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1화 (31/412)

타자 인생 3회차! 31화

05. 질주 본능 (5)

장태수가 초구 바깥 쪽 슬라이더에 이어 2구 째 날아든 바깥 쪽 빠른 공까지 건드려주자 이관우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X발. 맞네. 아까 그 새끼가 뽀록이었어.”

박유성에게 기습적인 선제 홈런을 얻어맞았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자신의 공에 쩔쩔매는 오진욱과 장태수를 보니까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뭐가 이렇게 빨라?”

반대로 장태수는 표정이 굳어졌다.

볼 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정타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다보니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그 결과

“스트라이크 아웃!”

몸 쪽으로 뚝 떨어지는 포크 볼에 속아 방망이를 휘두르고 말았다.

“저 멍청한 놈. 똥꼬에 힘 빡 주라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장태수를 보며 박유성이 혀를 찼다.

이대로 이관우의 기세를 꺾어 놔야 경기가 편해지는데 팀의 중심 타자인 장태수가 3구 삼진을 먹었으니 한숨만 났다.

“지원아. 오늘 경기는 너하고 내가 해 줘야 해.”

박유성은 냉큼 손지원의 옆에 붙어 앉았다. 에이스인 손지원이 리드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덕우 고등학교 페이스로 끌려갈 것 같았다.

그러자 손지원이 무겁게 한숨을 내뱉었다.

“부담 좀 그만 줘. 가뜩이나 떨려 죽겠는데.”

“이 자식이? 네가 그리고도 에이스야? 자신감을 가져 인마. 덕우고 애들도 별거 없어. 너하고 똑같은 고3이라고.”

프로 야구에서는 스무살 짜리 신인이 서른을 넘긴 베테랑을 상대하기도 하지만.

아마추어 레벨에서 나이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끽 해야 한두 살 차이이고 한 해에 치르는 경기 수도 적다 보니 경험의 차이까지 갈 것도 없었다.

‘나처럼 3회차라면 또 모를까.’

박유성이 손지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기자석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원아. 오늘 네가 이관우를 이기면 내일 어떤 기사가 날 것 같냐?”

“내가 이관우를?”

“왜? 못 할 거 같아? 이관우가 뭔데? 내가 홈런 쳐 봐서 아는데 별 거 없어.

난 오히려 청백전 때 네 공이 더 까다롭더라.”

“에이. 거짓말하지 마.”

“짜식이 눈치는. 그래도 30퍼센트쯤은 진심이니까 쫄지 마. 저 기자들 앞에서 보여 주라고. 좋은 기사가 나와야 프로 스카우트들도 너한테 관심을 갖지.”

“후우······. 알았어. 한 번 해 볼게.”

“그래. 그리고 애매하다 싶으면 나한테 보내. 내가 다 잡아낼 테니까.”

4번 타자 김병욱마저 삼진으로 아웃되자 박유성과 손지원은 동시에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자. 에이스.”

“좋아. 해 보자! 캡틴!”

서로 파이팅을 외치는 박유성과 손지원을 보며 장태수가 코웃음을 쳤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녀석. 주장시키길 잘 했네.”

지난 겨울.

박유성의 도핑 검사가 나온 직후 나승균 감독은 새로운 주장으로 박유성을 선택했다.

장태수만큼 듬직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장이라는 감투라도 씌워야 한다는 김석률 수석 코치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결과였다.

“코치님. 주장은 싫어요. 차라리 부주장을 시켜 주세요.”

“주장 밑에서 꿀만 빨려고?”

“역시 코치님이 뭘 아시네요. 원래 고생하는 감투는 쓰는 게 아니랬어요.”

“감독님이 결정하신 거니까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주장 역할 잘 해. 네가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내년 성적이 달라질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도 크게 기대를 한 게 아니었다.

지금껏 주장 자리를 거쳐 갔던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력적으로 솔선수범만 보여줘도 충분하다 여겼다.

그런데 먼저 나서서 손지원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니까 코치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아!”

“네. 코치님.”

“우리가 한 점 앞서고 있으니까 기세 넘어가지 않게 공격적으로 승부해.”

“공격적으로요?”

“점수는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지키는 데 급급하지 마.”

“아, 네. 알겠습니다.”

김석률 수석 코치의 주문대로 포수 김 산은 적극적으로 인 코스 사인을 냈다.

따악!

1번 타자 송길우는 초구에 몸 쪽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은 뒤에 2구 째 바깥 쪽 슬라이더를 던져 유격수 땅볼로 유도해냈고.

“스트라이크, 아웃!”

2학년인 2번 타자 박영진은 초구와 2구, 3구까지 계속해서 바깥 쪽 공만 보여주다가 몸 쪽 꽉 찬 공을 찔러 넣어 삼진으로 잡아냈다.

따악!

덕우 고등학교의 간판타자인 3번 김정우에게 너무 정직하게 승부를 걸었다가 좌중간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장타를 얻어맞으며 2사 2루의 위기에 몰렸지만.

따악!

4번 타자 이태민이 센터 쪽으로 날린 공을 박유성이 가볍게 처리해내면서 1회말 덕우 고등학교의 공격은 무득점으로 끝이 났다.

“나이스 피칭!”

“수비 좋았다.”

“소리만 요란했지 공이 안 뻗더라. 그러니까 자신 있게 던져.”

“그래. 알았어.”

2회 초 공방도 득점 없이 끝났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관우가 김 산과 김경준을 상대로 연속 삼진을 잡아내며 기세를 끌어올리자손지원도 최고 구속 154km/h짜리 포심 패스트 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덕우고등학교 타선을 잠재웠다.

“신성 뭐야?”

“그러게. 손지원이가 저렇게 잘 했나?”

“상대가 이관우라 바짝 쫄았을 줄 알았는데 제법이야.”

“제법은 무슨. 원래 한 타순은 지켜봐야지.”

“맞아. 팀의 에이스라면 원래 저 정도는 해 줘야 해.”

자리한 기자들은 손지원의 호투를 칭찬하면서도 덕우 고등학교가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단 선발의 이름값 차이가 크고 타선도 덕우 고등학교가 훨씬 앞서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한 점으로는 안심하기 어렵지. 손지원의 구위가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고.”

“신성에서 추가점을 내지 못하는 한 덕우가 이길 거라는 거네요?”

“그만큼 신성과 덕우는 전력 차이가 커. 신성 입장에서는 서너 점 이내로 져도 졌잘싸 소리 나올 테고.”

나영진 기자가 전광판을 바라봤다.

신성 고등학교의 3회 초 공격은 8번 타자부터 시작되는데 2학년에 좌타자라 이관우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같은 2학년인 9번타자 이재윤도 마찬가지일 테고.

‘2사 이후에 박유성이라. 박유성이 출루한다 해도 추가 득점은 어렵겠어.’

나영진 기자가 쓰게 웃었다.

박유성이 스타트를 잘 끊어 놓았지만 중반으로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덕우 고등학교가 분위기를 잡아 갈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따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뜬금없이 안타가 터져 나왔다.

3

“······7번에 현재. 그리고 8번이 선우.”

김석률 수석 코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됐을 때.

홍선우는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두 경기 성적이 8타수 2안타라 타순 조정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장태수, 김병욱과 함께 클린업을 쳤는데 6번도 아니고 8번으로 가라니까 자존심이 상했다.

“상대 선발이 좌완이라 일부러 8번으로 뺐으니까 너무 기죽지 마라.”

김석률 수석 코치를 대신해 최윤석 타격 코치가 홍선우를 달랬다.

코치들 사이에서 홍선우는 리틀 장태수로 불렸다.

장태수와 체격도 비슷하고 포지션도 같아서 장태수의 뒤를 이어 신성 고등학교 타선을 이끌어줄 기대주로 꼽혔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홍선우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스타팅 라인업에서 빠지게 될 지도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포지션 변경을 받아들이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최윤석 타격 코치의 먹자 캠프를 신청하는 건데.

온갖 후회가 머릿속을 잠식해 가던 그 때.

따악!

청명한 파열음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와······.”

총알처럼 뻗어나간 타구가 담장 밖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지켜 본 홍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박유성이 벤치로 돌아오자 수건과 이온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선배님.”

“어, 그래. 고맙다.”

“저 좀 살려주세요.”

“······?”

“저 오늘 8번입니다. 이러다 후보로 밀릴지도 몰라요.”

“우리가 덕우도 아닌데 네가 후보로 밀리겠냐?”

박유성은 홍선우가 엄살을 떠는 거라 여겼다.

신성 고등학교도 선수층이 두터운 편이지만 덕우 고등학교 같은 명문과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덕우 고등학교 야구부는 둘로 쪼개면 어지간한 야구부가 두 개 나올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그것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만 모여 있었다.

전국 대회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학교에서 주전으로 뛰는 것보다 전국 대회 8강을 밥 먹듯 찍는 덕우 고등학교에서 뛰는 게 프로 입시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홍선우가 덕우 고등학교 선수였다면 벤치 멤버로 밀렸겠지만.

신성 고등학교에는 홍선우를 대체할 수 있는 2학년이 없었다.

“약한 소리 그만하고 이리 앉아 봐.”

박유성이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홍선우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냉큼 다가와 주저앉았다.

“자. 지금부터 눈 크게 뜨고 이관우를 지켜 봐. 초구에 어떤 코스로 공을 던지는지. 또 어떤 구종을 많이 던지는지. 매니저가 만들어 준 전략분석표에 의존하지 말고 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 봐.”

단순히 1년 선배였다면 조언이랍시고 그럴 듯 한 말을 늘어놓았겠지만 프로 40년차 박유성은 후배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고기를 잡아달라고 징징거리는 녀석들은 알려줘 봐야 소용이 없었다.

효과를 봐도 잠시 뿐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유성은 괜찮은 후배들에게 생각하는 야구를 가르쳐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이관우 선배 공을 칠 수 있을까요?”

“일단 해 봐. 그럼 답이 나올 거야.”

현재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 선수들중에 프로에 가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건 크게 네 명 뿐이었다.

박유성. 장태수. 김 산, 그리고 홍선우.

하위 라운드에서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은 홍선우는 평균 이상의 타격과 장타력을 선보이며 1.5군으로 활약했다.

비록 박유성이나 장태수처럼 오래 버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됐다.

만약 장태수나 김병욱이었다면 잘난 척 한다고 투덜거렸을 텐데 홍선우는 2회까지 눈을 크게 뜨고 이관우의 피칭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는 2회 말 수비를 마치고 박유성이 더그아웃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시 들러붙었다.

“선배님!”

“뭐 좀 알아냈어?”

“몸 쪽 빠른 공입니다.”

“뭐가?”

“저한테 몸 쪽 빠른 공을 던질 것 같습니다.”

“근거는?”

“이관우 선배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우리 팀 타자들을 좀 깔보는 것 같습니다.”

“그게 다야?”

“아까 선배님께 홈런을 얻어맞는 거 빼고 이관우 선배의 몸 쪽 공을 제대로 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한테도 몸 쪽 빠른 공을 던질 거라는 거지?”

“네. 저는 좌타자니까 무조건 몸 쪽으로 던질 것 같습니다.”

“그래. 잘 파악했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 숙제였다.

이관우가 던지는 대부분의 공이 타자의 몸 쪽을 향했고.

이관우의 손끝을 빠져나간 대부분의 공은 포심 패스트볼이었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태수를 비롯해 김병욱과 김 산, 김경준, 이현재까지 그 뻔한 패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로 네 타석이지?”

“네. 선배님.”

“똥꼬에 힘 빡 주고 몸 쪽 빠른 공만 노려. 다른 공은 거들떠보지도 마.”

“넵! 알겠습니다!”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홍선우는 박유성의 주문대로 괄약근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덩달아 코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아, 무게 중심을 잘 잡으라는 얘기였구나.’

개떡 같은 말을 찰떡 같이 깨달은 홍선우는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다 이관우의 초구가 몸 쪽으로 빠르게 날아들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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