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0화 (20/412)

타자 인생 3회차! 20화

03. 비결이 뭐야? (7)

‘투수가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태수 놈은 정타 치기 힘들 거야. 병욱이 녀석은 헛스윙만 해댈 테고.’

최상규가 대학교 1학년을 불렀다면 모르겠지만 3학년 쯤 되는 고학년을 호출했다면 게임 자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테스트니까 3학년 쯤 불렀겠지.’

박유성의 예상대로 신성 고등학교에 나타난 투수는 동호대학교 3학년 고윤식.

“쟤 동송고 고윤식 맞죠?”

“대학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동호대 들어갔나 보네요.”

“모르셨습니까? 요즘 잘 합니다. 내년에는 에이스로 뛸 걸요?”

“그럼 우리 애들하고 경쟁하겠는데?”

코치들의 시선은 대학 리그에서 활약 중인 고윤식에게 향했다.

하지만 박유성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고윤식을 따라 온 투수의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혜성이 형이 여길 왜 온 거야?’

지금은 고윤식에게 가려져 있지만 김혜성은 스타즈의 10년을 책임진 에이스투수였다.

160km/h라는 빠른 공을 살리지 못하는 제구력 때문에 모든 프로 구단에서 포기한 걸 스타즈에서 데려가 뜯어 고쳤고.

결국 자신에게 딱 맞는 투구 밸런스를 찾으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좌투수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박유성은 1회차 시절에 김혜성과 한솥밥을 먹었다.

김혜성이 전성기일 때 구단에서 박유성을 비롯해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나섰지만 애석하게도 목표였던 통합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김혜성에게 붙은 별명이 비운의 에이스.

‘은퇴하고 나서 연락도 잘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하지만 김혜성은 박유성과의 재회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뭔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에이전트 계약이 물건너가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 할래?”

최상규가 고윤식과 김혜성을 따로 불러 물었다. 그러자 고윤식이 씩 웃으며 김혜성을 바라봤다.

“혜성이가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요?”

고윤식은 내년 시즌 동호대학교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선발 출전 기회를 잡은 자신과 달리 김혜성은 주로 패전 투수로만 기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혜성의 유일한 무기였던 구속도 거의 다 따라잡았다.

올 시즌 고윤식의 포심 패스트 볼 최고 구속은 153km/h.

155km/h 이상의 강속구 투수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투심 패스트 볼을 활용한 경기 운영 능력은 프로에서도 통할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반면 한때 160km/h까지 던졌다던 김혜성의 구속은 155km/h 까지 떨어져 있었다.

“김혜성. 준비 됐어?”

최상규가 못미더운 얼굴로 김혜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김혜성이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은 풀었습니다.”

“괜히 사고치지 말고 제구에 신경 써서 던져. 알았지?”

“네.”

김혜성이 겉옷을 벗고 마운드에 오르자 이민우 투수 코치의 입에서 뒤늦게 다급성이 터졌다.

“코치님! 쟤 김혜성인데요?”

“김혜성?”

“왜 있지 않습니까. 메이저리그 테스트 받을 때 빈볼 맞춰서 사고 쳤던.”

“아, 공은 빠른데 제구가 안 됐던 그 녀석? 그런데 걔 아직도 야구해?”

“저기 등판에 김혜성이라고 써 있잖아요.”

“헐, 진짜네?”

3년 전에 사고를 치고 잠적했던 김혜성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최윤석타격 코치는 허겁지겁 김석률 수석 코치를 찾았다.

“수석 코치님. 이 대결 하면 안 됩니다.”

“왜? 저 친구가 김혜성이라서?”

“알고 계셨습니까?”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지켜 보자고.”

김석률 수석 코치는 김혜성을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봤다.

김혜성 사건이 터졌을 때 누구보다 안타까워서 따로 어찌 지내는지 수소문까지 했기 때문이다.

김혜성이 동호대학교에서 다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야구를 포기하지 말라는 덕담과 함께 익명으로 고급 글러브를 선물하기도 했고.

이후로도 가끔 생각 날 때마다 잘 하고 있는지 체크를 해 온 터라 김혜성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최윤석 타격 코치는 김혜성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일단 병욱이부터 올려 보시죠.”

“병욱이?”

“아까부터 같이 테스트 받게 해 달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오른 손 타자가 왼 손 투수를 상대로 강한 건 공을 더 오래 지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성은 좌완 파이어볼러.

그렇다면 좌타자인 박유성이나 장태수보다 우타자인 김병욱을 타석에 세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쪽에서 그렇게 하자고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제가 잘 말 해보겠습니다.”

선을 넘은 최상규에게 최윤석 타격 코치가 씩씩거리며 따졌고.

최상규는 군 말 없이 최윤석 타격 코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최윤석 타격 코치는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오해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원래 메인 요리 전에는 애피타이저를 먹는 법이니까.”

본 경기를 보기 전에 김병욱이 분위기만 달궈줘도 좋다고 여겼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김혜성이 공 9개로 김병욱을 녹아웃 시켜버렸다.

“와, 씨. 엄청 빨라.”

“그 정도야?”

“공이 눈에 안 보여. 배 코치님도 겨우겨우 잡았다고.”

본래 주전 포수인 김 산이 포수 마스크를 쓰려 했지만 최상규가 반대했다.

“포수가 미덥지 못하면 투수도 제 공을 던지기 어렵습니다. 배 코치님이라고 하셨죠? 오랜만에 공 좀 받아 주시죠. 그래도 대학 선수들 공이라 받으실 만할 겁니다.”

그래서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오랜만에 미트를 잡았는데.

공을 받을 때 마다 손바닥을 쥐락펴락 하는 게 구위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코치님! 저도 한 번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태수 너도?”

“넵! 꼭 치고 싶습니다!”

김병욱에 이어 장태수가 나섰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 타석 승부에서 삼진 두 개와 땅볼 하나.

마지막 타석 때 몸 쪽 꽉 차게 들어오는 빠른 공에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딱.

완벽하게 먹힌 타구는 가상의 1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저 친구 잘하네요.”

한 쪽에서 대결을 지켜보던 송현민이 김혜성을 칭찬했다.

상대가 고등학교 선수이긴 하지만 빠른 공을 앞세워 스트라이크 존의 상하를 공략하는 전략에 김병욱과 장태수가 완전히 말려버렸다.

“오늘 컨디션은 괜찮아 보이네.”

최상규도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고윤식이 냉큼 입을 털었다.

“에이, 애들 상대로 저 정도는 해야죠. 혜성이가 쟤들보다 4살이나 많은데.”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보다 저 괜히 온 거 같은데요? 혜성이 공도 못 치면 저는 던지나마나 아니에요?”

“그래도 테스트는 테스트니까 미리 몸 좀 풀고 있어.”

“에이, 몸 풀게 뭐가 있습니까. 애들 상대로요. 그러지 말고 현민이 형하고 붙여 주십시오.”

“까분다. 현민이가 네 친구냐?”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송 고등학교 시절 고윤식은 공이 날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대 148km/h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의 구속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만 몰려도 장타로 이어지는 터라 프로 스카우트들의 눈도장을 받지 못했다.

목표였던 랜더스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하자 고윤식은 당차게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왜소한 체격의 고윤식에게 관심을 보인 메이저리그 구단은 없었고.

고윤식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동호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교에 와서 4년이라는 시간을 벌게 된 고윤식은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쉬면서 몸을 키우다보니 지금은 대학 리그 투수들 중에서도 공이 묵직하다는 호평을 받는 중이었다.

“너 요즘 잘 하는 거 아닌데 그럴수록 겸손해라.”

“장난입니다. 장난. 저야 현민 선배님이 한 번 상대해 주시면 영광이죠.”

“암튼 내년에도 올 해 만큼만 해. 그럼 무조건 우선 지명 받게 해 줄 테니까.”

“저는 우선 지명보다 1라운드 지명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 자만하지 말고.”

“넵.”

고윤식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한 뒤 최상규는 타석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잠깐의 숨 돌릴 시간이 끝나고.

기다렸던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왔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박유성이 루틴대로 준비 동작을 취하자 송현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나보다 더 심한데요?”

“그러게. 아직 프로 문턱도 넘지 못한 녀석이 벌써부터 저러면 곤란한데.”

“근데 요즘은 또 개성이라고 넘어가 주기도 하니까요.”

“그거야 잘 하는 녀석들이나 봐 주는 거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최상규의 시선이 다시 빨간 색 배트에 꽂혔다.

“저 배트는 뭐야? 딱 봐도 프로 용인데?”

“아는 선수에게 선물이라도 받았나보죠.”

“테스트인데 저런 걸 들고 나왔다고?”

“우리 유성이가 개성이 넘치는데요?”

“이거 아무래도 괜히 온 것 같은데.”

루틴도 루틴이지만 벌써부터 쇼맨십에 치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김혜성도 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앞서 타석에 들어 온 김병욱과 장태수는 그래도 긴장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박유성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타석 밖에서는 내 공이 만만해 보였나본데······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후앗!

김혜성의 손 끝을 빠져나간 공이 곧장 박유성의 몸 쪽을 파고들었다.

좌투수를 상대하는 좌타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공은 몸 쪽의 빠른 공.

시각 상 등 뒤에서 공이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다가 비행거리 자체도 짧다보니 타이밍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박유성은 가볍게 상체를 드는 것으로 공을 흘려냈다.

“볼!”

구심을 겸한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크게 외쳤다.

공은 날카로웠지만 박유성의 가슴 위쪽을 지나간 만큼 스트라이크를 주긴 어려웠다.

“방망이가 딸려 나올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공을 돌려받은 김혜성은 2구 째 몸 쪽 무릎 높이를 공략했다.

후앗!

김혜성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박유성도 오른 발을 내딛으며 타격을 준비했지만.

퍼엉.

마지막 순간에 허리를 멈춰 세우며 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배성일 배터리 코치는.

“볼!”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고 선언했다.

“와, 이걸 안친다고?”

김혜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학 리그에서 만난 좌타자들이 사족을 못 쓰는 코스였는데 그걸 일개 고등학교 선수가 참아낼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김혜성은 박유성의 선구안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공 좀 보겠다는 거 같은데. 어디 이번 공도 참아 봐라.”

볼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아무리 테스트라 해도 고등학교 선수를 상대로 볼넷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포심 패스트 볼 그립을 잡았던 김혜성은 슬그머니 엄지와 검지를 벌렸다.

그리고는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을 향해 힘껏 팔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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