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5화
04. 내 말 들어요 (4)
최윤석 타격 코치는 열과 성을 다해 송광철을 가르쳤고.
송광철의 2군 성적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그 때 2군 감독이 나한테 뭐라고 하더라. 가능성 있는 애들을 키워야지 신고 선수 데려다가 뭐 하냐고.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어. 무조건 1군 올리겠다고 마음 먹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1군 콜이 떨어졌다.”
“오오, 정말요?”
“그런데 광철이 놈이 교통사고를 당했어.”
“교통······ 사고요?”
“1군 올라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 녀석 치킨 사 주겠다고 나갔다가 음주운전 차에 치였어.”
“아······.”
순간 박유성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하니 그 이야기의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송현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삼촌 멀쩡해.”
“안 다치신 거예요?”
“다치긴 했지. 그런데 네가 걱정하는 것만큼은 아니었어.”
“야 인마. 그렇게 말하면 얘기가 이상해지잖아.”
“차에 치었다고 말한 건 형이거든요?”
보다 못한 최윤석 타격 코치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차와 충돌하는 순간 몸을 피하면서 중상은 면했는데 그 과정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야구를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아깝네요.”
“아깝긴 했는데 현실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현민이 정도의 재능은 아니었거든.”
“에이, 저만한 재능이 어디 쉽게 나오겠어요?”
“쉽게 나오는데? 네 옆에서 고기 주워먹고 있네.”
“그건 인정.”
“솔직히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1군에서도 한 번 올려다가 테스트해 보겠다는 심산이었어. 1군에 올라갔더라도 다시 2군으로 내려보냈을 거고.”
“삼촌도 그걸 알고 있었어. 그냥 은퇴하기 전에 1군 무대 한 번 밟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하필 무릎을 다치니까 그냥 더 늦기 전에 은퇴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지.”
“원래 광철이가 무릎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내가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는 타격 폼으로 수정을 해 줬고.”
“암튼 사고 당한 이후에도 형이 삼촌 구단 직원으로 취직시켜줘서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그럼 삼촌 분은 베어스 프런트에요?”
“이 녀석 프로 올라가고 나서 그만 뒀어.”
“설마 현민이 형 트윈스에 가서요?”
“그런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송현민이 메이저리그와 프로 야구를 놓고 고민하던 무렵 대다수 언론은 메이 저리그 직행이 유력하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송현민은 나쁘지 않았던 메이저리그 오퍼들을 전부 거절하고 드래프트에 참가, 트윈스의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에이, 그건 아니죠. 베어스가 우선 지명을 안 한 거잖아요?”
“그야 네가 메이저리그 갈 줄 알았으니까 안 했지.”
“그건 언론들이 떠들어 댄 거고요. 저는 바로 메이저리그에 갈 생각이 없었어요.”
“말 나온 김에 물어 보자. 왜?”
“왜긴 왜에요. 돈 때문이죠. 그 때 제일 많이 부른 게 얼마였더라? 200만 달러였나? 거기서 차포 떼면 남는 것도 없는데 그걸로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요?”
최상규는 생각 없이 산다고 잔소리를 하지만.
송현민은 나름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놈이 부모님한테 10억짜리 집을 해 드려?”
“10억 아니고 9억 2천이요. 그리고 저 외아들이거든요?”
“어차피 물려받을 돈이다 이거냐?”
“부모님도 제 뒷바라지 하신 보상은 받으셔야죠. 그래야 나도 오프 시즌 때 집에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고요.”
“그래. 너 잘났다 이놈아.”
불판이 두 차례 바뀔 때 까지 최윤석 타격 코치와 송현민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런데 너 그 삐돌이한테 전화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삐돌이요?”
“에이전트.”
“아, 그 삐돌이? 내버려 둬요. 삐치라면 삐치라지.”
“너 그러다 계약 파기하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파기할까 고민 중이에요.”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그냥 좀 그랬어요.”
송현민이 물 잔을 들어 술처럼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였다면 속이 좀 풀렸을 텐데.
미성년자인 후배들 앞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게 내심 아쉽기만 했다.
“뭐가 좀 잘 안 맞았던 거야?”
“생각해 보면 너무 성급하게 계약했던 거 같아요. 삼촌 말 좀 들을 걸.”
“광철이?”
“삼촌이 조금 더 알아보고 하라고 했거든요. 급할 거 없다고. 그런데 상규 형이 워낙에 달변이라 못 버티겠더라고요. 마지막 시즌이라 일찍 계약하고 시즌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계약 조건도 좋았고요.”
“그럼 조금 더 지켜 봐. 너 이제 곧 메이저리그 가야 하는데 에이전트 바꿨다가 잘못 되면 어쩌려고?”
“그게 문제에요. 포스트 시즌 끝나고 나면 이리저리 인사 다니느라 정신 없을 텐데 참······.”
송현민이 쓰게 웃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감정적으로 최상규를 해고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 때 잠자코 듣고 있던 박유성이 입을 열었다.
“그 삼촌이라는 분은 어때요?”
“삼촌?”
“베어스 프런트셨잖아요. 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고. 삼촌이 도와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아, 그러네. 광철이 영어 잘 해. 용병 스카우트 일도 잠깐 했거든.”
최윤석 타격 코치까지 거들자 송현민도 귀가 팔랑거렸다.
“삼촌은 좀 깐깐한데.”
“깐깐하니까 좋은 거지. 그리고 기왕 잔소리 듣는 거면 생판 남보다 삼촌이 낫지 않겠냐?”
“그건 그렇긴 한데······.”
“한 번 얘기나 꺼내 봐. 혹시 아냐? 광철이가 더 괜찮은 에이전트를 소개시켜 줄지도.”
밤새 고민을 한 송현민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송광철을 찾았다. 그리고 새 에이전트를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송광철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내가 뭐랬어 이놈아. 그 놈은 좀 아닌 거 같다고 했지?”
“삼촌은 다 별로라고 하잖아요.”
“이 놈이 삼촌을 인성파탄자로 만드네? 내가 사이코패스냐?”
“약간?”
“이리 와. 오랜만에 좀 맞자.”
자신보다 덩치가 커진 조카를 붙잡고 한참을 낑낑거리던 송광철은 자신의 방에서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네 데이터지.”
“뭐가 이렇게 많아요?”
“별 거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이거 들고 아무 에이전트나 찾아가. 최소한 최상규 그 놈보다는 나을 거니까.”
“그런데 삼촌은 왜 그렇게 상규 형을 싫어해요?”
“내가 이제야 말 하는데 그 놈 너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
“그게 무슨 소리에요?”
“너 시즌 기록을 아예 몰라. 내가 슬쩍 물어봤는데 대충 훑어 보고 왔나보더라.”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긴! 메이저리그 대형 에이전시에서 팀장 씩이나 했다는 놈이 그 따위로 일을 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잘리지.”
“잘려요? 창규 형이?”
“내가 따로 알아봤는데 해고됐다더라. 사유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하는데 암튼뭔가 뒤가 구렸어.”
“아니 그 얘기를 왜 지금 해요?”
“너 시즌 중에 정신없었잖아. 그래서 말 안했지. 그리고 홈런 두 개만 더 까지 그게 뭐냐?”
“아 진짜아! 그 얘길 또 왜 해요?”
“속상하니까 그러지. 속상하니까! 임대호 이후로 타격 6관왕 나오나 했는데 에라이. 시즌 막판에 선풍기질 할 때 알아봤다.”
시즌 종료를 한 달 앞둔 시점까지 송현민은 도루를 제외한 모든 타이틀을 독식했다.
타율과 최다안타, 출루율은 1위가 확정적이었고.
타점과 득점, 홈런은 2위를 근소하게 따돌리고 있었다.
심지어 도루도 1위와 7개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타격 8관왕이 나오는 게 아니냐는 기대까지 나왔는데 송현민이 홈런에 욕심을 부리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차라리 타점을 노렸어야지. 홈런을 노린다고 넘어 가냐?”
“투수들이 자꾸 볼넷을 주는데 어떻게 해요?”
“후속 타자들을 믿고 참았어야지!”
“누굴 믿으라고요?”
“아, 참. 너 다음이 프랑코였지?”
트윈스에서 우승을 위해 거금을 주고 데려 온 앤드류 프랑코는 역대급 사기 매물이었다.
시즌 초반 송현민과 홈런 쇼를 선보일 때 까지만 해도 최고의 영입처럼 보였지만.
5월 중순에 발목 부상으로 이탈해 7월 외국인 선수 교체 시한을 넘기더니 복귀 이후 선풍기질만 해대며 구단과 팬들의 마음을 꽁꽁 얼려버렸다.
“프랑코가 밥값만 했으면 나도 그렇게까진 안 했죠. 그런데 나 거르고 프랑코병살치는 게 밈이 될 정도였는데 어떻게 가만있어요?”
핑계 같겠지만 당시 1위 수성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트윈스는 송현민에 대한 의존이 컸다.
송현민도 트윈스의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을 위해 평소보다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했던 건데 거기서부터 밸런스가 꼬여버렸다.
유인구에 방망이가 나가니 송현민 특유의 받쳐 놓고 때리는 타격이 줄어들었고.
양질의 타구가 줄어들면서 홈런이 감소, 덩달아 타점과 득점 저하로 이어졌다.
“진짜 한 끗 차이로 6관왕 놓친 게 아까워서 그렇지.”
송광철이 혀를 찼다. 만약에 자신이 트윈스 코치로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송현민을 어르고 달랬을 텐데.
5개월 간 잘하다가 마지막 한 달 삐끗해서 6관왕을 놓쳤다고 생각하니까 제 일처럼 속이 상했다.
“그런데 삼촌. 언제까지 집에서 놀 거예요?”
“이 놈이. 너희 숙모도 안하는 잔소리 하러 왔냐?”
“얘기 들어보니까 아카데미도 그만 뒀다면서요?”
“너 가르치다가 다시 코찔이들 가르치려니까 못 하겠더라.”
“저를 기준으로 삼으면 어떻게 해요? 역대급 재능인데.”
“넌 네 입으로 역대급 재능이라고 나불거리고 싶냐?”
“그 얘긴 삼촌이 먼저 했거든요?”
“어휴. 그래.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야.”
베어스에서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 송현민이 트윈스에 입단한 이후.
송광철은 미련 없이 베어스를 나왔다.
주변에서는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며 말렸지만.
베어스 단장을 비롯해 모기업 임원들에게까지 송현민은 메이저리그에 갈 거라고 큰소리를 쳐 놓았던 터라 양심 상 버틸 수가 없었다.
“다른 구단에서는 연락 안 왔어요?”
“안 오긴. 왔지. 근데 안 한다고 했어.”
“왜요?”
“내 자리가 없거든. 난 돌아다니는 게 편하지 책상 지키고 있는 건 못 해.”
“와, 삼촌은 진짜 배가 불렀네요.”
“이 놈이? 그게 지금 업어 키운 삼촌한테 할 소리냐?”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죠. 솔직히 나 말고 삼촌 챙기는 조카가 누가 있어요?”
“그야······.”
송광철이 입을 다물었다. 조카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술이라도 마셔 주는 건 송현민이 유일했다.
“너 가 인마.”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뭘 가래요?”
“그럼 빨리 말하고 가. 내가 진짜······.”
“괜히 예뻐했다고요?”
“예뻐한 건 아냐?”
“아니까 이렇게 찾아 왔죠. 그러지 말고 삼촌이 저 좀 봐 주세요.”
“보긴 뭘 봐줘? 개인 코치라도 해 달라고?”
“개인 코치도 개인 코치지만 저 에이전트 없잖아요.”
“그래서······ 나더러 또 네 똥 기저귀 갈라고?”
“무슨 똥 기저귀까지 가요.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몇 번 갈지도 않았던데.”
“암튼 네 뒤치다꺼리 하란 소리 아냐. 싫다. 이놈아. 그게 얼마나 귀찮은데.”
송광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송현민을 따라 미국으로 갈까 고민했던 건 사실이지만 에이전트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송현민은 송광철과 함께 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제가 수수료 많이 챙겨 드릴 테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아는 동생이 저더러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사람 볼 줄 모른데요. 어디 가서 사기당할 거래요.”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봤네. 평생 야구만 하던 놈이 뭘 알겠냐.”
“그러니까 삼촌이 좀 도와주세요. 이제 와서 마음에 드는 에이전트를 어떻게 구해요?”
“그 말은 임시로 맡아달라는 거야?”
“그건 삼촌 하는거 봐서요. 삼촌이 잘 하시면 계속 가는 거고 아니면 저도 바꿔야죠.”
“흠······.”
잠시 고심하던 송광철이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하는 걸 보니까 정에 이끌린 판단만은 아닌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너 메이저리그 갈 때 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
“오케이. 근데 삼촌 진짜 영어 잘 해요?”
“몰랐냐? 삼촌 네이티브 스피커야.”
“진짜요?”
“아이 라이크 투 오더 샐러드 퍼스트, 벗 노 어니언 노 발사 비니거. 됐냐?”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멘트인데? 암튼 여기 관련 서류니까 삼촌이 다 알아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