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15화 (15/412)

타자 인생 3회차! 15화

03. 비결이 뭐야? (2)

프로에서만 40년을 뛰면서 공은 둥글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들으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뭐랄까.

지금껏 수박 겉핥기식으로 야구를 한 기분이었다.

박유성의 표정이 차분해지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마저 말을 이었다.

“오늘 잘 했냐고 물었지? 잘 했다. 네 성에 차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아주 잘 했어. 오늘 유성이 네가 없었다면 아마 어려운 경기가 됐을 거야.

어쩌면 태산에게 졌을지도 모르고.”

“아마 졌겠죠. 태수가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그래. 맞아. 태수에게 기대를 걸고 3번으로 전진 배치 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작전은 실패했다. 하지만 대신에 네가 기대 이상으로 잘 해줬지.”

“대체 제 기대치가 얼마나 낮았던 거예요?”

“글쎄. 너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다면 1번에 올렸을까?”

처음 엔트리를 구상했을 때 박유성의 타선은 9번이었다.

스윙도 좋고 맞추는 재주도 있지만 성급한 성격이라 테이블 세터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좌타자라는 장점과 빠른 발을 활용한 변수를 만들기 위해 1번에 올리긴 했지만 솔직히 박유성에게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안타 하나에 도루 하나 정도.

첫 타석 때는 어렵더라도 두 번째 타석쯤에 장태수 앞에 밥상을 차려줄 수만 있다면 제 몫은 다 한 거라 여겼다.

그 기준점에서 봤을 때 오늘 박유성은 만점 활약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잘 해 주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시리즈 7차전 때 박유성 만큼의 활약을 펼친 선수가 있다면 시리즈 MVP로 뽑혀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애써 말을 아꼈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몰라도 야구에 눈을 뜬 제자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타석은 욕심이 과했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잖아. 그걸 왜 건드린 거야?”

“좋은 공을 안 주니까요. 칠 게 없어서 쳤죠.”

“이 놈아. 볼넷으로 걸어 나갔어도 됐잖아?”

“솔직히 말씀드려요?”

“솔직히?”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해 보고 싶었습니다.”

“······뭘 달성해?”

“메이저리그 표현으로는 히트 포 더 사이클이라고도 하죠.”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한 박유성은 두 번째 타석 때 펜스까지 날아가는 2루타를 때려냈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 때 싹쓸이 3루타를 작렬하며 홈런 빠진 히트 포 더 사이 클을 완성시켰다.

“원래 3루타 치는 게 제일 어렵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타석에 욕심 좀 부려 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놈아. 볼을 치는 게 말이 되냐?”

“오늘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요. 잘 맞추면 넘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박유성을 보며 김석률 수석 코치는 고개를 절래절래흔들어댔다.

박유성을 주장 감으로 추천할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회식이 끝나고.

박유성은 김석률 수석 코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치님.”

“오늘 들어가서 푹 자고. 검사는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넵! 코치님.”

김석률 수석 코치의 조언대로 박유성은 뜨뜻한 물에 반신욕까지 한 뒤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처음으로 하는 도핑 검사였다면 엄청 부담스러웠겠지만.

지난 40년 간 수십 번 받았던 터라 딱히 걱정조차 들지 않았다.

“2회차 시절에 전국 대회 나갔을 때도 도핑 검사를 받았으니까 뭐 이번에도 아무 이상 없겠지.”

2회차로 회귀한 직후.

박유성은 최윤석 타격 코치의 먹자 캠프에 합류했다.

최윤석 타격 코치의 부모님이 대패삼겹살집을 운영했는데 팔다 남은 삼겹살을 매일같이 지지고 볶고 끓여 먹으며 살을 찌웠고.

그 덕분에 장태수, 김병욱과 함께 클린업 타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박유성의 합류로 중심 타선이 견고해지면서 신성 고등학교의 성적도 좋아졌다.

1회차 때는 지구 5위로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 진출에 실패했지만.

2회차 때는 1회차 때보다 2승을 더 거두면서 주말 리그 전반기 4위로 황금사자기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 때 박유성은 2회차 처음으로 도핑 검사를 받았다.

전국대회 전에 각 학교 대표 선수들을 대상으로 도핑 검사를 진행하는 게 협회 규정이었는데 박유성과 장태수가 뽑힌 것이다.

물론 황금사자기까지는 6개월도 더 남았지만 도핑 검사 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만큼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금지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것보다는 근력이 문제야. 진짜 제대로 맞았는데 펜스를 넘기지 못하다니 참······.”

계속해서 장태수의 배트를 썼다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라도 댔겠지만.

두 번째 타석은 기정후의 배트를 들었다.

2회차 시절보다 중량은 조금 덜 나가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최적의 배트나 다름없었는데 마지막 순간 타구가 뻗지 않았다.

“이번에도 최 코치님 네 먹자캠프에 가야 하나? 아니야. 거긴 너무 모 아니면 도야.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단계적으로 증량을 하는 게 나아.”

최윤석 타격 코치의 먹자 캠프는 효과가 확실했다.

장태수와 김병욱은 10kg 이상 체중을 늘렸고.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던 박유성도 몸무게 앞자리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 무리해서 체중을 늘린 탓에 무릎에 문제가 생겼다.

젊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지만 슬라이딩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이후로 밸런스가 무너졌고 자연스럽게 성적도 내리막길을 타게 됐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박유성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뒤 방을 나왔다.

“오빠. 어디 나가?”

“어? 어. 운동.”

“이 시간에?”

“그냥. 계단 좀 타려고.”

방문 앞에서 마주친 여동생 박유선과 어색한 대화를 나눈 뒤 박유성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꼭대기 층까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체력 키우기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유성아. 가자.”

“넵. 코치님.”

박유성은 김석률 수석 코치와 도핑 검사를 받기 위해 신성 강남 병원을 찾았다.

김민철 감독은 자신들이 지정한 병원에서 검사를 받길 원했지만 나승균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병원 의사하고 짜고 헛소리를 늘어놓을지 어떻게 알고?”

김석률 수석 코치도 공신력 있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게 낫지 않겠냐고 설득하면서 상급종합병원인 신성 강남 병원으로 변경됐다.

“그런데 신성 병원에서도 도핑 검사를 하나요?”

“나도 몰랐는데 도핑 검사가 가능하다고 하더라. 기본적인 검사 결과는 아마 오늘 바로 나올 거야.”

박유성은 협회에서 나왔다는 검사관이 보는 앞에서 소변 샘플을 받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피까지 뽑은 뒤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걱정되니?”

“아니요. 전혀요.”

“정말 아무 이상 없겠지?”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박유성은 당당했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신성 강남 병원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일이 커졌기 때문이다.

김민철 감독은 태산 고등학교 야구부 지정 병원에서 간이로 검사를 받길 원했다.

금지 약물 복용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다가 고작 연습 경기였던 만큼 협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나승균 감독이 노발대발하면서 협회가 중재에 나서게 됐고.

신성 학원 측에서 다시 신성 강남 병원을 추천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신성 의료원이 운영하는 신성 병원은 전국 단위의 상급종합병원.

이런 곳에서 고작 고등학교 2학년 선수의 도핑 검사를 진행한다는 건 결국 신성 그룹에서 관심을 갖는다는 이야기였다.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제발 아무 문제없게 해 주세요.’

이렇다 할 종교가 없는 김석률 수석 코치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만에 하나라도 태산 고등학교의 주장대로 박유성이 도핑을 한 거라면 망신을 넘어 야구부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1차 검사 결과는 깨끗했다.

“추가 검사 결과는 일주일 쯤 걸리는데 1차 검사 때 나온 게 없으니까 걱정안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검사를 직접 진행했던 황인철 센터장의 말에 김석률 수석 코치는 가슴을 쓸어 내렸고.

“거 봐요. 제가 뭐랬어요?”

박유성은 보란 듯이 깐족거렸다.

“협회 쪽에도 공유가 되는 거죠?”

“네. 검사 결과 전부 야구 협회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협회에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은 있을까요?”

“글쎄요. 재검사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검사 결과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할 겁니다.”

신성 강남 병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도핑 검사 시스템을 도입한 건 신성 스포츠의 요청 때문이었다.

신성 스포츠에서 동유럽 시장을 겨냥해 밀라노 동계 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인 카밀라 쉐르바코바를 전속 모델로 기용했는데 뒤늦게 도핑이 적발된 것이다.

카밀라 쉐르바코바는 검사 결과에 불복해 국제 스포츠중재재판소에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카밀라 쉐르바코바가 정말 억울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위약금을 비롯해 줄 소송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일 뿐.

선수로서 다시 재기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다른 기업들처럼 신성 스포츠도 카밀라 쉐르바코바와 계약을 해지하며 선 긋기에 나섰다.

하지만 카밀라 쉐르바코바를 앞세워 바짝 끌어올린 인지도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결국 큰 손해를 감수하고 동유럽 시장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악재가 다시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신성 그룹은 자체적인 도핑 검사 시스템을 마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신성 강남 병원에 세계적인 수준의 도핑 검사 센터가 문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곳저곳에서 이용 문의가 쏟아졌다.

한국 야구 협회도 그 중 하나였는데 금전적인 문제로 논의가 길어지던 도중 협회 소속 아마추어 야구 선수인 박유성이 도핑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야구 협회가 신성 강남 병원 도핑 분석 센터의 검사 결과를 부정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걱정하지 말고 야구 열심히 해라.”

황인철 센터장이 박유성에게도 한 마디 건넸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미리 사인 한 장 해 드릴까요?”

“사인?”

“참고로 이번 생 첫 사인입니다.”

이번 생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했지만 황인철 센터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야구만 하다 보니 또래들에 비해 언어 구사 능력이 조금 부족한 거라 여겼다.

“내가 첫 사인을 받아도 괜찮을까?”

“제 결백을 밝혀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해 드려야죠.”

박유성은 A4 용지에 큼지막하게 사인을 했다. 그리고 황인철 센터장의 이름과 날짜까지 집어넣었다.

“사인이 멋있구나.”

사인을 받은 황인철 센터장은 내심 놀랐다.

아마추어 선수가 사인을 해 봐야 얼마나 잘할까 싶었는데 프로 선수들 못지않았다.

“혹시라도 어디 안 좋거나 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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