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2화
05. 질주 본능 (6)
따악!
생각 이상으로 공이 빨라서 제대로 공을 맞춰내지 못했지만 타구는 이관우의 옆을 지나 2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빠져 나갔다.
“그렇지!”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유성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관우 성격에 장태수도 아니고 하위 타순에 2학년인 홍선우에게 안타를 얻어맞았으니 잔뜩 열이 받았을 것 같았다.
“X발!”
예상대로 이관우는 마운드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명 먹힌 타구였는데 빈 구멍을 찾아 빠져나가니까 짜증이 났다.
“재윤아!”
이관우가 흥분한 걸 확인한 김석률 수석 코치는 곧바로 이재윤을 불렀다.
“번트를 대라. 투수 정면으로만 보내지 말고.”
“넵.”
2학년인 이재윤에게 이관우의 공을 공략해내라 주문하는 건 과한 요구였다.
그보다는 홍선우를 2루로 보낸 뒤에 박유성 타석 때 승부를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덕우 고등학교 최명룡 감독도 움직였다.
“1루수와 3루수 당기고 절대로 번트 주지 마!”
평소였다면 줄 점수는 주고 가자며 이관우를 달랬겠지만.
바로 다음 타자가 1회 초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이다보니 어떻게든 홍선우를 1루에 묶어 두고 싶었다.
양 측 벤치에서 서로 작전을 꺼내 들자 박유성이 씩 웃었다.
“이거 흥미진진한 걸?”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은 신성 고등학교 쪽이 높아 보였다.
1루에는 주루 플레이가 평범한 홍선우가 나가 있고.
타석에는 경기 경험이 부족한 2학년 이재윤이 서 있다.
이관우가 한복판으로 공을 던져준다고 해도 희생 번트로 이어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덕우 고등학교가 내야를 당겼으니 이재윤이 느끼는 부담감도 커질 터.
여차했다가 진루타는 커녕 더블 플레이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박유성은 왠지 이관우가 사고를 쳐 줄 것 같았다.
‘원래 저런 녀석은 자기 페이스대로 공을 던져야 하니까.’
투구와 동시에 1루수와 3루수가 홈플레이트 쪽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과연 이관우가 피칭에 집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딱.
이재윤이 번트를 댄 타구가 이관우의 정면으로 굴러가면서 변수가 발생했다.
타격 직전까지의 상황은 서로 실수를 주고받았다.
주변이 어수선해진 탓인지 이관우가 몸 쪽으로 던진 공이 한복판으로 몰려 들어갔고.
1루수와 3루수의 움직임에 마음이 급해진 이재윤이 숨을 죽이지 못하고 투수 쪽으로 방망이를 내밀면서 투수 정면으로 타구가 굴러갔으니 양 팀 벤치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다고 봐야했다.
불규칙하게 튀어 오른 타구를 이관우가 글러브로 낚아 챌 때 까지만 해도 무사 1루의 기회가 물거품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2루수가 압박 수비에 들어간 1루수를 대신해 1루 베이스 백업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혹시 있을지 모를 강공 전환에 대비해 3루 쪽으로 치우쳐 수비를 하고 있던 유격수가 2루 베이스를 커버하기도 전에 이관우가 2루를 향해 공을 던져버린 것이다.
다행이 중견수가 제 때 빠진 공을 잡아내면서 추가 진루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무사 주자 1,2루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추가점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첫 타석 때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이 등장했다.
“날씨 조오타~”
왼쪽 타석으로 걸어 들어오며 박유성이 씩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하늘에 구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관중석도 텅 비다시피 해서 적시타를 때려내면 그 소리가 더 쩌렁하게 울릴 것 같았다.
“고생하십니다. 선배님.”
“어. 그래.”
프로시절 습관대로 헬멧 챙을 가볍게 들어 구심에게 인사를 한 뒤 박유성은 느긋하게 타석에 들어섰다.
마음 같아서는 부들부들거리고 있을 이관우를 향해 한껏 비웃음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러다 얻어맞으면 나만 손해니까.’
박유성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어떻게든 승부를 이끌어내기 위해 마운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루틴을 시작했는데.
“타임!”
1루 쪽 더그아웃 쪽에서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 여기서 이관우를 교체한다고?”
박유성이 놀란 눈으로 덕우 고등학교 벤치를 바라봤고.
애써 짜증을 삭히던 이관우의 시선도 최명룡 감독을 향했다.
경기는 이제 겨우 3회 초였다.
1대 0으로 지고 있고 무사 1,2루의 위기 상황이라 해도 선발 투수를, 그것도 에이스를 강판시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최명룡 감독도 고민에 빠졌다.
분위기 상 여기서 어떻게든 끊고 가야 하는데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일단 김 코치가 가서 관우하고 얘기 좀 해 봐.”
“넵. 감독님.”
마운드에 김재영 투수 코치를 대신 올려 보내고 최명룡 감독은 주연식 수석 코치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여기서 관우를 내리면 사기가 많이 떨어질 겁니다. 아직 경기 초반이니까 조금 더 끌고 가보시죠.”
“그러다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도 일찍 맞는 게 낫고요.”
결론은 달랐지만 최명룡 감독과 주연식 수석 코치가 걱정하는 건 같았다.
에이스인 이관우의 멘탈.
올 시즌 덕우 고등학교 성적은 이관우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년 확실한 에이스 카드의 부재로 우승에 실패한 터라 올 해는 어떻게든 이 관우를 앞세워 성적을 내야 했다.
그 때 김재영 투수 코치가 이관우를 달래고 돌아왔다.
“관우는 어때?”
“무조건 던지겠답니다.”
“괜찮은 거 같아?”
“관우 믿고 한 번 가 보시죠.”
주연식 수석 코치에 이어 김재영 투수 코치까지 반대하자 최명룡 감독도 교체를 포기했다.
오랜 지도자의 경험 상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그 찜찜함만으로 에이스를 끌어내리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대신 최명룡 감독은 외야수를 교체했다.
“민성기가 빠지고 박진욱이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박진욱?”
“수비 하나는 기똥차게 하는 녀석입니다. 작년에도 선배들 백업 수비수로 뛰었고요.”
“그러니까 수비 보강을 하겠다는 이야기로군.”
덕우 고등학교 벤치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석률 수석 코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나승균 감독이 입을 열었다.
“김 코치. 우리도 뭘 해야 하는 거 아냐?”
“유성이 타석이니까 지켜보시죠. 괜히 작전을 걸었다가 유성이를 거를지도 모릅니다.”
“어이구. 그러면 안 되지. 유성이한테 자신 있게 치라고 해.”
“네. 감독님.”
김석률 수석 코치는 3루 베이스 코치를 향해 강공 사인을 냈다.
그리고 그 주문이 박유성에게 전달됐다.
‘그럼요. 당연히 강공이 나와야죠.’
새삼 달라진 신성 고등학교 벤치의 기대감에 박유성이 씩 웃었다.
똑같이 1번 타자로 출전했던 1회차였다면 아마 무조건 희생번트 사인이 나왔을 거다.
무사 1,2루라 병살만 치지 않는다면 3번 타자까지 찬스가 이어지는 만큼 무리하지 말라며 신신당부까지 덧붙였을 것 같았다.
그런데 3회차에 접어들고 나니까 거의 장태수 급 신뢰를 받았다.
“어디 먹방 한 번 찍어 보실까?”
박유성이 히죽 웃으며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관우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X발 새끼가 쪼개고 지랄이야.”
김재영 투수 코치는 다 잊어버리고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라고 말 했지만.
박유성의 표정을 보니까 방금 전 실책 장면이 떠올라 짜증이 치밀었다.
“X발. 진짜. 병신같은 게 그거 하나 커버 못 하고.”
다소 서두르긴 했지만 그 정도쯤은 유격수 유재승이 충분히 받아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유재승은 공을 포구조차 하지 못했다.
중견수 김현중이 아니었다면 무사 1,2루가 아니라 1,3루가 될 뻔 했다.
연습 경기였다면 바로 한 마디 쐈을 텐데.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그 때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듯 포수 최민석이 바깥 쪽 사인을 냈다.
“X발, 장난해?”
이관우가 짜증스럽게 발을 풀었다. 그리고는 마운드 아래로 내려가 로진백을 힘껏 움켜진 뒤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하아······.”
어지럽게 비산하는 로진가루를 보며 최민석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행동은 투수 리딩을 거부하겠다는 의미였다.
진짜 열 받았으니 짜증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안타를 맞으면 팀은 물론이고 이관우에게도 좋을 게 없었지만.
최민석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관우에게 맞춰 주었다.
그렇게 한참 만에 사인 교환이 끝나고.
퍼엉!
이관우의 초구가 박유성의 얼굴 옆쪽으로 꽂혔다.
“이럴 줄 알았다.”
박유성은 가볍게 고개를 젖히며 공을 피했다.
1회차 시절, 몸 쪽 위협구가 날아왔을 때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프로에서만 40년을 뛴 박유성에게 이 정도 위협구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제구는 좋네.”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서며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흔히들 공으로 타자를 맞추는 게 쉽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는 것만 주구장창 연습해 온 투수에게 몸쪽 깊숙한 코스도 아니고 빈볼을 던지라고 하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자들이 빈볼인지 아닌지는 보면 안다고 말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이관우는 평소 투구 폼대로 몸 쪽 높은 코스를 찔렀다.
프로 기준에서 이 정도는 위협구 축에도 못 들지만.
피칭 존을 이렇게 넓게 쓸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관우가 상대하는 건 인생 3회차 타자였다.
“자신 있으면 또 한 번 던져 봐.”
루틴을 마친 박유성이 다시 히죽 웃으며 방망이를 들었다.
보나마나 몸 쪽 위협구로 홈플레이트에서 떨어뜨린 뒤에 바깥 쪽 코스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 어림도 없었다.
박유성의 이죽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관우는 다시 몸 쪽 깊숙이 빠른 공을 찔러 넣었고.
볼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로 바뀌었다.
“볼넷으로 거르면 안 되니까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충분히 이득을 챙긴 박유성은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1/3족장 정도 뒤로 물러서자 이관우가 좋다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이거 위험한데.’
박유성이 너무도 순순히 뒤로 물러나자 최민석은 괜히 불안해졌다.
본래라면 바깥 쪽 빠른 공을 던질 차례였지만.
정직하게 승부했다가 크게 얻어맞을 것 같았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분위기를 환기시킨 최민석은 규칙을 깨고 바깥 쪽 낮은 코스의 포크 볼 사인을 냈다.
그러자 이관우가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뭐래. 대가리는 장식품이냐?”
포크볼은 말 그대로 결정구였다.
그렇다면 원 스트라이크나 투 스트라이크 때 던지는 게 맞았다.
만에 하나 최민석의 요구대로 포크 볼을 던졌다가 박유성의 방망이가 나오지 않으면 볼카운트는 3볼까지 몰릴 터.
“헛소리 말고 넌 공이나 받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깥 쪽 빠른 공 사인을 받아 낸 이관우가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공은
따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좌익수 라인 쪽으로 뻗어 나갔다.
“크다!”
홈 승부를 대비해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좌익수 박영진은 재빨리 몸을 돌려 펜스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총알처럼 뻗어나간 타구는 페어 라인 안쪽을 찍은 뒤에 외야 파울 라인 쪽으로 휘어져 나갔다.
“젠장할!”
급한 마음에 공을 쫓아다닌 박영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공을 손에 쥐었고.
그 사이 박유성은 2루를 지나 3루까지 내달렸다.
“빨리 던져! 빨리!”
앵커맨으로 들어간 유격수 유재승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박영진의 두 눈은 유재승이 아니라 박유성을 쫓았다.
‘잡을 수 있어!’
박영진은 도움닫기도 생략하고 3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평소 칭찬을 받아왔던 강한 어깨와 정확한 송구 능력이라면 3루에서 박유성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수비 플레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선택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슬라이딩을 하는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3루수 이태민은 머리 위로 날아오는 송구를 잡지 못했고.
“빠졌다!”
“뛰어! 뛰어!”
그 틈에 박유성은 3루 베이스를 돌아 홈까지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