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화
04. 내 말 들어요 (2)
현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서 자존심이 상할 만 했지만 송현민은 웃고 말았다.
자신이 박유성이었다 해도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자신보다는 메이저리그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뛰고 있는 기정후를 본받고 싶을 것 같았다.
“그런데 타격 폼이 왜 그래?”
“네?”
“정후 형 따라한 것 같지는 않고. 뭔가 어정쩡해서 그래.”
“아······.”
“내가 혹시 실수했니?”
“아뇨. 형이 본 게 맞아요. 지금 좀 과도기라서요.”
“과도기?”
“올 겨울에 체격을 키울 생각이라서요.”
“그래서 미리 타격 폼을 바꾼 거야?”
“체격을 키우고 난 다음에 폼을 바꾸면 적응기가 오래 걸리잖아요.”
최윤석 타격 코치가 이 말을 들었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혼을 냈겠지만.
송현민은 박유성의 생각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실제로 자신 또한 프로 2년차 때부터 타격 폼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프로 입단 초기 송현민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박유성에 비해서는 탄탄했지만 덩치 큰 거구의 선수들과 나란히 사진을 찍으면 왜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체격이 밀리니까 타구에 힘을 싣기도 어려웠다.
타구가 내야를 맴도니 미래의 동냥으로 키우겠다던 코칭스태프들의 눈빛도 점점 식어갔다.
이대로는 답이 없겠다는 생각에 송현민은 타격 코치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확도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에 장타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타격 폼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3할 언저리던 타율이 2할 중반까지 떨어졌지만 정작 트윈스 팬들은 시원시원한 타격에 환호성을 내질렀고.
아쉬운 눈으로 지켜보던 구단에서도 미래의 3번 타자로 키우겠다며 다시 한번 신뢰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자리보전에 성공한 끝에 지금의 성공 신화를 써낼 수 있게 됐으니 박유성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타격폼으로 고윤식을 무너뜨렸으니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내 팬 맞네.’
괜히 기분이 좋아진 송현민은 김혜성에게 배트 가방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그래. 고맙다.”
배트 가방을 받은 송현민은 시커먼 배트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박유성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이거······.”
“감사합니다. 형.”
“아직 준다는 말 안 했는데?”
“잘 쓸게요.”
“정후 형 팬이라며?”
“오늘부터 바뀌었습니다.”
“너 그러다 나중에 정후 형 만나면 또 바뀌는 거 아냐?”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작 배트 한 자루에 영혼을 파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송현민은 그대로 배트를 박유성에게 내주었다.
“이건 내가 1년차 때 쓰던 거야. 정확하게는 그 때 쓰던 것과 같은 놈이지.
가끔 컨디션 안 좋을 때 휘둘러보는 건데 몇 번 안 잡았으니까 쓸 만할 거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뭐야, 이 녀석. 장비충이였냐?”
“야구는 장비빨이 70퍼센트라고 배웠습니다.”
“누가 그런 옳은 소리를 했어?”
은퇴한 레전드 선수들은 라떼 타령을 하면서 장비나 환경보다 투지와 열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야구는 달랐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보다 좋은 장비로 야구를 해야 실력이 느는 법.
그렇다고 대놓고 장비의 중요성을 역설할 수는 없어서 마음에 드는 후배들에게 배트를 한 자루씩 나눠 주고 있는데 박유성처럼 마음에 쏙 드는 리액션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스파이크나 글러브는 뭐 쓰냐?”
“형이 주시는 거면 다 좋습니다.”
“그냥 물어만 본 건데?”
“에이. 왜 그러세요. 기왕 주시는 거 세트 아이템으로 맞춰 주셔야죠.”
“세트 아이템?”
“나중에 대회 나가서 MVP 타면 송현민 세트 덕분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안 된다?”
만약 다른 선수가 그랬다면 피식 웃고 넘겼겠지만.
대학 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투수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는 실력이라면 대회 때마다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송현민은 그 자리에서 박유성의 신발 사이즈를 확인했다. 그리고 야구 용품을 지원해주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과장님. 잘 지내시죠? 다른 게 아니라 정말 잘 하는 동생이 있는데 후원좀 가능할까 해서요. 프로 선수는 아니고 고등학생인데······. 아 또 아마추어는 곤란해요? 그럼 제가 개인 후원하는 걸로 할테니까 용품 좀 제작해 주세요. 네. 일단 신발 사이즈가······.”
송현민이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 사이 김혜성이 말을 걸었다.
“너 좀 치더라?”
“형 공도 엄청 좋았어요.”
“그 공을 다 때려놓고 무슨.”
김혜성은 박유성이 선배라고 자존심을 챙겨주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은 빈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아까 저 형 공은 홈런 치는 거 보셨죠?”
“그래. 잘 치더라.”
“형 공은 그렇게 못 치겠더라고요.”
“······?”
“공이 확실히 무거웠어요. 끝까지 살아 들어오는 느낌이었고요.”
“그래?”
“좀 더 자세히 말씀드려요? 저 형 공은 빠르기만 할 뿐이지 평범해요.”
“평범해?”
“저기 쟤 보이죠? 쟤가 우리 학교 에이스인데 컨디션 좋을 때는 152km/h까지 찍거든요? 그런데 경기 땐 얻어터지기 바빠요.”
신성 고등학교에서 에이스 손지원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184cm에 85kg라는 체격 조건과 150km/h가 넘는 빠른 공은 다른 학교 투수들과 비교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 손지원은 프로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1회차와 2회차 모두 하위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았고.
2군과 1군 불펜을 전전하다가 씁쓸히 옷을 벗어야 했다.
“제구가 별로 안 좋은 거야?”
“제구를 떠나서 공이 뭐랄까. 밋밋하다고나 할까요? 코치님은 매가리가 없다고 하시던데.”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근데 저 형 포심 패스트 볼도 별반 차이 없었어요. 코스가 조금 날카로운 정도? 지금껏 상대해 온 공들하고 비슷하니까 치기 편하더라고요.”
고윤식이 들었다면 발끈했겠지만.
박유성에게 고윤식의 공은 손지원의 공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체감 구속은 씩씩하게 던지는 손지원 쪽이 더 빠르게 느껴질 정도.
“그럼 나는?”
“형은 말 했잖아요. 공이 무겁다고. 분명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밀리더라고요.”
“그랬어?”
“코스는 형이 더 좋았던 거 알죠? 대놓고 한 가운데로 줬잖아요.”
박유성이 상황까지 언급하자 김혜성이 멋쩍게 웃었다.
“그야 네가 던질 곳을 안 주니까 그랬지.”
“암튼 형이 저 형보다 훨씬 더 잘 해요. 그러니까 너무 제구에 신경 쓰지 말고 시원시원하게 던져요. 형 정도면 160km/h는 우습게 찍을 거 같은데요?”
스타즈 에이스 시절 김혜성을 대표하는 무기는 당연히 포심 패스트 볼이었다.
와일드한 투구폼에서 나오는 155km/h대 빠른 공은 알아도 못 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방금 전 마운드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 시절의 반에 반도 되지 않았다.
“시원시원하게라.”
김혜성도 생각이 깊어졌다.
마지막 타석을 빼앗기고 마운드에서 강판 당했을 때.
김혜성은 이 악물고 던져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박유성이 곧바로 고윤식을 두들겨 준 덕분에 잔소리까지 듣진 않았지만 최상규의 눈빛은 싸늘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에이전트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박유성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더 정신 차려야겠다는 자기반성이 들었다.
“제가 주제넘었나요?”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변명 같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말인데······.”
“한 번 더 붙어 보자고요?”
“어떻게 알았어?”
“척 하면 척이죠. 형처럼 좋은 투수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너무 좋게 봐 주는 거 아니냐?”
“형. 저는 마음에 없는 소리 잘 안 해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요. 홈런 맞고도 인정 못하는 누구보다는 낫잖아요?”
박유성의 시선이 잠시 고윤식을 향했다.
아직도 덜 맞았는지 고윤식은 마운드 위에서 승부를 계속하겠다며 최상규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암튼 형. 오늘은 날이 아니니까 다음에 해요.”
“다음에 언제?”
“내후년 초쯤에?”
“내후년 초? 그럼 나 졸업하는데?”
“형도 졸업하고 저도 졸업하겠죠. 그 때 학생이 아니라 한 명의 야구 선수로 붙어 봐요. 저도 그 때까지 실력 좀 끌어 올릴게요.”
1회차 시절.
박유성은 김혜성을 상대로 고작 0.250의 타율을 기록했다.
9개의 안타 중에 2루타 이상의 장타는 단 하나.
힘으로 찍어 누르는 김혜성의 피칭 앞에 치고 나가기보다는 걸어 나가길 바라야 했다.
스타즈에서 한솥밥을 먹게 됐을 때는 천적이 사라졌다고 좋아했을 정도.
하지만 장타력을 갖춘 2회차 시절의 성적은 달랐다.
안타를 6개 더 쳤고 상대 타율도 0.340까지 높아졌다.
‘거기에 홈런도 두 개인가 쳤고.’
앞선 회차의 데이터로 봤을 때 지금 다시 붙는다고 해서 김혜성에게 홈런을 때려낼 가능성은 낮았다.
잘 해야 아까처럼 코스 좋은 2루타 정도고 그마저도 김혜성이 봉인을 풀어버리면 장담할 수 없었다.
‘괜히 더 상대했다가 상대 전적을 까먹을 필요는 없어.’
투수가 고윤식으로 바뀌었을 때만 해도 김혜성과의 세 번째 타석이 고팠지만.
막상 고윤식을 상대로 홈런을 치고 나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선수 대 선수라. 좋네.”
김혜성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시 붙어서 박유성을 이겨봐야 고등학생을 상대로 힘자랑 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만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나이와 경력을 떠나 프로는 프로.
그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서로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연락처 좀 줄래?”
“제 번호요?”
“너 상규 형하고 계약 할 거잖아.”
김혜성이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최상규가 직접 테스트를 했고 결과가 좋았던 만큼 계약은 시간 문제라 여겼다.
그러자 박유성이 김혜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계약 안 할 건데요?”
“계약을 안 해? 왜?”
“제가 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너 상규 형이 얼마나 유명한 줄 모르지?”
김혜성은 박유성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 여겼다.
최상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전시에서 팀장급으로 활동했을 만큼 실력 있는 에이전트였다.
프로 선수들도 최상규와 계약하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하지만 박유성은 김혜성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최상규를 잘 알고 있었다.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메이저리그 대형 에이전시에서 일 했다고. 그런데 대형 에이전시에서 일 했다고 대형 에이전트인 건 아니잖아요?”
“그야······.”
“그리고 저는 계약한 선수를 막 대하는 에이전트하고는 계약 할 마음이 없어요.”
“······!”
“너희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내 흉 봤냐?”
때마침 송현민이 도착하면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김혜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래 에이전트라 하면 계약한 선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갑을 관계로 따져서는 안 되겠지만 굳이 따져야 한다면 에이전트 쪽이 선수에게 맞춰줘야 했다.
하지만 최상규는 달랐다.
연 초에 송현민과 계약하면서 이름값을 올리더니 마치 메이저리그 슈퍼 에이 전트처럼 굴고 있었다.
‘그래. 내가 계속 찜찜했던 이유가 이거였어.’
최근 들어 김혜성은 최상규와 계약을 이어가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했다.
고윤식은 최상규와 끝까지 간다는 입장이었지만 김혜성은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박유성이 명확하게 짚어 주었다.
‘내가 대단한 선수가 아니라도 그렇지. 에이전트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마음을 굳인 김혜성은 송현민과 박유성에게 인사를 한 뒤에 최상규에게 다가갔다.
“왜? 너도 더 붙여 달라고 떼 쓰려고 왔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뭔데?”
“계약 연장 말인데요.”
“나중이 얘기 하자.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정신없다.”
“안 하겠습니다.”
“······뭐?”
“계약 연장 안 하겠다고요.”
“야, 너······!”
“서류는 부모님 통해서 따로 보내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최상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김혜성은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 나갔고.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최상규는 송현민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