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3화
02. 뭐야, 저 녀석? (7)
“저런 게 선수라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글러브를 챙기는 민찬희를 보며 김민철 감독은 악담을 퍼부었다.
아직 1학년이라 경기 경험이 부족한 건 이해하더라도 칠 만한 공은 전부 놓치고 치지 말아야 할 공에 손이 나간 건 도저히 이해해 줄 수가 없었다.
“한 코치!”
“네. 감독님.”
“저 새끼 빼.”
“······찬희 말씀이십니까?”
“왜? 안 돼?”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한우열 수석 코치가 민찬희를 대신해 김상준을 호출했다.
그러자 백광식 수비 코치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한 코치님. 이건 좀 위험합니다.”
“알아. 아는데 감독님 지시야.”
“그럼 말려야죠. 유격수는 수비의 핵입니다. 가뜩이나 포수도 원형인데 찬희까지 빼면 난리 납니다!”
오늘 경기에 선발 출전한 1학년은 총 3명.
그 중에 민찬희는 봄부터 3학년 선배들의 백업을 뛰었을 만큼 수비 실력이 발군이었다.
타격이 아쉽긴 하지만 수비적으로 보여줄 게 더 많은 기대주였다.
그런데 그런 민찬희를 빼고 돌글러브라는 별명을 가진 김상준을 넣다니.
심지어 김상준의 주 포지션은 유격수도 아닌 2루수였다.
하지만 한우열 수석 코치도 더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주전 포수 김세찬을 뺀 순간부터 오늘 경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냥 감독님 말씀대로 해. 그게 맞아.”
“한 코치님!”
“아니면 백 코치, 자네가 직접 가서 따지던가.”
“그건······.”
“그럴 거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
백광식 수비 코치를 물리고 한우열 수석 코치는 구심에게 대수비를 요청했다.
주전 포수 김세찬을 대신해 1학년 포수 조원형이 포수 마스크를 썼고 유격수 자리에 김상준이 대수비로 들어갔다.
“저거 뭐죠?”
“그러게. 포수야 대타를 썼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유격수는 뭐야?”
“설마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죠?”
“1대 0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
신성 고등학교 코치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산 고등학교 전력 분석 결과 민찬희가 내야 수비의 핵이나 다름없는데 수비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김상준과 맞바꾸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3회차를 사는 박유성은 눈앞의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원래 우리 감독님이 빡쳐서 대타 쓰고 대수비 쓰고 하다 경기 말아먹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네?”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중반까지 점수를 따라잡지 못하자 나승균 감독이 전면에 나섰다.
김석률 수석 코치의 만류도 뿌리치고 대타 카드를 남발했지만 모조리 실패.
오히려 수비에 구멍이 뚫리면서 더 처참히 무너졌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때는 김민철 감독이 신성 고등학교 더그아웃을 보며 실실 웃어댔던 것 같은데.
“김 감독도 맛탱이가 갔군. 갔어.”
지금은 나승균 감독이 얄밉게 웃고 있었다.
점수는 고작 한 점 차이지만 경기 분위기가 넘어왔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나승균 감독을 대신해 김석률 수석 코치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경기는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 풀지 마라. 알겠지?”
“넵!”
선수들을 쭉 훑던 김석률 수석 코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박유성을 향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손가락 하트를 내보이며 씩 웃었고.
김석률 수석 코치는 답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알고 있었다.
김석률 수석 코치가 이런 애교를 은근 좋아한다는 걸 말이다.
“코치님. 걱정하지 마세요. 쟤들 이제 알아서 무너집니다.”
3번 타자 장태수부터 시작된 5회 말 공격은 득점 없이 끝이 났다.
장태수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라는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바깥 쪽을 파고드는 싱커를 잘 걷어 올렸지만 타구가 중견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아웃이 됐고.
김병욱은 첫 타석에 이어 두 번째 타석에서도 선풍기질만 하다가 삼진을 먹었다.
2사 주자 없는 가운데 1학년 기대주 홍선우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지만.
포수 김 산이 김병욱의 길을 가면서 공수가 교대됐다.
“X발. 저걸 어떻게 치라는 거야?”
파울 한 번 쳐보지 못하고 헛스윙 삼진을 당한 게 약 올랐던지 김 산이 씩씩거렸다.
그러자 박유성이 슬그머니 다가와 김 산의 목에 팔을 걸쳤다.
“산아. 괜찮아. 넌 포수만 잘 하면 돼.”
“개소리 말고 저리 꺼져 줄래?”
“개소리가 아니라 진짜 잘 하고 있다는 거야. 안타 좀 못 치면 어떠냐? 네가 투수 리드를 잘 해서 이기고 있는데. 안 그래?”
동기라서가 아니라 김 산은 좋은 포수였다.
포구와 블로킹, 프레이밍, 송구 등 포수가 갖춰야 할 것들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프로에 가서도 10년 넘게 선수생활을 했고.
국가대표 포수 자리가 펑크 났을 때는 백업 카드로 대표팀에 승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프로 시절에도 김 산의 타격은 시원치 않았다.
‘제일 잘 쳤을 때가 2할 4푼인가 그랬지 아마?’
두 시즌인가를 제외하고 타격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해 멘도사 라인을 김 산 라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타격은 포기해 인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김 산의 엉덩이를 툭 때린 뒤 박유성이 외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김 산의 시선이 다시 전광판으로 향했다.
1대 0.
태산 고등학교에서 김진수 카드를 뽑아들면서 오늘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작 경기는 신성 고등학교가 리드하고 있었다.
‘그래. 유성이 말이 맞아. 일단 이기고 보자. 안타는 그 다음이야.’
마음을 다잡은 김 산은 서둘러 포수 장비를 착용했다.
그리고 마운드로 올라가 바뀐 투수, 김동화와 작전을 짰다.
최고 구속 148km/h의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 김동화는 와일드 한 투구폼에 걸맞은 형편없는 제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지원도 컨디션에 따라 제구가 들쑥날쑥 이지만 김동화는 제구력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
그래서 김 산도 손지원처럼 리드할 생각을 포기했다.
“동화야. 최대한 비슷하게만 던져.”
“비슷하게?”
“정확하게 안 던져도 되니까 내 미트만 바라보고 던지라고.”
“나 원래 미트 안 보고 던지는데?”
“어쩐지 공이 개판이더라니.”
“뭐 인마?”
“암튼 괜히 제구 한답시고 어정쩡하게 던지지 말고 시원하게 꽂아. 나머지는 야수들에게 맡기고.”
“그러다 볼넷 주면 어떻게 해?”
“볼넷 줄 거 같으면 그냥 한복판으로 던져.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라이벌전에서 한 점차 리드 상황이라면 최대한 까다롭게 가야 정상이지만.
김 산은 야수들을 믿고 공격적인 사인을 냈다.
김동화도 포수 미트만 보고 던지라는 김 산의 주문에 최선을 다했다.
따악!
1번 타자 고연규를 상대로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까지 몰리자 한 복판에 빠른 공을 찔러 넣어 2루수 앞 땅볼을 이끌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2번 타자 홍세혁에게는 투 볼로 출발해 삼진을 잡아내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3번 타자 김재석에게 한복판에 몰리는 공을 던졌다가 큼지막한 장타를 얻어맞았지만
타다다다닥!
워닝 트랙까지 전력 질주한 박유성이 펜스 앞에서 타구를 잡아내며 김민철 감독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저게 말이 돼? 저게 말이 되냐고!”
지도자 생활을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저건 고등학교 야구 레벨에서 나올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다.
최소 프로 구단에서도 수비 좀 한다는 외야수들에게나 볼 수 있을 만한 플레이였다.
그런데 그런 수준급 플레이를 한두 번도 아니고 경기 내내 보여주고 있으니 김민철 감독도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 저 녀석.”
김민철 감독과 멀찍이 떨어져서 경기를 지켜보던 한우열 수석 코치도 혀를 내둘렀다.
경기 초반부터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방금 전 플레이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머리 뒤로 넘어가는 타구는 프로 선수들조차 처리하는 데 애를 먹는데 타구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펜스 쪽으로 내달렸다.
보통은 백스텝을 밟다가 타구도 놓치고 후속 처리도 늦어지는 경우가 태반인데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오늘 경기에서 신성 고등학교의 중견수 때문에 날린 안타만 벌써 4개 째.
그 중 하나, 아니 두 개만 빠졌더라도 오늘 경기가 지금처럼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나이스 플레이!”
“미쳤다. 미쳤어. 어떻게 그걸 잡냐?”
박유성의 연이은 호수비 덕분인지는 몰라도 신성 고등학교 더그아웃은 열점을 앞서가는 팀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반면 태산 고등학교의 더그아웃은 싸늘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콜드 게임 패배라도 당했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자, 자. 할 수 있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조금만 더 파이팅 하자!”
괜히 눈치가 보인 민호석 타격 코치가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선수들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위축된 심리 상태가 수비 실책으로 이어졌다.
따악!
7번 타자 김경준이 밀어 친 타구를 바뀐 유격수 김상준이 펌블한 것이다.
공을 한 번에 포구하지 못했다면 송구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혼나는 게 두려웠던 김상준은 제대로 쥐지도 못한 공을 1루로 내던졌고.
“빠졌다!”
“뛰어! 뛰어!”
1루 송구가 완전히 빠지면서 무사 주자 2루 상황이 만들어졌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진 타석에서 벤치의 지시를 받은 이현재가 희생 번트를 댔는데 홈플레이 트를 때리고 튀어 오른 공을 1학년 포수 조원형이 놓치면서 타자 주자까지 살려버린 것이다.
“X발. 뭐하자는 거야?”
연이은 실책으로 평정심을 잃은 김진수는 9번 타자 이재윤에게 볼넷을 허용했고.
그렇게 루상이 꽉 들어찬 상황에서
“이 몸이 활약할 차례인가?”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타임!”
한우열 수석 코치는 다급히 마운드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김진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진수야.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 지금 영운이 준비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시간을 벌자. 알았지?”
한우열 수석 코치는 여차하면 볼넷으로 골라도 상관없다고 덧붙였다.
타격감이 좋은 박유성에게 안타를 내주느니 차라리 한 점을 주고 오진욱의 타석 때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김진수는 오늘 경기를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벌라고? 장난해? 나 김진수야. 인천 최고의 유망주 김진수라고!”
잔뜩 열이 받은 김진수는 바깥 쪽 공을 요구하는 조원형의 사인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박유성의 몸 쪽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김진수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정 반대로 날아오자 조원형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졌다.
만에 하나 이대로 공이 빠지면 김민철 감독의 불호령이 자신에게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 소리와 함께 시야 뒤쪽에서 튀어나온 빨간 색 방망이가 살짝 가라앉으려는 공을 집어 삼키면서 조원형을 구해냈다.
따아악!
요란스러운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좌중간을 완전히 갈랐고.
“X바아아아아알!”
태산 고등학교의 조커 카드였던 김진수를 그대로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