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9화
02. 뭐야, 저 녀석? (3)
고등학교 시절 선배들의 구타에 못 이겨 몇 번이고 야구를 그만둘 뻔 했던 김민철 감독은 김진수를 보란 듯이 키워내고 싶었다.
“홍준영이 어디 갔지?”
“라이온즈 6라운드 지명입니다.”
“6라운드라. 그럼 우리는 5라운드 안쪽으로 만들어 보자고.”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민철 감독이 고해영 투수 코치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이 타석도 되게 오랜만이네.”
신성이라는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덕분에 신성 고등학교는 주변 학교들이 부러워할 만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연습 경기장만 해도 어지간한 프로 구단 뺨치는 수준.
‘여기서 뛰다가 파이터즈 구장 보고 충격 받았던 게 아직도 생생해.’
잠시 옛 추억에 잠겼던 박유성은 이내 습관처럼 오른 발로 타석을 다졌다.
그 다음에 방망이를 길게 뻗어 오른 쪽 타석의 안쪽 선을 콕콕 두드린 뒤 왼발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망이를 풍차처럼 한 바퀴 휘돌리고 나서 어깨에 가볍게 걸쳐 올렸는데.
“······?”
김진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차차. 나 지금 고딩이지.’
뒤늦게 자신의 루틴이 너무 과했음을 자각한 박유성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조차 김진수에게는 얄밉게만 느껴졌다.
“저 새끼 뭐야? 내 얘기 듣고 쪼개는 건가?”
어쩌다보니 감독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불쌍한 유망주가 되었지만 김진수도 한 성깔 했다.
“넌 내가 꼭 죽인다.”
포수 김세찬의 사인을 받은 김진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박유성을 노려보며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후앗!
김진수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몸 쪽을 파고들자 박유성은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뺐다.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178번이나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를 했다보니 느낌이 싸하다 싶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퍼억!
박유성의 예상대로 타석 안쪽까지 침범했던 공은 가슴 앞쪽을 지나 포수의 미트 속에 틀어박혔다.
경험이 부족했다면 옆구리에 꼼짝 없이 얻어맞았을 터.
“선배님.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박유성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구심에게 어필했다.
그러자 구심이 마스크를 벗고는 김진수를 노려봤고.
“어이구. 미안합니다.”
김민철 감독이 후다닥 더그아웃 밖으로 뛰어 나왔다.
“벤치에서 사인 낸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습 경기인데요. 아직 몸이 덜 풀린 것 같습니다.”
“연습구는 잘만 던지던데요?”
“진수가 전학 오고 첫 선발이라서요. 긴장을 했나 봅니다.”
“그래도 조심 좀 합시다. 괜히 연습경기에서 부상자라도 발생하면 골치 아파 집니다.”
김민철 감독이 구심을 상대하는 동안 박유성은 김진수와 눈싸움을 했다.
김진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뭐? 어쩌라고? 내가 애들처럼 네 도발에 놀아날 줄 알았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에 공을 맞았다면 솔직히 화가 났을 거다.
하지만 고작 맞을 뻔 한 공으로 열을 내기에는 40년 프로 짬이 너무 컸다.
게다가 이 세상 모든 심판들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선수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극혐했다.
“암튼 저 자식 성격 더러운 건 여전해. 그러니까 실패했지.”
김진수는 박유성을 처음 봤지만.
박유성은 김진수를 잘 알고 있었다.
1회차와 2회차 시절 파이터즈에서 한솥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1회차 시절에는 같이 2군 생활을 하며 제법 어울렸었고.
2회차 때는 곧바로 1군에 올라가서 거의 얼굴 볼 일이 없었다.
그리고 1회차와 2회차 모두 김진수는 2군을 전전하다가 방출을 당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혹사로 인해 어깨가 고장 났다고 하는데 글쎄.
2군에서도 선배들과 술 마시러 다니기 바빴던 녀석이 어깨가 고장 날 만큼 열심히 뭘 했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커트 신공으로 제대로 괴롭혀주고 싶은데 이 형이 한번만 참는다.”
앞서 프로 시절처럼 루틴을 선보였던 만큼 박유성은 이쯤에서 좋게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2구 째 날아온 몸 쪽 공을 간결하게 잡아 당겼는데.
따악!
타구가 1루 쪽 그물망을 때렸다.
“뭐야? 왜 이래 이거?”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난 박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공을 끝까지 끌어 당겨놓고 때렸는데 왜 파울이 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설마 커터 같은 걸 던졌나?’
답을 구하기 위해 박유성이 1루 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김석률 수석 코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성아! 침착하게!”
“침착하게? 저 완전 침착한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석으로 돌아 온 박유성은 습관처럼 루틴을 실행했다.
‘어쩌면 루틴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방금 전 2구 때는 일부러 루틴을 생략했는데 하던 걸 안하다보니 뭔가 리듬감이 틀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수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박유성은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김진수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오자 끝까지 기다렸다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몸 쪽 슬라이더!’
우투수 기준으로 슬라이더는 좌타자의 몸 쪽으로 꺾여 들어온다.
사이드암의 경우 거기에 횡적인 무브먼트가 추가되기 때문에 타이밍이 조금만 늦어도 정타를 때려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히팅 타이밍을 앞쪽으로 끌어 당겼는데
따악!
이번에도 타구가 1루 쪽으로 휘어 나갔다.
“미치겠네. 왜 안 맞는 거야?”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선 박유성은 가볍게 방망이를 돌려보았다.
경기 전에 배팅볼을 칠 때 까지만 해도 타격감은 괜찮았다.
프로 때 쓰던 배트보다 가벼워서 감을 잡는 데 애를 먹긴 했지만 김진수의 공정도는 얼마든지 때려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타석에 서니까 타이밍이 맞질 않았다.
‘특별히 공이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뭐가 문제일까.’
박유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타석으로 복귀했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태산 고등학교 포수 김세찬은 박유성이 몸 쪽 공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변태적으로 몸 쪽 공에 집착한다는 데이터가 맞았네. 그렇다면······ 이제 끝을 내 보실까?’
박유성이 연달아 파울을 때려내면서 원 볼로 출발했던 볼카운트는 원 볼 투스트라이크로 바뀐 상태였다.
여기서 김진수의 주무기인 싱커를 꽂아 넣는다면?
프로 흉내나 내던 박유성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세찬의 사인을 받은 김진수도 피식 웃었다.
흥분하면 싱커가 몰리는 편이라 일부러 아껴두었는데 드디어 꺼내들 순간이 온 것이다.
‘삼진 먹고 벤치 가서 욕이나 바가지로 쳐 먹어라.’
짧게 숨을 고른 김진수가 투구판을 박찼고.
후앗!
김진수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미트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자 김세찬이 씩웃었다.
‘이건 못 쳐.’
포심 패스트 볼처럼 날아가다 마지막 순간에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살짝 가라 앉는 김세찬의 싱커는 몸 쪽 공을 좋아하는 좌타자들에게 빠지는 공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반응하면 헛스윙이 날 테고.
가만히 지켜보면 프레이밍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이끌어 내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갑자기 박유성이 빠르게 허리를 돌리더니
따악!
막 휘어져 나가려는 공을 가볍게 쳐냈다.
코스가 좋아서 파울이 나긴 했지만 김세찬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야? 처음부터 싱커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운 좋게 걷어냈다고 여기기에는 완벽하게 걷어냈기 때문이다.
3루 쪽 벤치에서 박유성의 타격을 지켜보던 태산 고등학교 민호석 타격 코치도 눈을 치떴다.
“싱커가 들어오리라고 예상을 한 건가? 저 녀석 제법인데?”
파울 하나로 여러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지만 정작 박유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안 맞네. 뭐가 문제야?’
1회차 시절 박유성의 가장 큰 약점은 바깥쪽이었다.
우투수 좌투수 가리지 않고 몸 쪽 공은 곧잘 때려내는 반면 바깥쪽으로 예리하게 파고드는 공은 정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프로에 올라가서 미친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코치들은 타격 폼을 뜯어고치자고 말했지만 박유성은 오기와 끈기로 싸우고 버티며 바깥쪽을 정복해냈다.
그래서 바깥 쪽 싱커가 들어왔을 때 좌익선상에 떨어지는 라이너 성 타구를 머릿속에 그렸건만.
‘이게 아닌데.’
박유성은 다시 허공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훙! 후웅!
계속 파울만 쳐서일까.
스윙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경박한 느낌이 들었다.
“타임.”
“······?”
“선배님. 배트 좀 바꿔도 되겠습니까?”
“그래. 다녀 와.”
구심은 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의 루틴을 따라하는 건 조금 꼴사나웠지만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자신을 꼬박꼬박 선배님이라 부르는 게 기특해서 마음에 들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 온 박유성은 장태산의 가방에서 새 방망이를 꺼냈다.
“야 인마! 내 가방이야!”
“알아.”
“아는데 그걸 왜 꺼내? 그거 신상이라고!”
“알아.”
“야 이 미친놈아!”
장태산이 뭐라거나 말거나 박유성은 좌우로 방망이를 휘둘러봤다.
프로에서 쓰던 것보다 배트 길이가 짧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체감적으로 1회차 시절에 쓰던 배트보다는 살짝 무겁고 2회차 시절에 쓰던 배트와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좋아. 너로 결정했어.”
“누구 맘대로!”
“나중에 새 걸로 하나 사 줄 테니까 그만 좀 징징거려.”
“나중에 언제?”
“프로 계약금 받으면?”
“개소리 말고 내려 놔. 쓸 거면 이거 쓰라고!”
“난 남의 손 떼 탄 배트는 부정 타서 안 쓴다.”
장태수를 가볍게 무시한 뒤 박유성은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훙! 후웅!
다시 한 번 방망이를 휘둘러봤는데 스윙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묵직해졌다.
‘일단은 급한 대로 써야겠다.’
박유성이 새 방망이를 들고 오자 김세찬이 타임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마운드로 뛰어가 김진수에게 전했다.
“저 녀석, 무거운 방망이를 들고 왔어.”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흥분하지 말고. 변화구로 끝내자.”
“변화구?”
“타자들은 방망이가 조금만 무거워져도 스윙이 둔해져.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무시해 버려.”
“좋아. 그럼 커브로 잡아내자.”
작전 회의를 마친 김세찬이 다시 포수석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그립을 고친 김진수는 김세찬의 사인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빠르게 공을 던졌다.
초구와 2구는 빠른 공.
3구 슬라이더에 이은 4구 싱커.
결과적으로 공 4개가 빠른 공이다보니 백도어 성으로 들어가는 낙차 큰 커브에 속수무책 당할 줄 알았는데
따악!
박유성은 힘들이지 않고 3유간을 꿰뚫었다.
“에잇. 감 잡아야 하는데 커브를 던지고 난리야.”
1루로 나간 박유성이 투덜거렸다. 내심 빠른 공을 기다렸는데 커브가 들어왔으니 김이 팍 새버렸다.
“좌중간을 가르는 멋들어진 장타를 때려내고 싶었단 말이다.”
관중도 없이 진행되는 연습 경기이고 3학년들이 졸업하면 주전이 확정인 상황이지만 박유성은 3회차 시절의 첫 단추를 잘 꿰고 싶었다.
아직 근육이 붙지 않아서 홈런은 무리더라도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만 한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고작 단타로 그치고 나니까 오기가 발동했다.
“두고 봐 김진수. 제대로 괴롭혀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