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9화
05. 질주 본능 (3)
“서울 중고를 상대로 4점차인 거 보니까 확실히 김 코치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 1번 녀석은 어때?”
“3타수 1안타입니다.”
“그냥 세명 전에서 잘 한 거였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단순히 기록지만으로 경기 내용을 판단한 최명룡 감독과 주연식 수석 코치는 박유성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하지만 박유성이 3타수 1안타에 그친 건 서울 중앙 고등학교 투수들의 수준 때문이었다.
“똥볼. 똥볼. 살다 살다 그런 똥볼은 처음 본다.”
“네. 3타수 1안타씨. 변명 잘 들었습니다.”
“그래. 유성아. 그리고 같은 야구 선수한테 똥볼이라니. 중앙고 애들이 들으면 얼마나 서운하겠어?”
“야, 됐어. 이번 덕우고 전 때 누가 더 안타 많이 치나 보자.”
“그 때도 못치면 또 똥볼 타령 할 거야?”
“그래. 유성아. 자신감 있는 건 좋은데 우리도 잘 해.”
“병욱아. 넌 제발 선풍기질 좀 작작 해 줄래? 너 이러다 올 해 삼진왕 먹게 생겼다.”
그렇게 주가 바뀐 토요일.
신성 고등학교와 덕우 고등학교의 경기가 펼쳐질 제 1 경기장으로 제법 많은 기자들이 찾아왔다.
“어이고. 나 기자.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무슨. 야구 기자가 경기 보러 왔지 놀러 왔을까?”
“그러니까. 뭐 볼 게 있다고 여길 와?”
“관우 보러 왔다. 됐냐?”
덕우 고등학교는 프로 야구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해 낸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혔다.
대대로 실력 있는 타자들을 계속 키워내서 타자 명가로도 불렸는데 최근에 이미지가 확 달라졌다.
타선이 강한 팀에서 강력한 에이스까지 보유한 완전체 팀으로.
그 중심에는 1학년 때부터 선발로 활약한 좌완 에이스, 이관우가 있었다.
“관우 못 봤지?”
“방금 왔는데 관우를 어떻게 봐?”
“그 녀석 키가 더 컸더라고.”
“뭐? 더 컸어?”
“본인 말로는 188cm라는데 내가 보기엔 190cm 이상이야.”
“가뜩이나 말상인 놈이 키가 더 컸으니 더 꼴보기 싫어 졌겠는데?”
“그런데 나 기자는 왜 그렇게 관우를 싫어해? 관우한테 진짜 돈이라도 뜯겼어?”
“돈은 무슨. 그 놈 말 하는 게 싸가지 없으니까 그렇지.”
“에이. 그건 좀 억지지. 솔직히 요즘 애들 다 싸가지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암튼 난 그 놈 별로야. 야구만 잘 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는 기자들과 잠시 잡담을 주고받은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 기자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부사수 공윤경 기자가 나영진 기자를 보며 물었다.
“우리 진짜 이관우 보러 온 거에요?”
“이관우는 무슨. 메이저 신문사 아니면 인터뷰도 안 하겠다는 놈을 뭐하러 보러 와?”
“그럼요?”
“있어 봐. 내 촉이 맞다면 괜찮은 녀석이 나올 것 같으니까.”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세팅한 뒤 나영진 기자는 3루 쪽 더그아웃 쪽을 바라봤다.
오늘 경기 초공을 맡은 신성 고등학교 선수들이 한 데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 등번호 7번이 눈에 들어왔다.
“현민이가 말한 게 저 녀석인가? 어디 얼마나 잘 하나 한 번 보자.”
챔피언십 시리즈 직전, 에이전트를 친삼촌으로 교체했던 송현민은 포스팅을 통해 4년 6천만 달러에 레인저스에 전격 입단했다.
국내 언론들은 1억 달러 계약도 충분히 가능했다며 아쉬워했지만.
정작 송현민은 계약 기간과 금액에 더없는 만족감을 보였다.
베이스볼 패치 나영진 기자도 송현민이 레인저스를 선택한 걸 잘 한 결정이라고 여겼다.
공격보다 수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메이저리그 스타일 상 검증되지 않은 아시아 내야수를 주전으로 쓰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게 사실.
송현민을 원하는 팀들 대다수가 외야수 전향을 고려하는 반면 송현민은 내야 수로 성공하고 싶어 한다는 걸 감안했을 때 주전 2루수가 은퇴한 레인저스보다 나은 팀은 없었다.
게다가 금액도 나쁘지 않았다.
송현민의 전 에이전트인 최상규가 6년에 1억 달러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떠들어대서 언론과 야구팬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긴 했지만 연평균으로 따지면 큰 차이도 없었다.
6년에 1억 달러는 연평균 1667만 달러.
4년에 6천만 달러는 연평균 1500만 달러.
1년에 167만 달러 차이를 크게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 송현민의 나이가 25세이고 6년 후에는 에이징 커브를 걱정해야 하는 30대에 접어드는 만큼 4년 계약 후 29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FA 대박을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송현민이 고등학생일 때부터 친분을 쌓아 왔던 나영진 기자는 송현민의 레인저스 입단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나영진 기자 - 야 인마,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준다면서? 암튼 레인저스 잘갔다. 가면 성공할 거야.
송현민과 친한 기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짝 앓는 소리를 섞어 봤는데.
레인저스 송 - 아, 형. 미안해요. 대신에 내가 괜찮은 녀석 소개시켜 줄게요.
나영진 기자 - 괜찮은 녀석?
레인저스 송 - 박유성이라고 신성고 3학년인데 얘 골 때려요. 나보다 훨씬 잘 하거든요? 그러니까 형이 미리 가서 침 발라놔요.
나영진 기자 - 뭐야 갑자기?
레인저스 송 - 제가 유성이한테 송현민 풀세트도 지원했거든요? 그러니까 형이 꼭 기사 써 주세요. 아셨죠?
“송현민 풀세트는 또 뭐야?”
이 때 까지만 해도 나영진 기자는 송현민이 아는 후배를 추천해 준 거라 여겼다.
게다가 고교 야구 단체 훈련 금지 기간이라 박유성이라는 이름을 잠시 잊고 지냈었는데 부사수인 공윤경 기자가 다시 상기를 시켜줬다.
“선배. 박유성이라고 알아요?”
“박유성? 글쎄. 이름이 낯설지가 않은데 걔는 왜?”
“신성 고등학교 3학년인데 2루 도루에 3루 도루까지 했는데요?”
“한 번에 다 훔쳤다고?”
“네. 초구에 2루를 훔치고 3구 째 3루까지 훔쳤다는데 발이 엄청 빠른가 봐요.”
뒤늦게 송현민의 메시지를 확인한 나영진 기자는 박유성의 경기 기록을 살폈다. 그리고
“뭐야, 이 녀석. 발만 빠른 줄 알았는데 홈런도 치잖아?”
어렵지 않게 박유성의 스타성을 캐치해 냈다.
알루미늄 배트 대신 나무 배트를 쓰면서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의 장타력은 반감됐다.
경기마다 서너 개씩 터지던 홈런은 한 경기에 하나 보기도 어려워졌고.
힘에 자신 있는 소수의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프로 입시를 위해 정확도 높은 타격 쪽으로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소수의 홈런 타자들도 드래프트 시장에서는 체격 좋은 대학 선수들에게 순위가 밀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 같은 시절에 홈런을 치는 1번 타자라. 타이거즈 팬들에게 돌 맞을 수도 있지만······ 이거 기종범 느낌이 살짝 나는데?”
나영진 기자는 대한민국 야구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기종범 같은 스타일의 타자가 나와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 대회는 물론이고 프로 야구에서도 만들어내는 한 점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나영진 기자가 송현민을 주목했던 이유도 송현민이 그 갈증을 해갈해 줄 거라 기대해서였다.
비록 송현민 역시 체격을 키워서 홈런 타자에 가깝게 스타일을 바꿨지만.
“저 녀석이 대신 한국 야구의 맥을 뚫어줄지도 모르지.”
방망이를 챙겨 드는 박유성을 보며 나영진 기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공윤경 기자가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 선배!”
“왜?”
“쟤가 걔에요. 지난번에 제가 말 했던 거 기억해요? 2루와 3루를 한꺼번에 훔친······.”
“알아. 나도.”
“정말요?”
“그래. 그리고 오늘 저 녀석 보러 온 거야.”
“에에?”
공윤경 기자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냥 아는 선수가 있어서 아는 척을 했을 뿐인데 설마하니 저 선수를 보러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선배가 말한 촉이 좋다는 선수가 박유성이었어요? 뭐예요? 원래 알던 선수였어요? 어떻게?”
“일단 있어 봐. 나도 좀 봐야 하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주세요. 무슨 촉이 어떻게 발동한 건데요? 네?”
“거 참. 있어 보라니까.”
나영진 기자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공윤경 기자는 흥분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그냥 좀 하는 선수인가보다 하고 넘겼겠지만.
나영진 기자는 고교 야구 경력 10년차에 송현민의 시대를 정확하게 예견한 고교 야구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공윤경 기자가 비위 맞추기 쉽지 않은 나영진 기자를 3년 째 따라다니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안목과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어디, 우리 선배님이 점찍은 선수가 얼마나 잘 하나 볼까요?”
“1절만 하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실까? 그렇게 자신 없으세요?”
“나도 아직은 잘 모른다니까.”
괜히 말을 꺼냈다 싶은 나영진 기자는 그라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운드에 선 이관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뭐야, 저 기자 아저씨. 내 경기는 절대 안 보러 올 거라더니 그새 마음이 바뀌었어?”
신성 고교야구 전용 야구장의 관중석은 총 1000석.
1루 쪽과 3루 쪽에 500석 씩 마련되어 있었다.
경기장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관중석이 지나치게 적은 게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지만 전국 대회 주요 경기는 목동 야구장에서 진행하다 보니 평소에 거의 비어 있을 관중석을 굳이 늘리지 않았다.
대신에 홈플레이트 뒤쪽에 기자석을 별도로 마련했는데.
마운드에 서면 그 기자석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민석아!”
이관우가 씩 웃으며 포수 최민석을 호출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기 기자석에 그 아저씨 왔다.”
“그 아저씨?”
“왜 지난번에 내가 나중에 인터뷰하자니까 지랄했던 아저씨 있잖아.”
“아, 그 기자님?”
최민석이 고개를 돌려 기자석을 보려 했다. 그러자 이관우가 다급히 최민석의 어깨를 감쌌다.
“보지 마 인마. 새끼가 눈치가 없어.”
“어, 미안.”
“암튼 존나 웃기지 않냐? 저 아저씨. 내 경기는 절대 안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그랬나?”
“X발. 그 때 너도 같이 있었잖아. 기억 안 나?”
“그, 글쎄. 좀 오래 된 일이라.”
일부러 얼버무렸지만 최민석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가을 쯤이었나.
나영진 기자가 이관우를 인터뷰하기 위해 덕우 고등학교로 직접 찾아온 적이 있었다.
최명룡 감독에게 사전 허락을 받고 진행한 인터뷰였지만.
당시 여자 친구와 심하게 싸워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관우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관우가 갑자기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인터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수가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죠.”
이 때 까지만 해도 잘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나영진 기자가 주차장 근처에서 여자 애들과 시시덕거리는 이관우와 마주치면서 일이 커졌다.
“이관우 선수. 여기서 뭐 해요?”
“누구세요?”
“오늘 인터뷰 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아아, 그거요? 보시다시피 제가 좀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자신의 팬 앞에서 있어 보이고 싶었던 이관우가 허세를 떨었고.
그런 태도에 화가 난 나영진 기자는 덕우 고등학교 관련 기사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영진 기자를 배웅하느라 모든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 본 최민석은 이 관우의 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팀의 주전 포수로서 투구 직전의 파트너를 빈정 상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부러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