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화
05. 질주 본능 (4)
“그런데 왜 부른 거야?”
“왜긴 왜야. 저 아저씨 왔으니까 제대로 보여 줘야지.”
“그럼 공격적으로 리드할까?”
“노노.”
“······?”
“그냥 공격적 말고. 초공격적으로 가자.”
“그렇게나?”
“아니다. 그냥 대충 미트만 들고 있어. 신성 고등학교 쯤은 한복판으로 던져도 다 잡아낼 수 있으니까.”
오늘도 자신만만한 이관우가 마음에 들었던지 김재영 투수 코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투수라면 저런 맛이 있어야지.”
이관우는 처음 봤을 때 부터 마음에 들었다.
체격이 좋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그 이상이었다.
180cm가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유연한 몸 까지.
“저 녀석 한 번 키워보고 싶습니다.”
고교 야구계에서 투수 조련사 소리를 듣던 김재영 투수 코치는 곧바로 합격점을 주었다.
구속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끌어 올릴 수는 있지만 체격, 특히 어깨는 타고나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관우는 대성할 재목이었다.
그 기대대로 이관우는 빠르게 성장했다.
무지막지로 던지던 140km/h 초반의 포심 패스트 볼은 밸런스 교정을 거쳐 158km/h 까지 올라왔고.
중학교 시절부터 제법 던졌다던 슬라이더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140km/h 짜리 고속 슬라이더로 성장했다.
손가락이 길고 악력이 좋아 가르쳤던 포크 볼은 자신보다 잘 던지고 있고.
거기에 체인지업과 커브도 평균 이상이다 보니 현 고교 야구에서 이관우의 공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타자는 없을 것 같았다.
‘신성의 3번도 어차피 좌타자니까.’
김재영 투수 코치의 시선이 잠시 더그아웃 앞쪽에 나와 있는 장태수에게 향했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투수가 마운드 위에 서 있어서일까.
왠지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관우 녀석은 나도 좀 무섭긴 해. 암튼 부모님이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니까.’
듣기로 이관우라는 이름은 본래 이름이 아니었다.
본래 이름은 따로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심해서 조부모가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고.
용맹한 장수의 이름을 붙여야 오래 살 수 있다고 해서 삼국지의 대표 명장, 관우를 가져다 쓴 것이라고 했다.
부모 말로는 어렸을 때는 애교도 많고 귀여웠다던데.
하관이 길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그런지 몰라도 수염만 달아놓으면 관우처럼 보일 것 같은 포스가 느껴졌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는 담당 코치도 부담스러운 외모인데 경기장에서 처음 만난 장태수가 지레 겁을 먹는 건 당연한 일.
“관우야! 자신감 있게!”
최민석이 마운드를 내려가자 김재영 투수 코치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이관우가 1루 쪽 더그아웃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여전하네. 저 놈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유성이 코웃음을 흘렸다.
보통 투수라면 첫 타자를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력을 높이기 마련인데 이관우에게서는 눈곱만큼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내 소문을 못 들었구나?”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디딤 발로 바닥을 단단히 다졌다.
현 시점에서 이관우가 자신을 무시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관우는 명문 덕우 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기대주란 평가를 받아온 반면 자신은 지난 2년 간 딱히 보여준 게 없으니까.
이관우 입장에서는 자신의 성적을 깔아 줄 대상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1회차 시절에도 이관우에게 안타를 때려냈다.
‘팀이 지긴 했지만 나 혼자 2안타를 쳤었지? 그 다음에는 이관우가 승부를 피했고.’
2회차 시절 5번 타자로 출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첫 타석 때 몸 쪽 빠른 공을 잡아당겨 2루타를 치고 나가니까 그 다음 타석때부터 이관우가 좋은 공을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다시 3회차다.
이관우는 박유성이 처음이겠지만 박유성은 이 순간만 세 번째였다.
게다가 프로에서의 상대 경험도 있다 보니 이관우의 압도적인 체격이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루틴을 마친 박유성이 어깨 위로 가볍게 방망이를 걸쳤다.
그러자 마운드에 서 있던 이관우의 눈매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저 새끼 뭐야?”
지금껏 수많은 타자들을 상대해 왔지만 자신을 앞에다 두고 저렇게 요란을 떠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넌 뒈질 준비해라.”
이관우가 그 자리에서 포심 패스트 볼 그립을 쥐었다. 그리고는 몸 쪽 빠른 공 사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마추어 선수들이었다면 이관우의 그 포스에 겁을 먹었겠지만.
‘서두르는 거 보니까 몸 쪽으로 붙는 빠른 공이네.’
이관우를 많이 상대한 박유성은 어렵지 않게 구종과 코스를 알아챘다.
박유성은 일부러 1루 쪽으로 어깨를 살짝 열었다.
제 아무리 몸 쪽 공에 자신이 있더라도 미리 각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눈썰미가 좋은 프로 투수라면 그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발을 풀어버렸겠지만.
제 실력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이관우는 곧바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이관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살짝 몰리듯 몸 쪽을 파고들었다.
순간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실투.’
이관우 입장에서는 용납 가능한 코스일지 몰라도.
프로 기준에서 봤을 때는 실투에 가까운 공이었다.
그리고 좋은 타자가 되려면 이 실투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따악!
빠르게 허리를 빠져나온 방망이가 내리꽂히는 공을 그대로 들이받았고.
총알처럼 뻗어나간 타구는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뭐야?”
“지금 홈런 친 거야?”
여유롭게 경기를 지켜보던 기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태수 타석 때 까지는 별 일 없을 줄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선두 타자가, 그것도 초구를 받아 쳐서 홈런을 때려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최 기자. 봤어?”
“보긴 뭘 봐. 나도 방금 왔는데.”
“누구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본 사람 없어?”
“실투였나?”
“실투였겠지. 제대로 던진 공을 무슨 수로 때려?”
“그런데 구속이 156km/h인데?”
“진짜 얻어 걸렸나보네.”
열 명의 기자들이 기자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 중에 방금 전 타격 장면을 제대로 지켜 본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 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저 놈?”
여유롭게 베이스를 도는 박유성을 보며 나영진 기자가 눈을 끔뻑였다.
방금 전 이관우의 초구는 코스를 알려줘도 치기 힘든 공이었다.
방망이를 가져다 댈 수는 있겠지만 라이너성으로 홈런을 때려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코스였다.
그런데 그걸 저 7번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역시 나 선배. 진짜 안목 뭐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박유성하고 이관우가 붙은 적 있냐?”
“아뇨. 없어요.”
“확실해?”
“설마 제가 그런 것도 준비 안 했을까봐요? 없어요. 신성고 타자들 중에 최근 2년간 이관우와 붙은 선수는 없어요. 주말 리그에서 한 지구로 묶인 게 2년 전 전반기였어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영진 기자가 3년 째 말 많은 여자 후배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준비성.
자신이 신입일 때 보다 더 철저하게 데이터를 확인하고 분석하다 보니 차마 떼어내질 못했다.
“전국 대회에서는?”
“덕우는 시드권이잖아요. 1라운드부터 올라와야 하는 신성하고 붙을 일이 없죠.”
“그러니까 지금 저 녀석이 생전 처음 보는 투수의 공을 때려서 담장 밖으로 넘겼다는 거지? 그것도 이관우의 공을?”
“왜 그렇게 놀라세요? 선배 눈에 들려면 저 정도는 기본 아니에요?”
“말 같은 소릴 해라. 방금 전 코스는 송현민이 와도 못 쳐.”
“에이, 송현민은 치죠.”
“안타를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홈런은 불가능하다고. 저건 얻어 걸린 게 아냐. 대놓고 때려 넘긴 거야.”
야구장에서 투수의 공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는 1루 쪽도 3루 쪽도 아니었다.
바로 홈 플레이트 뒤 쪽.
지금 앉아있는 기자석처럼 경사까지 확보했다면 더 확실하게 투구를 분석할 수 있었다.
188cm의 키를 가진 좌완 투수가 던진 156km/h 몸 쪽 빠른 공을 오른 손 타자도 아니고 왼 손 타자가 찍어 넘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건 프로 레벨에 적용시켜도 희박했다.
그 코스의 공을 수십 번 상대해 보지 않고서는 방망이를 휘두를 타이밍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을.
그것도 처음 만나는 투수의 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내다니.
‘우연이 아니라면······ 진짜 물건이야.’
나영진 기자의 시선이 3루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는 박유성을 쫓았다.
그러느라 마운드 위에서 씩씩거리는 이관우를 미처 보지 못했다.
“X발. 뭐야?”
이관우는 방금 전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대로 공을 챘고 원하는 코스로 잘 들어갔는데 그게 넘어가다니.
꼭 귀신에 혹한 기분이었다.
“뭐야? 어떻게 친 거야?”
대기 타석으로 나온 장태수도 박유성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형이 비법 좀 알려 줄까?”
“네. 형. 알려주세요.”
“타석에 들어가면 말이야. 똥꼬에 힘 빡 주고 몸 쪽 공만 노려. 그러다보면 하나 걸리는 게 있을 거야.”
“야! 장난해?”
“진짜라니까? 가서 해 봐. 해 보고 말 해.”
언론에서는 이관우가 올 시즌이 끝나면 무조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 이관우는 1회차와 2회차 모두 히어로즈의 1차 지명을 받고 국내에 잔류했다.
그리고 두고두고 히어로즈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빠른 공을 던지지만 그것뿐인 투수.
체격이 좋아서 선발로 써야 하는데 경기 운영 능력이 없는 투수.
이번 3회차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이관우는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투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좌타자가 좌완 파이어 볼러의 공을 치기 위해서는 몸 쪽 공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다.
좌투수가 좌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몸 쪽 공은 비거리가 가장 짧았다.
게다가 시각적으로 머리 뒤에서 공이 날아드는 느낌이다보니 몸 쪽 공 자체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타석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선 채로 대놓고 몸 쪽 공을 노리는 게 나았다.
특히나 이관우처럼 제 잘난 맛에 사는 투수를 상대로 몸 쪽 공을 공략해 낸다면 볼카운트 싸움을 훨씬 더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장태수는 박유성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쁜 새끼. 혼자만 해 먹으려고.”
더그아웃에서 나승균 감독과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박유성을 보며 이맛살만 찌푸렸다.
따악!
2번 타자 오진욱이 2구를 건드려 2루수 땅볼로 물러났고.
장태수의 차례가 돌아왔다.
본래 신성 고등학교는 김병욱을 3번에 두고 장태수를 4번에 배치하려 했다.
테이블 세터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다 보니 장타력을 갖춘 김병욱과 장태수콤비로 한 방 야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유성이 각성을 넘어 진화를 해 버리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어떻게든 출루를 해 줄 것 같은 박유성을 선봉장으로 삼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오진욱을 2번에 배치한 뒤.
힘과 정확도를 겸비한 장태수를 3번에 넣어 출루한 박유성을 홈으로 불러들인다.
설사 박유성이 부진하더라도 장태수가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장태수는 아직까지 신성 고등학교 벤치가 원하는 타격을 하지 못했다.
박유성이 루상에 나가 흔들 때는 3번 타자로서 실력을 뽐냈지만.
따악!
지금처럼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투수들의 공을 쫓아다니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