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화
05. 질주 본능 (1)
1
“신성에 우명, 성현, 덕우, 서울중, 서울상, 선인이라. 이거 완전 꿀인데?”
2028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서울 A지구 편성표를 확인한 세명 고등학교 김준하감독이 호들갑을 떨었다.
서울 지역에서 대한 야구 협회에 등록된 고등학교 야구팀은 총 24개.
이들 중 주말리그 왕중왕 격인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에 출전할 수 있는 팀은 절반인 12개 학교였다.
50퍼센트의 확률이니 왕중왕 전에 진출하는 게 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프로 야구도 12개 구단 중에 6개 구단이 포스트 시즌을 치르고.
포스트 시즌이 확대된 메이저리그는 30개 팀들 중에 16개 팀이 가을 잔치에 초대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프로 야구는 물론이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중하위권 팀의 최대 목표는 다름 아닌 포스트 시즌 진출.
마찬가지로 김준하 감독도 세명 고등학교의 올 해 목표를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8강으로 잡았다.
다른 전국 대회야 대진운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주말 리그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와 청룡기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16강 이상도 바라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왕중왕전 진출의 첫 관문인 지구 편성에 촉각을 곤두세웠었는데.
“이거 괜히 잠을 설쳤잖아?”
김준하 감독은 다시 한 번 편성표를 살폈다.
A지구에서 4강 진출이 확정적인 건 강호 덕우 고등학교와 선인 고등학교.
서울 중앙 고등학교와 서울 상업 고등학교는 지방 학교들이 만만하게 볼 정도이니 빼고 나면 결국 세명 고등학교와 신성 고등학교, 우명 고등학교, 성현고등학교가 남은 두 자리의 티켓을 두고 다투게 될 것 같았다.
“그나마 성현이 좀 빡세고. 우명하고 신성은 할 만 하니까 뭐 우리가 편하게 올라가겠네.”
사흘 후.
경기 일정표를 받은 김준하 감독은 송영래 수석 코치와 작전을 짰다.
“첫 주에 신성하고 성현이네요.”
“그렇다면 인수는 성현고 전으로 돌리는 게 낫겠지?”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성현을 잡고 가야 편하니까요.”
김준하 감독과 송영래 수석 코치는 일요일에 있을 성현 고등학교전에 집중했다.
성현 고등학교는 첫 날에 라이벌 우명 고등학교를 만나는 만큼 에이스 카드를 꺼내들 터.
신성 고등학교에 이어 에이스가 빠진 성현 고등학교까지 잡아낸다면 주말 리그 전반기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신성 전에는 누굴 올려야 하나? 진호?”
“신성에서 경계해야 할 타자는 장태수 하나입니다.”
“장태수가 좌타자였지?”
“네. 그리고 요즘 잘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박유성도 좌타자고요.”
“그럼 찬기로 가자고.”
신성 고등학교를 잡아내라는 특명을 받은 3선발 송찬기는 너무 설레서 잠까지 설쳤다.
“신성은 태수 빼고는 볼 것도 없으니까 태수만 조심하면······ 크으, 인수하고 진호보다 먼저 첫 승리를 따낼 수 있어!”
하지만 막상 경기는 김준하 감독과 송찬기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회 초.
따악!
선두 타자로 나온 박유성이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를 가볍게 밀어쳐 안타를 때려낸 것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못 뛰어! 타자에 집중해!”
원 볼 투 스트라이크라는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안타를 얻어맞은 게 짜증났지만.
송찬기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프로에서 발이 빠르기로 소문난 선수들도 좌투수 앞에서 함부로 스타트를 끊지는 못하는 법.
‘퀵모션으로 던지면 제구 잡기 편하니까.’
송찬기의 시선이 다시 박유성에게 향했다.
이번 시즌 첫 안타를 치고 나갔으니 까불어댈 줄 알았는데 박유성은 1루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에 베이스에 조용히 붙어 있었다.
“뛸 생각이 없는 건가? 하긴. 내 앞에서 뛰면 바로 뒤지는 거지.”
괜히 기분이 좋아진 송찬기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박유성이 1루에 붙어 있어 준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은 후 속 타자의 타구가 2루 정면으로 가는 것.
수비 좋은 키스톤 콤비들이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 준다면 마음 편히 장태수에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들뜬 숨을 내쉬며 송찬기가 투구판을 밟았다.
순간 박유성이 한 발 크게 옆으로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정도 리드로는 절대 2루를 훔치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송찬기가 오른 무릎을 들어 올린 순간,
타다다닥!
박유성이 곧장 2루로 내달렸다.
‘X발. 뭐야?’
막 스트라이드를 하려던 송찬기는 당황했다.
설마하니 초구에 리드도 없이 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주자는 잊어버리고 타자에게 집중을 해야겠지만 이제 3학년이 된 고등학교 선수에게 그 정도 마인트 컨트롤이 가능할 리 없었다.
후앗!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일찍 놓아버린 공은 그대로 포수 머리 위로 솟구쳤고.
“돌아! 돌아!”
박유성은 가볍게 2루를 돌아 3루까지 파고들었다.
“잘 했어, 유성아.”
“나이스 박유성!”
3루 쪽 더그아웃이 왁자지껄해졌지만 박유성은 가볍게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3루 베이스 코치로 나간 신기남 주루 코치가 다가와 물었다.
“왜? 어디 아파?”
“아뇨.”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3루까지 훔칠 수 있었어요.”
“······뭐?”
“저 공 안 빠졌으면 3루까지 훔칠 수 있었다고요.”
순간 신기남 주루 코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쓸 데 없이 공이 빠져서 3루 도루 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다른 선수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뒤통수를 한 대 때렸겠지만.
‘유성이라면 뭐······ 충분했겠지.’
보통 1루에서 2루를 훔치는 것 보다 2루에서 3루로 도루하는 게 더 어렵다.
기본적으로 포수의 송구 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인데 0.1초 차이로 세이프와 아웃이 오가는 도루의 세계에서는 상당히 큰 변수로 작용했다.
프로 야구에서도 3루 도루는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것도 틈을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루사가 나왔을 때의 리스크도 더 컸다.
1루 주자가 2루를 파고들다 죽는 건 스코어링 포지션을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고 포장해 줄 수 있지만.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 있는 2루 주자가 3루를 넘보다 횡사하는 건 팬들에게 본 헤드 플레이로 찍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박유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디서 무슨 기술을 배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박유성의 주루 플레이는 이미 프로 수준이었다.
프로 레벨에서도 내로라하는 대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거라는 게 신기남 주루 코치의 판단이었다.
널리 알려진 도루의 3요소는 3S.
스피드(Speed)와 스킬(Skill), 그리고 슬라이딩(Sliding)이다.
이 중 스피드는 타고나야 하는 영역이다.
태생적으로 발이 느린 선수는 노력한다고 해도 도루 성공률을 높이기 어려웠다.
가끔 덩치 큰 선수들이 투수의 허를 찔러 2루를 훔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쇼에 불과했다.
실제 도루는 발 빠른 선수들의 영역.
거기에 슬라이딩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고 봤을 때 남은 건 스킬이었다.
혹자는 스타트나 센스로 대체하는 이 스킬 능력에 따라 대도가 되느냐 그저 발만 빠른 선수로 남느냐가 갈리는데 박유성의 스킬은 현역 시절 좀 뛰었던 신기남 주루 코치를 아득히 뛰어 넘은 상태였다.
‘가르칠 게 없어. 타이밍을 캐치하는 건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정도고.’
볼 카운트와 경기 상황. 상대 투수의 스타일 등을 고려한 판단 능력까지는 어떻게든 심어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방금 전 박유성처럼 동물적인 감각으로 치고 나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남 주루 코치는 알지 못했다.
박유성 또한 4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루 스킬을 키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자 박유성이 적극적으로 리드 폭을 넓혔다.
스윽. 스윽.
그러다 송찬기가 투구 판에서 발을 빼자 냉큼 3루 베이스로 붙어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명 고등학교 김준하 감독의 입에서 짜증이 터져 나왔다.
“저 새끼 뭐야?”
“저 녀석이 박유성입니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어디서 저런 게 튀어 나온 거냐고!”
김준하 감독도 짧게나마 프로 생활을 했다. 그래서 박유성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사 3루 상황에서 저렇게 크게 리드를 벌릴 고등학교 선수는 없었다.
더그아웃에서 그린 라이트를 줬다 하더라도 태그 업 플레이까지 고려해 리드를 잡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박유성은 언제든 홈을 파고들 수 있다며 배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 전에 폭투로 원 베이스를 헌납해 신경이 날카로워진 배터리를 상대로 말이다.
“멀뚱히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네?”
“견제라도 하라고!”
김준하 감독 옆에 있다가 괜히 불똥이 튄 홍해룡 타격 코치가 송영래 수석 코치를 바라봤다.
그러자 송영래 수석 코치가 바짝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진정하십시오. 그러다 공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대로 보기만 하라고?”
“감독님. 어쩌면 신성의 작전일지도 모릅니다.”
“작전?”
“3루 주자를 신경 쓰다 보면 유인구를 던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면 진루타가 나올 가능성이 높고요.”
“그러니까 저 너구리같은 양반이 우리가 흥분하길 바라고 작전을 냈다는 거야?”
“나 감독 머리에서 나왔겠습니까? 김석률 코치 작품이겠죠.”
“아무튼 이래서 프로 짬 좀 있는 코치들이 싫다니까. 고교 야구는 고교 야구다워야지. 열정! 패기! 아니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암튼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일단 바깥 쪽 체인지업으로 승부를 걸겠습니다. 2루수와 유격수를 당기면 저 건방진 녀석을 홈에서 잡아낼 수 있습니다.”
송영래 수석 코치는 현역 시절 벤치 멤버로 주로 활약했다.
대타는 물론 대수비에 대주자까지.
팀이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건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박유성의 심리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 MVP라도 노리는 모양인데 그 조급함이 네 녀석 발목을 잡을 거다.’
본래 적극적인 것과 지나친 건 한 끗 차이였다.
잘 풀리면 적극적이었다 칭찬받지만 안 풀리면 지나쳤다고 욕을 먹기 마련이었다.
현재 박유성의 머릿속은 홈으로 파고들 생각으로 가득할 터.
이런 때에 야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를 이끌어낸다면 3루 주자를 루상에서 지워내는 건 물론이고 경기 분위기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송영래 수석 코치를 대신해 조재열 배터리 코치가 사인을 냈다.
그러자 신성 고등학교 벤치에서도 곧바로 반응을 했다.
“수석 코치님. 세명에서 사인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인인 거 같아?”
“아무래도 유성이가 신경 쓰이지 않겠습니까?”
“흠······.”
김석률 수석 코치가 선글라스를 낀 눈으로 그라운드를 살폈다.
그 때 세명 고등학교 2루수 장영재와 유격수 이종윤이 앞 쪽으로 걸어 나왔다.
“유성이를 잡을 생각인 거로군.”
“유성이한테 작전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오해해 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김석률 수석 코치가 피식 웃었다. 박유성을 맘껏 뛰어놀게 해서 경기 초반 분위기를 끌어 올 계획이었는데 상대가 알아서 속아 넘어가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