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0화
02. 뭐야, 저 녀석? (4)
박유성이 1루에서 씩씩거리는 동안 김석률 수석 코치는 2번 타자 오진욱을 붙잡고 작전을 지시했다.
“유성이가 나갔으니까 상대 투수도 부담스러울 거야. 욕심 부리지 말고 상황봐서 기습 번트를 대.”
“어느 쪽으로 댈까요?”
“그야 수비가 깊은 쪽을 노려야겠지?”
“만약에 유성이가 도루를 시도하면요?”
“그 때는 상황을 보고 판단해.”
“상황을요?”
“피치아웃이나 빠른 공이다 싶으면 휘둘러서 송구를 방해해. 변화구는 참고.”
“네. 알겠습니다.”
작전 지시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 온 김석률 수석 코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등학생 쯤 되면 스스로 생각하는 야구를 해야 하건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려줘야 한다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그냥 유성이를 뛰게 할까?”
잠시 그런 욕심이 들었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에 하나라도 박유성이 도루를 하다 죽기라도 한다면 좋았던 흐름이 다시 태산 고등학교 쪽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래. 안전하게 가자. 안전하게.”
김석률 수석 코치는 1루에 나간 최윤석 타격 코치에게 도루를 시키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최윤석 타격 코치가 박유성 쪽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뛰지 마.”
“······?”
“안 돼.”
박유성이 뒤늦게 김석률 수석 코치를 바라봤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팔짱을 낀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산 전이라고 너무 몸을 사리시네.”
빠른 발로 단타를 벌충하려 했던 박유성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진수가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죽거리며 리드를 벌렸다.
“진수야. 형 뛸 거야. 정말이야. 빈틈만 보이면 바로 뛸 거야. 그러니까 변화 구 던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박유성이 혼잣말처럼 주절거렸다.
그러자 김진수의 눈매가 더욱 굳어졌다.
‘X발. 뭐라는 거야?’
처음 신성 고등학교 전을 준비하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김진수는 장태수 한 명만을 체크했다.
장태수는 선배들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한 방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3학년 선수들이 전부 빠진 지금은 빈약한 신성 고등학교 타선에서 유일하게 장타를 때려낼 수 있는 존재였다.
신성 고등학교의 전력을 분석해 온 매니저는 장태수 이외에도 몇몇 3학년 선수들을 언급했지만 김진수는 가볍게 무시했다.
청라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인천의 유망주 소리를 듣던 몸.
약체인 태산 고등학교로 전학 왔다고 해서 이름값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안중에도 없던 박유성에게 선두타자 안타를 얻어맞고 나니까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죽을 때 까지 견제구를 던지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성격을 죽이고 살아야 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김진수가 힘겹게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봤다.
타석에는 오진욱이 일찌감치 번트를 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저렇게 나와야지.”
김석률 수석 코치는 초반 선취점을 내기 위해 사인을 낸 거지만 김진수는 다르게 해석했다.
정면 승부로는 자신이 없으니까 번트를 대는 거라 여겼다.
“줄 건 주고 장태수를 상대하자.”
대기 타석으로 들어 온 장태수를 한 번 쳐다본 뒤 김진수는 홈플레이트를 향해 빠르게 몸을 던졌다.
그러느라 박유성이 2루 쪽으로 빠르게 스타트를 끊는 걸 보지 못했다.
후앗!
김진수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오진욱의 몸 쪽으로 꺾여 들어갔고.
딱.
미리 번트를 준비하고 있던 오진욱은 침착하게 3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페어!”
바운드 된 공이 페어 라인 안쪽으로 구르자 포수 김세찬이 크게 소리쳤다.
정상 수비를 하고 있던 3루수 유진욱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타구를 건졌다.
그리고 김세찬이 가리키는 대로 1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좋아!”
그 모습을 마운드 뒤편에서 지켜보던 김진수가 글러브를 두드렸다.
비록 선두 타자를 내보내긴 했지만 공 하나로 깔끔하게 아웃 카운트를 벌었으니 어느 정도 손해를 만회했다 여겼다.
그런데······.
“3루! 3루!”
갑자기 등 뒤에서 고연규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뭐야?’
김진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희생 번트 타구에 2루를 지나 3루까지 내달리는 어떤 미친놈을.
“3루 잡아! 3루!”
김진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1사 2루라면 장태수를 어렵게 승부하다 여차하면 1루를 채우면 그만이지만 1사 3루는 이야기가 달랐다.
실점 위험성이 높아지는 건 둘째 치고 폭투 때문에 장태수를 상대로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던지는 게 부담스러워진다.
그런 김진수의 외침을 들은 것일까.
1루를 지키던 김재석이 공을 받기가 무섭게 곧장 3루로 내던졌다.
하지만 급하게 던진 공은 3루 커버에 들어갔던 유격수 민찬희의 키를 넘겨 버렸고.
“가볍게 한 점!”
공이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박유성은 홈까지 훔치는 데 성공했다.
“뭐야, 이 미친놈아!”
흙이 뭍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자 장태수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설마하니 희생 번트 하나로 홈까지 들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게 너와 나의 수준 차이다.”
“······?”
“야구 열심히 하라고 인마. 이번에는 절대 안 봐줄 거니까.”
어수선해진 경기장을 뒤로 하고 박유성이 더그아웃으로 뛰어 들어왔다.
“박유성!”
“네. 감독님!”
“이리 와. 이 놈 새끼!”
“감독님! 격하게 안아 주십쇼!”
아까까지만 해도 손지원을 물고 빨던 나승균 감독이 두 팔 벌려 박유성을 반겨 주었다.
다른 코치들도 다가와 한 마디씩 건넸다.
“유성아. 잘 했다.”
“짜식이 드디어 밥값을 하는 구나?”
“유성아. 그렇게만 해. 아주 잘 하고 있어.”
“넵! 이게 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 모습을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던 김석률 수석 코치는 그저 웃음만 났다.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제 잘난 줄만 아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었는데.
하루 쉬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완전히 다른 녀석이 되어 버렸다.
그 때 신기남 주루 코치가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다가왔다.
“수석 코치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
“유성이요. 수석 코치님이 주문하신 거잖아요.”
앞서 수비 위치 조정 때문일까.
신기남 수석 코치는 이번 주루 플레이도 김석률 수석 코치의 작품이라 여겼다.
일본과 미국에서 자비로 연수를 받으며 지도자 준비를 해 온 김석률 수석 코치만의 작전이 제대로 먹힌 거라 오해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석률 수석 코치도 웃어넘기지 못했다.
“난 한 거 없어. 유성이가 알아서 다 한 거지.”
“네?”
“그러니까 신 코치도 유성이한테 뭐라고 하지 마. 지금 분위기 확 달라진 거 보이지? 이게 다 유성이 덕분이라고.”
본래 영웅과 역적은 한 끗 차이라고 했다.
기회를 살리면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박유성이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아서 날아다니는 거였다면 김석률 수석 코치도 어깨를 눌렀겠지만.
투구와 동시에 스타트를 끊은 것부터 시작해 빈틈이 보이자 3루를 노리고 공이 빠지는 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홈까지 파고든 건 주루 플레이의 교과서나다름없었다.
게다가 박유성은 슬라이딩으로 홈을 파고들었다.
홈에서 사인을 줘야 할 장태수가 멍하니 서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코치님. 보셨어요?”
까불까불하고 가벼운 건 여전했지만.
“내가 너 때문에 수명이 준다. 수명이 줄어.”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배트는 왜 바꾼 거야?”
“약간 스윙이 날리는 느낌이라서요.”
“무게는 맞고?”
“밸런스는 좀 안 맞는데 칠만 합니다.”
“그러지 말고 일단 이거 써라.”
김석률 수석 코치가 배트 케이스에서 빨간 색 방망이를 하나 꺼냈다.
“이거 기정후 선배님 배트 아니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잘 알죠. 프로 갈 때 코치님이 선물로 주셨잖아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되삼키며 박유성이 씩 웃었다.
1회차 시절 졸업 선물로 받고 집에 잘 모셔뒀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2회차 때도 선물로 달라고 졸랐지만.
“너하고는 안 맞아. 이 녀석아.”
바뀐 타격 스타일 때문인지 김석률 수석 코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배트를 이렇게 일찍 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잘 쓰겠습니다. 코치님.”
“안 되겠다. 너 실실거리는 거 보니까 안 줘야겠다.”
“에이,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일단 급한 대로 오늘 경기만 써. 경기 끝나고 배트 새로 맞추고.”
“넵! 코치님.”
자리로 돌아 온 박유성은 곧바로 방망이 손질에 들어갔다.
김석률 수석 코치도 기념으로 받은 배트이다 보니 거의 새 제품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 장태수가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야 그건?”
“벌써 죽었냐?”
“세상에서 가장 치기 어려운 싱커였어.”
“응, 아니야~ 난 파울 쳤어.”
“뽀록으로 친 거잖아.”
“넌 뽀록으로도 못 쳤잖아.”
“뭐야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 해?”
“뭘? 말은 원래 내가 너보다 잘 했고 야구도 원래 이만큼 했는데?”
“너 나 몰래 이상한 거 먹은 거 아니지?”
“글쎄. 네가 3회차라고 알라나 모르겠네.”
“뭐라는 거야?”
장태수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박유성은 그런 장태수를 딱히 이해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이해시킨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 때 저만치 앉아 있던 손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수교대다.”
“뭐? 벌써?”
“4번 김병욱인데?”
“참. 그랬지?”
모두의 기대대로 4번이라는 중책을 맡은 김병욱은 시원한 선풍기질을 해대며 삼진을 먹어주었다.
“나한테만 겁나 잘 던져.”
김병욱이 억울하다며 투덜거렸지만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공수가 바뀌자 나승균 감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유성이가 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김 코치가 유성이 놈 1번으로 올렸을 때 무슨 생각인가 싶었는데 역시 김 코치야!”
“저는 감독님께 배운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하. 내가 이래서 김 코치를 좋아한다니까?”
가볍게 장단을 맞춰 준 김석률 수석 코치의 시선도 박유성을 향했다.
나승균 감독의 말처럼 박유성이 희생 번트 때 2루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
장태수의 중견수 쪽 뜬 공에 3루까지 진루했을지는 몰라도 홈에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석률 수석 코치의 시선이 다시 신성 스포츠에서 기증한 전광판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야구부 전용 경기장임에도 불구하고 큼지막하게 설치된 전광판 숫자가 0에서 1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경기 초반인 만큼 저 한 점의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박유성에게 휘둘리던 김진수도 장태수와 김병욱을 상대하면서 안정감을 되찾았고.
경험이 부족한 손지원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이 만들어 낸 이 흐름이 쉽사리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