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4화
04. 내 말 들어요 (3)
“왜요?”
“너 아까 혜성이하고 무슨 얘기 했어?”
“아까? 가방 좀 가져다달라고 했는데요?”
“그게 다야?”
“뭔데 그래요?”
“혜성이 저 자식, 계약 안 한단다.”
“네?”
“계약 연장 안 한다고!”
“정말이요? 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암튼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내가 절대 가만 안 둔다.”
최상규가 필요 이상으로 씩씩거리자 송현민이 웃는 얼굴로 달랬다.
“계약 안 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해요?”
스포츠 업계에서 에이전트 계약 파기는 흔한 일이었다.
최상규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겠지만 최상규도 이 세상 모든 스포츠선수들을 전부 관리하는 건 불가능한 만큼 보낼 선수는 좋게 보내주는 게 나아 보였다.
하지만 최상규는 주제도 모르고 파기를 통보한 김혜성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저 새끼 저대로 놔 두면 내 꼴이 뭐가 되겠어? 그리고 내 꼴이 우스워져 봐.
그럼 너도 똑같아지는 거야.”
“그런가?”
“어휴. 너도 진짜 답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걸 이렇게 몰라서 어떻게 하냐?”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송현민은 멋쩍게 웃어 넘겼다.
여기서 더 말 해 봐야 불 난 집에 부채질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유성이 녀석은 상규 형 성격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송현민이 고개를 돌려 박유성을 바라봤다.
급한 대로 가지고 있던 글러브를 하나 챙겨 줬는데 박유성이 벌써부터 손질을 하고 있었다.
“너 상규 형하고 계약 할 거야?”
“아뇨. 안 할 건데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직 1년 남았는데 서두를 필요 없지.”
“형. 저는 좋은 에이전트라면 그 누구보다 이해심이 커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
“그런데 저 아저씨는 화가 많던데요? 저도 한 성격해서 저런 아저씨하고는 안맞아요. 왠지 나중에 돈 맡기면 코인에 다 때려 박을 듯?”
“코인?”
“그냥 그렇다고요.”
불현 듯 떠오른 대화를 곱씹으며 송현민이 피식 웃었다.
‘하긴. 아까 혜성이를 마운드에서 끌어 내렸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최상규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참, 현민아. 너 이번에 계약금 받으면 뭐 할 거야?”
“계약금이요?”
“그래. 메이저리그 가면 계약금 두둑하게 들어 올 건데 그거 어디에 쓸지 정했어?”
“그, 글쎄요?”
송현민은 살짝 당황했다.
지금 이런 타이밍에 계약금 이야기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최상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글쎄요는 뭐가 글쎄요야. 계약금이 한 두푼도 아니고 그거 또 가족들 다 퍼줄 거야?”
“형. 그건······.”
“알아. 너 효자인 것도 알고 부모님께 보답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는데 메이 저리그 계약금은 금액 자체가 달라. 네가 지금까지 벌었던 돈에 동그라미 하나 이상은 무조건 붙는다고.”
프로 5년차인 송현민의 연봉은 6억 원.
기정후와 감백호가 받았던 역대 5년차 최고 금액을 5천만 원 경신했다.
하지만 항간의 소문처럼 송현민의 통장에 수십억 대의 돈이 쌓여 있는 건 아니었다.
트윈스에 2차 1라운드에 지명되며 받은 계약금 3억원에 1년차부터 5년차까지의 연봉을 합산해 봐야 15억 6천만 원이고.
기본적인 지출에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비해 부모님께 새 집과 차를 사드리면서 대부분을 쓴 상태였다.
“내가 지난번에 말 했지? 살다 살다 너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1억도 없는 거 처음 봤다고.”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거죠. 저 아직 젊잖아요.”
“그렇게 방심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애들이 한 트럭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계약금은 형한테 맡겨. 내가 책임지고 불려 줄 테니까.”
최상규는 송현민의 부모를 믿지 않았다.
자고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송현민이 고생하며 번 돈으로 송현민의 부모가 떵떵거리며 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송현민의 통장에 재워두는 것도 바보 짓.
‘급하게 계약한다고 수수료도 깎았으니까 나도 돈 좀 벌어야지.’
최상규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송현민을 바라봤다. 그러자 송현민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왜요? 어디 코인이라도 하게요?”
이렇게 말 하면 최상규가 무슨 코인이냐며 발끈할 줄 알았건만.
“오오, 너도 좀 아는구나?”
“······?”
“돈 불리는 데 코인만한 게 없어. 그렇지 않아도 투자하라고 여기저기서 연락오거든?”
“형. 코인은 좀······.”
“형을 믿어 인마. 내가 설마 네 돈 떼어먹겠냐? 내가 최소한 은행 이자보다는 더 늘려 놓을 테니까 이번에 계약금 받으면 나한테 맡겨. 알았지?”
최상규는 말이 통했다며 웃어댔지만.
송현민은 차마 따라 웃지 못했다.
‘뭐야? 진짜 코인을 할 생각이었어?’
평생 자산 관리라고는 저축밖에 해 본 적이 없는 송현민에게 코인은 도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5년 간 고생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을 가지고 멋대로 코인에 투자하겠다니.
‘내가 이 형을 믿어도 되는 거야?’
송현민은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메이저리그 대형 에이전시 팀장 출신이라는 말에 현혹되어서 인간 자체를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 때 최윤석 타격 코치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현민아. 괜찮으면 밥 한 끼 하고 갈래?”
본래 일정은 학교에 얼굴을 비추고 간단한 사진 촬영만 하는 거였지만.
최윤석 타격 코치도 송현민을 이대로 보내기가 미안했다.
그러자 최상규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기요. 최 코치님.”
“네?”
“아까부터 정말 너무하시네. 우리 현민이가 무슨 야구 동호회 선수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적당히 좀 하세요. 모교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 줬으면 됐지 무슨 밥을 먹습니까?”
최윤석 타격 코치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러다 밥이 술이 되고 술이 친목질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였다.
포스트 시즌이 끝나면 송현민은 곧바로 포스팅을 신청할 터.
그 전까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바로 에이전트의 임무였다.
하지만 콩깍지가 한 꺼풀 벗겨진 송현민은 더 이상 최상규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형. 됐으니까 거기까지만 해요.”
“되긴 뭐가 돼! 네가 이러니까······.”
“됐다고요. 그냥 밥 한 끼 가지고 왜 이래요?”
“······뭐?”
“그리고 형도 유성이 보러 온 거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야! 송현민!”
최상규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송현민은 듣지 않았다.
“형. 뭐 먹어요?”
“응? 뭐······ 삼겹살이나 돼지 갈비?”
“그러지 말고 소고기 먹어요. 내가 쏠게요.”
“소고기? 야 인마, 쟤들 다 먹이면······.”
“저 그 정도 돈은 있어요. 그리고 그 정도는 해야 저도 면이 살죠. 천하의 송현민이 삼겹살 얻어먹고 갔다는 소리 들어야겠어요?”
송현민의 말에 최윤석 타격 코치가 최상규의 눈치를 봤고.
혼자 씩씩거리던 최상규는 마음대로 하라며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야. 너 이래도 괜찮은 거야?”
“이래도 괜찮은 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죠.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걱정 마요. 메이저리그는 내 실력으로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
송현민의 주도 하에 회식 장소는 소고기 집으로 변경됐다.
“얘들아.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나 조만간에 메이저리그 가는 거 알지?
가서 열심히 할 테니까 너희도 응원 많이 해 줘라.”
“넵!”
“자! 눈치 보지 말고 맘껏 시켜!”
“네에엡!”
송현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주문이 쏟아졌고.
“그냥 일단 고기 다 썰어 놔요. 오늘 아주 거덜 나게 생겼으니까.”
요즘 따라 장사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던 사장은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신성 고등학교 코치들도 눈치껏 나승균 감독을 커버했다.
“송 선수. 이리 와. 내 술 한잔 받아.”
“어이구 감독님. 송현민 선수 몸 관리 해야죠.”
“맞습니다. 괜히 이런데서 술 마시다가 소문 이상하게 나면 몸 값 떨어집니다.”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한 잔 주십시오.”
“송 선수가 괜찮다잖아. 다들 왜 이래?”
“감독님. 예의상 한 말이죠. 어른이 준다는데 어떻게 안 받습니까?”
“이럴 땐 감독님이 송현민 선수 배려해 주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감독님. 송현민 선수는 술잔도 받지 마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코치들의 합동 디펜스 덕분에 나승균 감독을 피하게 된 송현민은 최윤석 타격코치와 함께 따로 테이블을 잡았다.
그리고 빈자리에 박유성을 불렀다.
“주세요. 제가 고기 구울게요.”
자리에 앉은 박유성이 눈치껏 집개를 들었다.
“됐으니까 넌 먹기나 해.”
그러자 송현민이 까불지 말라며 집개를 뺏었고.
“됐으니까 너희들은 먹기나 해.”
그 집개를 다시 최윤석 타격 코치가 빼앗았다.
“형. 제가 할게요.”
“나중에 돼지고기 먹을 때나 해. 소고기는 금방 익잖아.”
“나중에 저 돼지고기 사 주시려고요?”
“사는 건 네가 사야지.”
“그럼 앞으로도 구울 일이 없을 거 같은데요?”
“괜히 기름 튀었다고 찡찡거리지 말고 맛있게 먹기나 해라.”
“내가 언제 기름 튀었다고 찡찡거렸어요?”
“와, 이 놈 다 컸다고 딴 소리 하는 거 봐. 너 예전에 생각 안 나? 광철이하고 밥 먹을 때 기름 튀었다고 삐쳐서 고기도 안 먹었잖아?”
“에이. 그게 언제적 일인데요. 저도 형 흑역사 좀 풀어요?”
“풀어라. 풀어. 내가 넌 줄 아냐?”
“형 나중에 결혼할 때 두고 봐요. 내가 예비 형수님한테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그런 말은 소개라도 시켜 주고 나서 해라.”
“그건 좀······.”
최윤석 타격 코치와 송현민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코치들이 다들 놀라워했다.
3회차를 사는 박유성도 마찬가지였다.
‘친분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엄청 친한가본데?’
호기심이 돈 박유성이 송현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형은 어쩌다 저희 코치님하고 친해지신 거예요?”
“어쩌다? 유성이 너 말이 왜 그 모양이야?”
“왜요? 제대로 말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어쩌다 이 형을 알게 됐는지 궁금하다는 거지?”
“네. 아무리 봐도 안 어울려서요.”
“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거 참 형은 고기나 좀 구워요. 그거 타네. 타.”
이때다 싶어 최윤석 타격 코치를 놀려대던 송현민이 이내 말을 이었다.
“우리 막내 삼촌이 야구를 했어. 내가 막내 삼촌을 엄청 좋아했고. 근데 막내삼촌이 하필이면 이 형하고 친한 거야.”
“야 인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특별히 광철이 예뻐 해 준 거야.”
“그게 그거죠.”
“광철이 조카 놈이 너라는 거 알았다면 절대 안 예뻐했을 건데.”
“뭐래요. 나 때문에 삼촌 예뻐했던 거면서.”
최윤석 타격 코치는 2006년 베어스에 입단해 8년 간 선수 생활을 했다.
10년 이상 롱런하는 선수들이 많아진 요즘 기준에서 봤을 때는 대단할 게 없는 커리어처럼 보이겠지만.
현역 시절을 따지는 나승균 감독이 김석률 수석 코치 다음으로 인정하는 게 바로 최윤석 타격 코치였다.
8년 간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성실히 활약해 온 최윤석 타격 코치에게 베어스구단은 2군 코치 자리를 제안했고.
부상으로 은퇴를 한 2014년부터 3년 간 베어스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게 됐다.
송현민의 막내 삼촌인 송광철은 그 시절 베어스에 입단했다.
“코치님 은퇴하실 때 들어왔으면 나이 차이 엄청 났겠네요.”
“그 정도까진 안 났어, 이 녀석아. 광철이는 대학교 거쳐서 베어스 들어 왔다.”
“그래도 거의 열 살 차이 아니에요?”
“아홉 살이거든?”
여전히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프로에서 아홉 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선수로 만났다면 쉽게 쳐다보지도 못했겠지만.
당시 최윤석 타격 코치는 지도자 3년차였고 송광철은 신고 선수로 뽑힌 악바리였다.
“사실 그 때 타격 코치가 하나 더 있었어. 내 3년 선배인데 그 형이 나보다 잘 했거든. 그래서 다들 그 형한테 배우려고 했지.”
지도자로서 열정은 컸지만 그런 최윤석 타격 코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 송광철이 배움을 청했다.
“처음에는 꼴보기 싫었어. 신고 선수라서 일부러 날 고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그런데 광철이 그놈이 제 조카 놈을 앞세우더라.”
“현민이 형이요?”
“요 콩만 한 게 우리 삼촌 야구 좀 가르쳐주세요, 하는데 내가 뭐 하고 있나 싶더라.”
“그게 바로 인성질이라는 겁니다.”
“넌 좀 고기나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