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8화
05. 질주 본능 (2)
“따로 사인을 낼까요?”
“유성이는 놔두고 진욱이는 조금 더 집중하라고 해.”
“네. 신중하게 타격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무사 주자 3루라는 천금같은 득점 기회를 손에 넣었지만 신성 고등학교 벤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올 해 초 자체 청백전을 통해 검증한 박유성의 주루 플레이는 탈 고교급이었다.
다른 선수들처럼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경기 상황을 판단해 알아서 뛰고 알아서 멈춰 설 줄 알았다.
덕분에 오진욱도 마음이 편해졌다.
평소 작전 수행 능력이 좋다고 해도 3루 주자를 신경 써야 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은 천지차이였다.
‘욕심 부리지 말고 바깥 쪽 공만 노리자.’
오진욱은 방망이를 짧게 잡고 홈플레이트 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송찬기가 발을 풀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수비 위치를 확인했다.
박유성도 다시 3루 베이스로 돌아와 주변을 살폈다.
‘2루수와 유격수가 앞으로 들어 왔으니까 조심해야겠어.’
내야수들이 전진 수비하는 상황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강습 타구였다.
잘 맞은 타구가 2루수나 유격수의 정면으로 굴러가 버린다면 제 아무리 박유성이라 해도 홈을 파고 들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상기한 뒤 박유성은 다시 리드를 벌였다.
한 발. 또 한 발. 그리고 반 발.
투수가 견제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지 몸을 날려 돌아갈 수 있도록 3루 베이스 쪽으로 무게 중심을 두면서 최대한 홈 베이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3루수 고기영이 3루 베이스에 묶였고.
그런 3루수 고기영의 수비 공백을 커버하기 위해 유격수 이종윤이 3루 베이스 쪽으로 위치를 조정했다.
하지만 투수 송찬기는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눈치 싸움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저 새끼가 또······.’
곁눈질로 박유성의 위치를 체크한 송찬기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번개처럼 몸을 돌려 견제구를 던지고 싶었지만 벤치에서 타자에 집중하라는 사인이 나온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때 포수 홍영기가 바깥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또 볼을 던지라고?’
송찬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앞선 폭투로 볼카운트는 원 볼.
여기서 또 다시 볼을 던지면 볼 카운트가 투 볼로 몰리게 된다.
장태수도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오진욱을 상대로 어렵게 승부를 하라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에이스도 아니고 어렵게 선발 자리를 따낸 송찬기에게 주전 포수 홍영기의 사인을 거부할 용기는 없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 송찬기가 다시 한 번 곁눈질로 박유성의 위치를 체크했다.
그리고 아까와 거의 같은 위치라는 걸 확인한 뒤 퀵모션으로 공을 내던졌다.
후앗!
송찬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바깥쪽으로 빠르게 날아들자 오진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원 볼에서 세명 고등학교 배터리가 유인구를 던질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살짝 가라앉은 공이 방망이 끝부분에 걸리면서 타구가 유격수 오른 쪽으로 굴러갔다.
‘됐다!’
타구의 방향과 속도를 계산한 박유성은 그대로 가속을 붙여 홈플레이트를 향해 내달렸다.
“홈! 홈!”
타이밍 상 박유성을 잡기가 쉽지 않아 보였지만 송찬기는 목청껏 홈 송구를 외쳤고.
유격수 이종윤이 그 말에 홀려 홈을 선택하면서 승기는 신성 고등학교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세이프!”
여유롭게 레그 벤트 슬라이딩을 성공시킨 박유성은 홍영기가 보는 앞에서 양팔을 벌리며 크게 포효했고.
오진욱도 홈 승부가 벌어지는 틈에 2루까지 내달리며 추가 득점 기회를 만들어냈다.
정신없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 온 3번 타자 장태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면서 오진욱을 홈으로 불러들였고.
“크아아아!”
4번 타자 김병욱이 한복판으로 몰려 들어오는 송찬기의 빠른 공을 잡아 당겨 담장을 넘기면서 4대 0을 만들어냈다.
1회에만 6점을 뽑아 낸 신성 고등학교 타선은 2회와 3회 2점씩을 올리며 5회콜드 게임 기준인 10점을 채웠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신성한테 이렇게 질 거야?”
김준하 감독이 악을 써댄 끝에 4회 말, 세명 고등학교가 한 점을 추가했지만 이어지는 5회 초 공격에서
따악!
박유성이 우중간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때려내면서 점수 차이가 다시 10점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5회 말.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뒤늦게 몸이 풀린 에이스 손지원이 7,8,9번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서 경기를 끝냈다.
최종 스코어는 11대 1.
그렇게 2028년 고교 야구 주말 리그 전반기 첫 콜드 게임의 영예는 신성 고등 학교에 돌아갔다.
2
고교 야구 서울 지역 주말 리그는 신성 고교야구 전용 야구장에서 전 경기 진행될 예정이었다.
신성 그룹에서 11번째 구단을 창단하면서 아마추어 야구 발전을 위해 4개의 야구장이 네잎클로버처럼 붙은 고교야구 전용 야구장을 지어줬고.
덕분에 선수들도 양질의 경기장에서 안전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신성 고등학교와 세명 고등학교의 오전 경기가 끝나고.
그라운드 정리가 끝난 제 1 경기장으로 덕우 고등학교 선수들이 들어왔다.
“어디보자.”
덕우 고등학교 최명룡 감독은 느긋하게 경기장을 훑어 봤다.
보통 치열한 경기가 펼쳐지면 잔디가 많이 패이기 마련인데 새 것처럼 멀끔한 걸 보니까 오전 경기가 시시하게 끝난 것 같았다.
그 때 주연식 수석 코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감독님. 신성이 세명을 잡았답니다.”
“세명을? 어이구, 나 감독님 아주 신이 났겠구만.”
최명룡 감독이 피식 웃었다.
객관적인 전력 상 세명 고등학교에 비해 신성 고등학교가 열세인데 개막전을 잡았으니 나승균 감독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을 것 같았다.
“스코어는?”
“11대 1입니다.”
“11대······ 뭐?”
“10점 차 5회 콜드게임으로 잡아냈습니다.”
“제대로 알아 본 거야?”
순간 최명룡 감독의 눈이 똥그래졌다.
주말 리그에서 콜드 게임은 강팀과 약팀의 경기 때나 나오는 양상이었다.
신성 고등학교와 세명 고등학교의 전력은 냉정하게 따져 4.8대 5.2 정도.
3선발 로테이션을 준비했을 만큼 마운드가 탄탄한 세명 고등학교가 신성 고등 학교보다 조금 낫다는 느낌이고 그래서 승패가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지 콜드 게임, 그것도 5회에 경기가 끝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주연식 수석 코치가 경기 기록지를 내밀었다.
“이게 경기 내용입니다.”
“이리 줘 봐.”
최명룡 감독은 눈을 크게 뜨고 신성 고등학교의 클린업 성적부터 찾았다.
3번 타자 장태수가 홈런 포함 2안타에 3타점.
4번 타자 김병욱이 투런 홈런 하나.
그리고 2학년인 5번 타자 홍선우는 1안타에 타점이 없었다.
“뭐야? 어디서 점수를 뽑은 거야?”
“1번을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1번?”
최명룡 감독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별 것 없을 거라 여겼던 테이블 세터에서 무려 4타점을 합작했다.
특히나 1번 타자의 활약이 놀라웠다.
첫 타석에 안타를 치고 나가 도루 성공.
두 번째 타석 때 볼넷으로 나가 도루 성공.
세 번째 타석 때 볼넷.
마지막 타석 때 솔로 홈런.
홈런 포함 안타 2개에 100퍼센트 출루에 성공했고
추가로 도루 2개와 3득점, 1타점을 올렸다.
“얘 뭐야?”
“이 친구가 그 박유성입니다.”
“박유성?”
“태산 전에서······.”
“아, 그 김민철 감독 모가지 날렸다던 그 놈?”
“네. 솔직히 소문이 와전됐다고 생각했는데 잘 하긴 잘 하는 거 같습니다.”
“흠······. 그래?”
태산 고등학교 김민철 감독이 경질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박유성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태산 고등학교 측에서는 치부라 여기고 철저히 입단속을 했는데 쫓겨난 김민철 감독이 푸념을 하면서 말이 샌 것이다.
“박유성인지 뭔지 하는 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연습 경기 세부 데이터까지 챙겨보지 않았던 최명룡 감독은 김민철 감독이 김민철 감독했다고 여겼다.
“김민철이가 남 탓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걔는 현역 때도 그랬어. 자기가 잘못해서 죽어 놓고 코치 탓 했다고.”
그래서 박유성에 대한 이야기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이 놈이 잘 한단 말이지?”
기록지를 보니까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김재영 투수 코치가 다가왔다.
“감독님. 안 들어 가십니까?”
“들어가야지.”
“그런데 뭐 보십니까?”
“신성 전 데이터.”
“아, 그거요? 그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도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송찬기 나왔답니다.”
“송찬기? 송찬기가 누구야?”
“왜 작년에 저희하고 할 때 중간에 나왔다가 아웃 카운트 하나 못 잡고 울면서 내려갔던 녀석 있지 않습니까.”
“아! 그 덩치만 큰 좌완? 걔가 나왔어? 김인수는 어디다 팔아 먹고?”
“내일 성현하고 붙어서 내일로 돌린 모양입니다.”
“그럼 황진호는?”
주연식 수석 코치가 끼어들며 물었다.
작년부터 선발 기회를 잡은 김인수가 세명 고등학교 에이스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만 황진호도 그에 못지않았다.
“얘기 들어보니까 장태수를 잡으려고 송찬기를 낸 것 같습니다.”
“장태수?”
“신성에서 눈에 띠는 건 사실 장태수뿐이잖습니까.”
“그런데 신성에 좌타자가 많아? 기록지 보면 세 명 뿐인데?”
“이제 막 경기 뛰는 애들은 좌타자 공 못 칩니다. 아시잖아요.”
야구 이론 상 타자는 같은 손 투수의 공보다 반대 손 투수의 공을 공략하는 게 편하다.
공이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해 최대한 오래 공을 지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레벨에서 왼손 투수의 공을 잘 치는 오른손 타자는 손에 꼽혔다.
왼손 투수 자체를 상대한 경험 부족으로 타격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프로 타자들 중에서도 좌투수 공 못 치는 오른손 타자들 많지.”
최명룡 감독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로 자신 또한 현역 시절 좌투수가 던지는 바깥 쪽 공에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럼 점수가 왜 이렇게 난 거야?”
“상성만 믿은 결과 아니겠습니까. 좌완도 좌완 나름이죠. 우리 애들 정도나되면 모를까 송찬기 가지고 되겠습니까?”
김재영 투수 코치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고교 명문 덕우 고등학교에 온 이후로 프로에서도 탐 낼 만한 좌완 투수들을 여럿 키워냈다 보니 송찬기 정도는 성에도 차지 않았다.
그 말에 약간의 모순이 있었지만 최명룡 감독과 주연식 수석 코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당장 경기가 코앞인데 라이벌 선인 고등학교도 아닌 신성 고등학교 경기 결과를 가지고 신경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다음 날.
신성 고등학교가 지구 최약체로 꼽히는 서울 중앙 고등학교를 7대 3으로 물리 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최명룡 감독은 피식 웃었다.
“뭘 중고 잡은 걸로 호들갑이야? 중고는 잡아야지. 중고한테 지면 나 감독도 목이 잘릴 걸?”
서울 상업 고등학교와 서울 중앙 고등학교 야구부는 고교 야구 선수들 사이에서 취미반이라 평가받는 팀이었다.
성적보다는 야구부를 운영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실력 있는 중학교 선수들은 절대 지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