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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22화 (22/412)

타자 인생 3회차! 22화

04. 내 말 들어요 (1)

1

따악!

방망이가 쪼개질 듯한 파열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김석률 수석 코치가 한 마디 내뱉었다.

“넘어갔어.”

신성 고등학교 경기장의 홈에서 중앙 펜스까지 길이는 무려 115m.

힘이 좋은 장태수와 김병욱도 연습 때는 홈런을 거의 때려내지 못하고 있지만.

“이건 무조건 넘어갔어.”

김석률 수석 코치는 홈런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와우. 제대로 찍혔네.”

송현민의 입에서도 감탄이 터졌다.

맞는 순간 타구가 라이너성으로 뻗어 나가서 펜스를 넘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살아가더니 펜스 상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사라졌다.

“와, 저 녀석 진짜 잘 하네.”

박유성에게 연이어 안타를 얻어맞고 강판당한 김혜성도 혀를 내둘렀다.

고등학생답지 않게 공을 골라낼 때부터 알아봤지만 고윤식의 초구를 받아쳐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는 걸 보니까 자신이 못 던졌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윤식은 박유성의 홈런을 인정하지 않았다.

“젠장. 공이 몰렸어.”

프로 흉내 내는 게 같잖아서 참교육을 시켜주려 했던 건데 흥분한 나머지 공이 몰려서 들어갔다고 변명을 삼았다.

“후우······.”

짧게 숨을 고른 고윤식은 다시 투구 판을 밟았다.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바깥 쪽 공을 제안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앞서 얻어맞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과감한 몸 쪽 승부로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고 확신했다.

후앗!

고윤식의 손끝에서 빠져나온 공이 또 다시 몸 쪽을 파고들자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앞서 홈런을 친 리듬감을 살려 빠르고 간결하게.

아직 근력이 붙지 않은 만큼 공을 받쳐 놓고 치기보다 한 템포 빠르게 때려내는 데 포인트를 뒀는데

따악!

이번에도 타구가 빨랫줄처럼 담장을 넘어가버렸다.

“야, 유성아. 적당히 해. 대학교 엉아 진짜 울겠다.”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박유성의 엉덩이를 툭 때렸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으며 쿵짝을 맞춰주었다.

“코치님. 500원 짜리 동전 좀 가지고 있으세요?”

“500원 짜리 동전은 왜?”

“배팅 볼 치는데 동전을 안 넣은 거 같아서요.”

“하하. 이 녀석이 한 술 더 뜨네.”

“그 코치에 그 선수 아니겠습니까?”

“암튼 이번엔 몸 쪽 공 조심해라.”

“빈 볼 때문에요?”

“모르긴 몰라도 엄청 열 받았을 거야. 그러다 보면 가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싶어지거든?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떨어져 서.”

마스크를 고쳐 쓰며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박유성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자리라 해도 고윤식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터.

자연스럽게 공이 거칠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정작 고윤식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마운드 뒤로 내려가 로진백을 가볍게 털어내고.

다시 마운드 앞 쪽 흙을 고른 뒤에 덤덤한 얼굴로 투구판을 밟았다.

“그래도 대학 선수라 이건가?”

박유성은 배성일 배터리 코치의 주문대로 평소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되면 바깥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코스는 정타를 만들어내는 게 어렵지만.

대신 몸 쪽 코스 대처가 쉬워지는 만큼 고윤식도 무리해서 위협구를 던지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런 박유성을 보며 고윤식은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새끼. 운 좋게 얻어 걸린 거 가지고 존나 깝치네.”

아까처럼 홈플레이트 쪽에 붙어 선다면 몸 쪽 깊숙이 공을 찔러 넣었겠지만.

공이 무서워서 도망친 고등학생을 상대로 성질을 내 봐야 체면만 구길 것 같았다.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고윤식은 글러브 안에서 슬라이더 그립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찔러 넣었다.

“스트라이크!”

팔을 쭉 뻗어 공을 받은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스트라이크 콜을 했다.

“들어 온 거예요?”

“백도어 슬라이더야.”

“그래도 제법 까다롭네요.”

“대학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투수인데 당연하지.”

말을 하면서도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괜히 웃음이 났다.

타자가 뒤로 빠진 걸 보고 백도어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만큼 고윤식은 수준이 높은 투수였다.

그렇다면 그런 투수를 상대로 연거푸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은 뭐란 말인가.

‘괴물? 하아. 이 까불이한테는 너무 안 어울리는 별명인데.’

제 자리에 주저앉은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몸 쪽 사인을 냈다.

괜히 박유성에게 빈 볼을 조심하라고 말 했다가 스트라이크를 먹게 만들었으니 2구 째는 몸 쪽 승부를 펼치는 게 공평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우위를 점한 고윤식은 양보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왜? 아예 한 가운데로 던지라고 하지? 설마 앞 타석 때도 코스를 알려 준 건가? 어쩐지. 고등학생 주제에 잘도 받아친다 했다.’

제 멋대로 오해를 한 고윤식은 연거푸 고개를 젓다가 바깥 쪽 사인을 받아냈다.

구종은 포심 패스트 볼.

이 공을 통해 자신의 의심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후우.”

짧게 숨을 고른 뒤 고윤식이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비산하는 로진 가루 속을 빠져나온 공이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날아들었고.

따악!

박유성은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걷어냈다.

“뭐하러 쳤어. 볼인데.”

고윤식에게 새 공을 던져 주며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한 마디 했다.

방금 공은 그냥 흘려보내는 게 정석이었다.

평소처럼 타격 자세를 잡았다면 모를까 한 발 정도 물러난 상태로는 정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박유성도 아무 이유 없이 파울을 친 게 아니었다.

“그 공 놓쳤으면 계속 바깥쪽만 던졌을 걸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렇게까지 하고도 남을 겁니다. 지금 저만 테스트 받는 게 아니니까요.”

박유성의 시선이 마운드를 지나 1루 쪽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에이전트 최상규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윤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윤식은 일부러 최상규 쪽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의식은 하고 있을터.

‘자, 이제 투심을 던질 차례야.’

루틴을 마친 박유성이 방망이를 어깨에 걸쳤다.

볼 카운트는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태.

실제 경기였다면 공 하나 쯤은 뺄 수도 있겠지만 연거푸 홈런을 얻어맞은 고윤식에게는 확실한 만회가 필요해 보였다.

그 예상대로

후앗!

고윤식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빠르게 몸 쪽을 파고들었다.

‘투심!’

포심 패스트 볼에 비해 살짝 몸 쪽으로 붙어 들어오는 궤적을 보며 박유성은 투심 패스트 볼임을 확신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방망이를 끌어냈다.

따악!

스윗 스폿 안쪽에 걸린 타구가 다시 총알처럼 외야로 뻗어 나갔고.

“씨바아아아아알!”

삼진을 확신하던 고윤식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살짝 먹힌 타구는 펜스 앞쪽에서 뚝 떨어졌다.

“코치님. 펜스 좀 당기면 안 돼요?”

“적당히 해. 이 녀석아. 대학교 엉아 진짜로 운다.”

“근데 왜 자꾸 엉아라고 하세요?”

“너도 형제 키워 봐라. 나처럼 될 테니까.”

세 타석 승부를 끝낸 박유성이 헬멧을 벗었다.

고윤식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마운드에서 씩씩거렸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생했다.”

“고생은요. 대학 투수들 공을 쳐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말고.”

“에이. 그러지 말고 칭찬 좀 해 주세요. 네?”

“징그럽다. 이 녀석아.”

여느 때처럼 까불거리는 박유성의 뒤통수를 툭 때린 뒤 김석률 수석 코치는 최상규에게 다가갔다.

느닷없이 찾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대학교 투수까지 호출했을 때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막상 박유성이 잘 해 주니까 화가 풀렸다.

“어떻게, 잘 보셨습니까?”

“네. 생각보다 잘 하던데요?”

“저희 팀 선수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 잘 합니다.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고요.”

최상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혜성을 상대로 연달아 안타를 때려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고윤식을 무너뜨리는 걸 보고 나니까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유성 선수하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시죠.”

김석률 수석 코치는 코치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른 에이전트였다면 쓸 데 없는 소리 못 하도록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겠지만.

송현민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돕는 에이전트라면 박유성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박유성 선수. 정식으로 인사하죠. 최상규라고 합니다.”

“네. 박유성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혹시 계약중인 에이전트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나하고 계약하는 건 어때요?”

최상규도 뜸을 들이지 않았다.

졸업예정자들을 제외한 대학 리그 투수들 가운데 첫 손에 꼽히는 고윤식에게 3안타를 때려냈다.

그것도 홈런 두 개에 2루타 이상의 장타 하나.

심지어 마지막 공은 지금의 고윤식을 있게 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투심패스트 볼이었다.

그립과 던지는 방법에 따라 투심 패스트 볼의 무브먼트는 천차만별이지만 고윤식의 투심 패스트 볼은 좌타자의 몸 쪽에서 바깥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방금 전처럼 좌타자의 몸 쪽 깊숙이 찔러 넣을 경우 좌타자는 몸에 맞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공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고윤식의 투심 패스트 볼을 처음 맛 본 대학 리그 타자들은 다들 혀를 내두르며 놀라기 바빴다.

따로 연락하고 지내는 프로 구단 스카우트들조차 고윤식 하면 투심 좋은 투수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걸 초구에, 그것도 외야 깊숙이 날려버렸다는 건 타고난 재능을 의미했다.

‘코스도 볼이었고.’

처음에는 투심이 치기 좋게 몰린 줄 알았는데 송현민은 그게 아니라며 침을 튀겼다.

“방금 봤어요? 저 자식 볼을 쳤어요. 저 코스는 나도 저렇게 못 친다고요.”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말이 험해지는 송현민의 입에서 저 자식이란 표현이 나왔다는 건 그만큼 박유성의 실력이 빼어나다는 의미.

“나 한 번 믿어 봐요. 내가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 받게 해 줄게요.”

최상규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잡기만 한다면 곧바로 계약서를 써서 옭아 맬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최상규 같은 사기꾼과 함께 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아직은 생각 없는데요?”

“······네?”

“저 아직 1년 더 남았거든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년에 하시죠?”

“······.”

순간 최상규는 말문이 막혔다.

내년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챈 것이다.

단순히 맥락만 놓고 보자면 1년 안에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처럼 들리겠지만.

‘나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 이거지?’

최상규가 쓰게 웃었다.

천하의 송현민도 자신의 이력을 듣고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고작 고등학교 2학년 타자에게 까이다니.

뭔가 에이전트 생활을 잘못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때 눈치를 보고 있던 송현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형. 얘기 다 끝났죠?”

“어? 그래. 끝났다.”

“그럼 이 녀석 제가 좀 빌려 갈게요.”

송현민은 박유성의 어깨에 굵직한 팔을 걸쳐 올렸다.

그리고는 최윤석 타격 코치 쪽으로 다급히 끌고 갔다.

“너 인마. 우리 유성이 살살 안 다루냐?”

“뭐래요. 제가 지금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준 건데. 안 그래?”

“네. 형. 감사합니다.”

“유성이 너는 언제 봤다고 형이냐?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아이고. 됐어요. 나도 형한테 형이라고 하는데요 뭘.”

“너하고 유성이하고 같냐?”

“따지고 보면 난 유성이보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라고 했는데요?”

“맞아요. 그리고 현민이 형하고 코치님 나이 차이보다 저하고 현민이 형 나이 차이가 덜 나거든요?”

“뭐야? 언제 봤다고 죽이 맞아? 너희들 나 몰래 따로 연락했지? 맞지?”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저 쪽으로 가세요. 유성이하고 할 말 있으니까.”

“무슨 얘기 할 건데? 내 앞에서 말 해.”

“형 흉 볼 건데요?”

“이 자식이?”

한참을 티격태격 거리던 최윤석 타격 코치가 자리를 피해 주자 송현민이 박유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뭐냐?”

“네?”

“정체가 뭐야? 왜 이렇게 잘 해?”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정후 선배님 좋아해서요.”

“나 좋아한 거 아니고?”

“제 롤모델은 기정후 선배님인데요?”

“와, 이 자식. 빈 말도 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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