니라 아예 펜스 쪽으로 몸을 돌려 내달리고 있었다.

타구의 궤적 상 담장을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2루타 이상의 장타는 확정이었다.

‘제발 2루타로 끝나라. 제발.’

포수 뒤쪽으로 백업 수비를 들어가면서 나해준은 간절히 빌었다.

경기를 시작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사 3루 상황으로 몰리는 건 투수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유성은 2루에서 멈춰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직도 공을 못 잡았으니까 충분해’

2루로 내달리며 중견수의 움직임을 확인한 박유성은 그대로 2루 베이스를 찍고 3루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중견수의 송구가 앵커맨으로 들어 온 유격수에게 전달됐을 때.

촤라라락!

박유성은 일찌감치 3루 베이스에 스파이크 징을 찍어 넣었다.

“잘 했다. 유성아! 정말 잘 했어.”

신기남 주루 코치가 박유성에게 주루용 장갑을 건네며 엉덩이를 두드렸다.

선인 고등학교의 수비 플레이가 좋아서 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었는데 박유성이 멈추지 않고 달려 준 덕분에 최고의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았다.

그러자 박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코치님이 사인 주셨잖아요.”

“내가?”

“제 주력을 감안했을 때 해볼만 하다고 판단하신 거 아니었어요? 저는 그래서 멈추라는 사인이 안 나왔다고 생각했는데요.”

“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신기남 주루 코치도 따라 웃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자신의 머뭇거림을 좋게 포장해주는 게 기특하기만 했다.

솔직히 박유성은 주루와 수비 쪽으로는 더 가르칠 게 없었다.

특히나 주루 플레이는 완벽했다.

단순히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거라는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떤 베이스 러닝을 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방금 전 플레이는 따로 영상으로 찍어 교본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신성 고등학교 내에서 준족이라 꼽힐 만 한 주전급 선수는 네 명 뿐이었다.

박유성과 2번을 치고 있는 오진욱.

주전 유격수 김경준.

그리고 2학년 이재윤.

이들 네 명 중에 50미터 달리기 성적은 오진욱이 가장 빨랐다.

하지만 베이스 러닝은 박유성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박유성이 타격 후 1루 베이스를 찍는 데 까지 걸리는 시간은 3.2초.

슈퍼 소닉이라 불리던 이대영의 전성기 시절 기록과 맞먹었다.

3루까지 내달리는 건 11초 극초반이 나왔다.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고교 야구 레벨에서 마음먹고 뛰는 박유성을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박유성은 판단력도 만점이었다.

만약 박유성이 아니라 오진욱이 방금 전의 안타를 때려냈다면 어땠을까.

중견수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십중팔구 2루에 멈춰 섰을 거다.

타구가 완전히 빠져서 3루를 노려볼 만한 상황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나부터 무리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겠지.’

그러나 박유성은 달랐다.

처음부터 3루까지 뛰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2루 베이스를 돌아 3루로 내달리는 속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에 박유성이 2루에서 잠시 멈칫하다 3루로 뛰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3루에서 접전이 펼쳐졌겠지.’

박유성의 주력과 슬라이딩 센스를 감안하더라도 가속도가 줄어들면 살 확률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2루 베이스를 돌면서 속력을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속을 붙였고.

그 결과 3루 베이스 쪽으로 공이 오기도 전에 여유롭게 3루 베이스에 안착할 수 있었다.

박유성의 군더더기 없는 주루 플레이에 감탄한 건 신기남 주루 코치만이 아니었다.

“뭐야, 저 녀석?”

선인 고등학교 장태우 감독도 경기 시작과 동시에 3루를 점령한 박유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뛰는 거 하나는 잘 하네요.”

김남훈 수석 코치도 헛웃음을 흘렸다.

덕우 고등학교도 아니고 고작 신성 고등학교 선수를 칭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주루 플레이는 깔끔함, 그 자체였다.

“이거 한 점 주고 시작해야 하는 거야?”

장태우 감독이 김남훈 수석 코치를 바라봤다.

아직 경기 초반인 만큼 줄 점수는 주고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김남훈 수석 코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줄 점수는 주는 게 낫다는 건 어디까지나 벤치의 입장이었다.

김영진과의 경쟁에서 밀리긴 했지만 나해준은 선인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우완에이스였다.

경기 시작부터 3루타를 얻어맞은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허무하게 점수까지 내주면 경기 초반 분위기가 신성 고등학교 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좋아. 작전은 어차피 저 쪽에서 걸 테니까 우린 단단하게 버텨 보자고.”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했으니까요.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김남훈 수석 코치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전국 대회를 치르다 보면 뜬금없는 장타로 실점 위기에 몰리는 경우를 숱하게 겪는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실점을 막고 분위기를 잡아 가야만 강팀이 될 수 있었다.

“우현아! 진호야!”

김남훈 수석 코치는 직접 나서서 내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조정해 주었다.

희생 번트에 대비하기 위해 3루수 강정욱을 베이스라인 앞쪽으로 당기고.

2루수 김우현과 유격수 이진호의 수비 위치도 다시 잡아주었다.

다음 타자 오진욱이 내야 땅볼을 칠 경우 어떻게든 박유성을 3루에 묶어 두겠다는 계산이었다.

“이거 승부욕 돋는데?”

선인 고등학교 벤치의 속셈을 읽은 박유성이 씩 웃었다.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선수였다면 아마 벤치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겠지만 박유성은 이런 류의 전진 수비를 흔드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내야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만으로는 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가 없었다.

전진 수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점의 억제.

다시 말해 3루 주자가 쉽사리 홈 베이스로 뛰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였다.

경험이 부족한 주자에게 여차했다간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압박감을 줘야 함부로 리드를 벌리지 못할 테고.

그래야 투수도 3루 주자를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타자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3루 주자가 주눅 들지 않는다면 어떨까?

“어디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

한 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3루수 강정욱이 베이스 라인 앞쪽에 자리를 잡은 걸 역이용해 박유성은 대놓고 리드를 벌였다.

그러자 나해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벤치에서 작전이 나왔으니까 타자에만 신경 쓰려고 했지만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박유성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견제구를 던지기도 애매했다.

한 번 견제를 시작하면 3루수 강정욱이 베이스에 묶일 텐데 번트 타구가 3루 쪽으로 구르면 걸음이 느린 강정욱이 제대로 타구를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았다.

“3루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자.”

투구판에서 발을 뺀 나해준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박유성을 애써 지워 버렸다.

“어쭈구리? 이걸 참아?”

다시 3루 베이스로 돌아 온 박유성은 작전을 바꿨다.

리드 폭을 조금 좁혀 나해준을 안심시킨 뒤에 공을 던지기 직전에 스타트를 끊는 척 발을 굴렀다.

3루수 강정욱이 3루 베이스에 붙어 있었다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X발.”

나해준은 투구 판에서 발만 뺄 뿐 3루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저 녀석, 제법인데?”

선인 고등학교 장태우 감독의 입에서 다시 감탄이 터졌다.

지난 15년 간 수많은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해 왔지만 박유성처럼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움직이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김남훈 수석 코치는 박유성의 장난에 나해준이 놀아난다고 생각했다.

“명수야! 뭐하는 거야!”

김남훈 수석 코치가 포수 박명수를 질책했다.

그러자 박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큼 마운드로 달려갔다.

“왜 그래? 저 녀석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나도 신경 안 쓰고 싶다고.”

“수석 코치님 화 나셨으니까 적당히 해. 너 때문에 나만 욕 먹겠어.”

“그래. 알았어.”

경험 많은 포수였다면 어떻게든 투수를 달래줬겠지만.

고등학교 3학년에 올 시즌 처음으로 주전 마스크를 쓰게 된 박명수도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후우······. 흔들리지 말자.”

나해준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사인을 받기가 무섭게 3루 견제 없이 곧바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으악!”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그대로 오진욱의 허벅지를 때려버렸다.

3

“헐, 뭐죠?”

공윤경 기자가 당황한 눈으로 나영진 기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나영진 기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긴 뭐야. 유성이한테 완전히 당한 거지.”

“유성이요?”

“3루에 주자가 나가면 프로 투수들도 부담을 느껴. 특히나 주자를 마주봐야 하는 오른 손 투수들은 더 심하고.”

“그러니까 유성이 움직임 때문에 나해준이 말렸다는 거예요?”

“나해준의 제구력은 현 고교 리그 탑클레스 수준이야. 나해준의 포심이 돌직구라 불리는 것도 제구가 되기 때문이고.”

선수들의 체격 조건이 좋아지고 환경이 좋아지면서 고교 야구 투수들의 구속도 빨라졌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50km/h 근처를 던지면 강속구 투수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금은 155km/h 이상을 던져야 강속구 투수라 인정했다.

하지만 단순히 구속만 빠르다고 해서 구위가 좋은 건 아니었다.

한 복판에 몰리는 빠르기만 한 공 보다는 스트라이크 좌우를 찌르는 덜 빠른 공이 타자 입장에서는 훨씬 치기 까다로웠다.

나해준은 최고 구속 153km/의 빠른 공을 타자의 무릎 높이로 찍어 던질 줄 아는 선수였다.

볼카운트가 유리하면 프로 투수들처럼 타자의 어깨 높이로 하이 패스트 볼을 찔러서 헛스윙을 유도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나해준이 3루타와 몸에 맞는 공을 연거푸 내줬다.

그것도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포심 패스트 볼을 던져서 말이다.

이건 선인 고등학교 벤치의 잘못도 아니고 나해준의 잘못도 아니었다.

‘저 녀석이 문제야.’

나영진 기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나해준이 박유성의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따악!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장태수가 나해준의 3구를 잡아 당겨 적시타를 때려냈기 때문이다.

3루에 있던 박유성은 종종걸음으로 홈을 밟았고.

1루 주자 오진욱은 3루를 넘보다가 다시 2루로 귀루했다.

잠시 후 전광판의 스코어가 1대 0으로 바뀌자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나해준 컨디션 좋은 거 맞아요?”

“나해준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방금도 우리 유성이 때문이라고요?”

“장태수 상대로 어떻게 던졌나 말해 봐.”

“초구에 바깥 쪽 빠지는 공이 들어왔고 2구는 몸 쪽 스트라이크. 그리고 3구째 다시 바깥 쪽 던졌다가 맞은 거잖아요?”

“핵심이 빠졌잖아. 핵심이. 구종이 뭐야?”

“구종이요? 아······. 그러네. 전부 빠른 공이었네요.”

“그래. 나해준은 원래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잘 던져. 만약에 유성이가 3루에 없었다면 방금 공은 몸 쪽 낮게 떨어뜨렸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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