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화
03. 비결이 뭐야? (8)
후앗!
공이 정직하게 날아들자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오른 발을 내딛었다.
‘실투다!’
앞선 두 개의 공도 어렵게 참았던 터라 반사적으로 방망이가 움직였는데.
“······!”
허리춤에서 방망이가 빠져나오려던 순간 갑자기 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플리터!’
박유성은 재빨리 오른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스윙을 최대한 지연시킨 뒤 뚝 떨어지는 공을 맞춰냈다.
딱!
비록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는 1루 쪽 파울 라인 밖으로 굴러갔지만.
“이걸 쳐?”
회심의 스플리터를 던진 김혜성을 필두로.
“뭐야, 저 녀석?”
“제법인데?”
송현민과 최상규에 이르기까지 다들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김석률 수석 코치는 이제 감탄만 났다.
갑작스럽게 실력이 확 늘어난 박유성에게 겨우겨우 적응하나 싶었는데 방금 전 타격은 수용 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잘 모르는 이들은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스플리터를 걷어낸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초구와 2구, 연달아 빠른 공이 들어온 상황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스플리터에 속지 않을 타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더 대단한 건 박유성이 그 공을 골라내지 않고 때려냈다는 점이다.
방금 전 타격으로 김혜성의 스플리터 궤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터.
비록 타구는 파울이 됐지만 김혜성의 스플리터에 대응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었으니 수 싸움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그 예상대로 김혜성은 쉽게 공을 던지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제구가 좋은 투수라면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한 번 더 유인구를 던졌겠지만.
김혜성처럼 제구가 좋지 않은 투수들은 쓰리 볼이 되는 상황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렇다고 빠른 공을 던지자니 얻어맞을 것 같고.
다시 스플리터를 던지면 그 다음에 던질 공이 없을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김혜성은 허를 찌르듯 커브를 던졌지만.
프로 40년차 베테랑인 박유성에게 그런 잔재주가 통할 리 없었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는 좌익수 뒤편으로 떨어졌고.
“하아. 이것도 치네.”
맞는 순간 패배를 직감한 김혜성은 혀를 내둘러야 했다.
“저 녀석 진짜 제법인데요?”
송현민도 눈이 똥그래졌다.
고작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기습적으로 들어 온 커브를 결대로 밀어 쳐 장타를 만들어 내다니.
이건 단순히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송현민도 프로 초년 시절에 바깥 쪽 공에 약점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약점으로 지적받아 온 몸 쪽 떨어지는 공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바깥 쪽 공을 대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때 타격 코치에게 들었던 조언이 바로 결대로 밀어 치라는 것이었다.
“모든 코스의 공을 전부 잡아당길 필요는 없어. 잘 맞은 타구도 야수 정면으로 가면 아웃이 되는 거고 먹힌 타구도 빈 공간에 떨어지면 안타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싶으면 그냥 가볍게 툭 하고 밀어 쳐. 넌 손목 힘이 좋으니까 스윗 스폿에 맞춰내기만 하면 외야 깊숙한 곳까지 날릴 수 있어.”
이 야구 기술을 체득하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박유성을 보니까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최상규의 시선은 커브를 때려 낸 박유성보다 고등학교 2학년 타자에게 안이하게 커브를 던졌다가 얻어맞은 김혜성에게 멈춰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최상규의 입에서 절로 짜증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윤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빈정댔다.
“제가 말 했잖아요. 앞에 녀석들이 못 한 거라고. 혜성이 쟤는 무슨 이 타이 밍에 커브를 던져?”
“그럼 뭘 던져야 하는데?”
“당연히 빠른 공이죠. 초구와 2구, 반응을 못 했잖아요.”
“반응을 못 했다고?”
“설마 그걸 골라냈겠어요? 혜성이 제구가 들쑥날쑥 하니까 일단 참고 본 거죠.”
“그런가?”
최상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박유성이 빠른 공을 잘 골라낸 줄 알았는데 고윤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김혜성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기분이 들었다.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송현민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방금 두 사람의 대화는 능력 없는 현장 지도자들이 아첨 떠는 코치를 옆에 끼고 결과에 맞춰 상황을 끼워 맞추는 만담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첫 타석 대결은 박유성을 칭찬해야 했다.
안타를 떠나 빠른 공을 침착하게 골라냈고 스플리터를 때려냈으며 빠른 공 다음에 들어오는 변화구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혜성이 못 던진 것도 아니었다.
제구가 좋지 않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 좌우가 아닌 상하를 활용하는 피칭을 했고.
볼 카운트가 불리한 상황에서 한복판으로 스플리터를 던지는 대담함도 보여주었다.
앞서 상대한 김병욱과 장태수에게 포심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만 던진 것도 좋았다.
모름지기 좋은 투수는 자신의 패를 숨길 줄 알아야 하는 법.
만약 초구나 2구중에 한 번이라도 박유성이 헛스윙을 해 줬다면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번째 타석에서도 김혜성은 볼카운트의 우위를 잡지 못했다.
초구에 이를 악물고 바깥쪽으로 빠른 공을 꽂아 넣었지만.
“볼!”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냉정하게 판정을 했고.
2구 째 비슷한 코스로 던진 체인지업은 박유성이 그대로 흘려보냈다.
“와, 저 얄미운 녀석. 어떻게 꿈쩍을 안 하냐?”
대학 리그에서 좌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바깥 쪽 빠른 공과 체인지업 콤비네이 션은 성공률이 좋은 편이었다.
아예 철저하게 몸 쪽만 노리는 타자들이라면 몰라도.
눈에 아른거리는 코스를 마냥 지켜볼 선수는 거의 없었다.
초구 빠른 공은 놓치더라도 2구 째 비슷하게 찔러 넣는 체인지업에는 십중팔구 방망이가 끌려 나왔는데.
“젠장. 이제 뭘 던지지?”
또 다시 투 볼에 몰리고 나니까 던질 공이 막막해졌다.
한참 뜸을 들이던 김혜성이 선택한 건 슬라이더.
김병욱과 장태수를 상대로 보여주긴 했지만 박유성에게는 던진 적이 없으니 잘 하면 범타를 유도해 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포수 오른 쪽 무릎에 집중해서······.’
크게 숨을 들이켠 김혜성은 배성일 배터리 코치의 무릎을 향해 빠르게 공을 던졌다.
후앗!
김혜성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제법 날카롭게 몸 쪽을 찔러 들어갔지만 박유성은 이번에도 허리를 멈췄다.
페어 존안으로 끌어넣기에는 코스가 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예상대로 포구를 마친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단호하게 볼을 선언했다.
“와, X발. 이것도 안치네.”
김혜성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보통 투 볼이면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러보기 마련인데 무슨 베테랑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공을 골라냈다.
차마 고등학교 선수에게 볼넷을 줄 수 없었던 김혜성은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한복판에 포심 패스트 볼을 꽂아 넣었고.
따악!
박유성이 그 공을 우중간으로 정확하게 때려내면서 두 번째 타석도 가져갔다.
“유성아. 살살 해라. 대학교 엉아 울겠다.”
앞선 제자들과 달리 박유성이 연달아 안타를 때려내자 배성일 배터리 코치도 신이 났다.
하지만 박유성은 방금 전 타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안 뻗네.”
김혜성의 공이 묵직한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프로 시절에는 받아칠 만 했는데.
고등학교 시절로 회귀했다고 힘에서 밀려 버리니까 살짝 열이 받았다.
그 때 최상규가 타임을 외치고는 그라운드로 난입했다.
“몸 풀기는 끝난 거 같으니까 여기까지 하시죠.”
“몸 풀기요?”
“저 녀석이 진짜입니다.”
박유성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최상규를 바라봤다.
엄연히 세 타석 승부이고.
아직 제대로 보여준 게 없는데 멋대로 대결을 끝낸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최상규는 그런 박유성의 눈빛을 멋대로 오해했다.
‘혜성이 공 때려내서 잘난 척을 하고 싶었나본데 어림없지.’
김혜성을 끌어내린 최상규는 그 자리에 고윤식을 올렸다.
그리고 고윤식은.
“하나 더!”
그제서야 연습구로 몸을 풀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저 녀석은 배 코치님이 백업 포수인 줄 아나.”
“백업 포수여도 저렇게 하면 욕먹죠.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지 저게 뭡니까.”
“암튼 요즘 것들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야구 좀 하면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자기들 가르치는 코치들이 먼저 고생한 선배들이라는 걸 모르니까요.”
“모르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자신들은 다르다고 착각하는 거고.”
“그런데 공이 좀······ 애매한데요?”
“그렇지? 김혜성이 공은 그래도 묵직한 맛이 있는데 저걸로 유성이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신성 고등학교 코치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최상규는 코웃음을 쳤다.
고윤식이 얄미운 짓을 한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까지 깎아내리는 건 어른스럽지 못했다.
현 대학 리그 3학년 투수들 중에 프로 구단의 1차 지명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바로 고윤식이었다.
최고 구속 153km/h의 포심 패스트 볼은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해마다 구속을 조금씩 끌어 올린 만큼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고.
무리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스타일이다보니 80구까지는 구위가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고 146km/h 짜리 투심 패스트 볼은 프로 구단 스카우트들도 눈여겨 볼 정도.
아직 부족한 점은 많지만 내년에 동호대학교의 에이스로서 활약하고 나면 프로에 가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해 줄 수 있다고 평가받는 고윤식과 좌완 파이어 볼러라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 김혜성을 단순히 구속만으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3회차를 사는 박유성에게 고윤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스타즈에 입단해 환골탈태한 김혜성과 달리 고윤식은 베어스 2군을 전전하다가 은퇴했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고 혜성이 형하고 마지막 승부 가야겠다.’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평소대로 루틴을 실행했다.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쪽 타석의 안쪽 라인을 가볍게 찍고.
타격 위치를 잡은 다음에 오른 발을 비벼 땅을 다지고 다시 왼 발을 지면에 살짝 파묻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상체를 들며 방망이를 한 바퀴 휘돌린 뒤에 어깨 위로 가볍게 안착.
그리고 마운드를 바라봤더니 고윤식이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고윤식의 기세가 사나워졌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프로시절 자신을 죽여 보겠다고 이 악물고 덤벼든 선수만 한 트럭이었다.
고작 이 정도 눈싸움에 기가 죽었다면 40년 간 야구를 하지도 못했다.
‘설마 흥분해서 한 복판으로 빠른 공을 던지는 건 아니겠지?’
가볍게 웃어넘긴 박유성이 방망이를 추켜들자 고윤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을 내던졌다.
후앗!
젖 먹던 힘까지 다한 공이 총알처럼 박유성의 몸 쪽을 파고들었고.
따악!
박유성은 그 공을 놓치지 않고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