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8화
02. 뭐야, 저 녀석? (2)
뒤로 넘어가는 타구는 빠른 발을 이용해 얼마든지 쫓을 수 있으니 좌우로 빠르게 빠지는 타구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았다.
그런 움직임이 벤치에 서 있던 신기남 주루 코치의 눈에 들어왔다.
“음? 뭐야?”
눈에 힘을 주고 박유성의 수비 위치를 확인한 신기남 주루 코치가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다가왔다.
“수석 코치님. 유성이 수비 위치가 바뀌었는데요?”
“알아. 나도 봤어.”
“혹시 수석 코치님이 주문하셨습니까?”
“내가 저렇게 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유성이는 신경 쓰지 마.”
“아, 넵. 알겠습니다.”
김석률 수석 코치의 말에 신기남 주루 코치는 군 말 없이 물러났다.
비록 신성 고등학교 사령탑은 나승균 감독이지만.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고 있는 건 나승균 감독이 데려 온 후배, 김석률 수석 코치였다.
오늘 이 경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틀어 김석률 수석 코치만큼 커리어가 탄탄한 사람은 없었다.
전성기 때 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은 짧았지만 부상 없이 활약했다면 준레전드소리는 들었을 거라는 게 현장의 평가였다.
김석률 수석 코치는 은퇴 이후에도 방황하지 않고 일본과 미국으로 자비 연수를 다녀오기까지 했다.
아직 지도자 경력이 짧아서 신성 고등학교에 남아 있지만 조만간 프로 팀에 불려갈 가능성이 높다 보니 신기남 주루 코치를 비롯한 다른 코치들도 김석률수석 코치를 감독 대하듯 했다.
그렇다고 김석률 수석 코치가 월권을 즐기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1번 타자니까 수비 위치를 앞으로 당긴 건가? 흠······. 지원이가 경기 초반에 제구가 안될 거라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빗맞은 타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겠어.’
만약에 다른 선수가 지시도 없이 수비 위치를 변경했다면 바로 타임을 불렀겠지만.
앞서 지옥의 펑고를 완벽하게 클리어 한 박유성이다보니 저 정도 재량권은 줘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따악!
원 스트라이크 투 볼.
작심하고 던진 슬라이더가 볼 판정을 받으면서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한복판 높게 던진 빠른 공을 고연규가 건드렸을 때.
“빠졌다.”
태산 고등학교 김민철 감독은 안타를 직감했다.
2루수와 중견수 사이.
장타력은 없지만 공을 맞춰 내는 재주가 있는 고연규가 가장 많은 안타를 만들어내는 코스였다.
“젠장!”
공을 던진 손지원도 안타를 직감하고 얼굴을 구겼다.
오늘 공이 좋다는 박유성의 말이 떠올라서 일부러 정면 승부를 걸었던 건데 너무 성급했다는 후회가 치밀었다.
그런데 1루를 향해 내달리던 고연규의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다시 홈플레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손지원이 뒤늦게 외야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박유성이 타구가 떨어져야 할 위치에 우뚝 서 있었다.
“재윤야. 뭐야? 잡힌 거야?”
“네. 선배님. 유성 선배님이 가볍게 처리하셨습니다.”
“가볍게?”
1학년 유격수 이재윤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지만 손지원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 산을 마운드로 호출했다.
“왜? 어디 안 좋아?”
“방금 어떻게 잡은 거야?”
“아, 그거? 유성이가 수비 위치를 당겼더라고. 그래서 바로 잡던데?”
“아, 그래?”
“그러니까 너무 쫄지 마. 오늘 공 좋다니까? 우리 믿고 힘 내 인마.”
김 산이 포수 미트로 손지원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벤치에서 따로 사인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살짝 위험했던 공이 먹혔으니 조금 더 자신 있게 던져도 될 것 같았다.
“오늘 진짜 되는 날인가?”
손지원도 긴장을 털어내고 태산 고등학교의 2번 타자 홍세혁을 상대했다.
초구에 바깥 쪽 꽉 찬 151km/h 짜리 포심 패스트 볼을 꽂아 넣고.
2구 째 비슷한 코스의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한 뒤 3구에 다시 몸 쪽 빠른 공을 찔러 넣자 홍세혁이 꼼짝을 못했다.
“나이스 피칭!”
홍세혁을 3구 삼진으로 돌려 세운 손지원을 보며 박유성이 크게 소리쳤다.
외야에서 외친들 내야수들의 파이팅만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손지원이 씩씩하게 던지는 모습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태산 고등학교의 3번 타자 김재석이 들어오자 박유성이 바로 우익수김병욱에게 다가갔다.
“병욱아! 라인으로 붙어.”
“뭐?”
“라인으로 붙으라고. 여긴 내가 커버할 테니까 라인 확실히 지켜. 알았어?”
“그래주면 나야 좋지.”
장차 장태수와 함께 클린업을 쳐 줘야 하는 김병욱은 수비가 약했다.
본래 3루로 시작했다가 어쩔 수 없이 외야로 전향했는데 걸음도 느리고 타구판단 능력도 떨어져서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가 없었다.
반면 프로에서 제법 활약했던 김재석은 전형적인 풀히터.
괜히 정석으로 수비를 하다가 우익 선상으로 빠지는 타구가 나와 버리면 2루타 그 이상도 허용할 수 있는 만큼 김병욱의 수비 위치를 조정해 준 것이다.
박유성에 이어 김병욱까지 움직이지 신기남 수비 코치가 다시 김석률 수석 코치를 바라봤고.
김석률 수석 코치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올렸다.
‘2번을 삼진으로 잡았으니까 지원이도 자신감이 생겼을 거야. 이럴 때 조심해야 하는 게 장타인데 유성이가 제대로 판단했어.’
설사 김재석의 타구가 틈이 벌어진 좌중간으로 향하더라도 타자의 타격 스타일을 염두에 둔 수비 포지션은 나무랄 게 없었다.
솔직히 저런 건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코치들의 지시를 받는 것을 넘어서서 나름 타당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예측하는 야구 머리와 습관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김석률 수석 코치도 박유성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산아!”
포수 김 산을 호명한 김석률 수석 코치가 몸 쪽 승부를 지시했다.
수비 위치를 바꿔놓고 도망치는 피칭을 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박유성과 김병욱의 위치를 확인한 김 산도 벤치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몸 쪽 공을 요구했다.
초구에 150km/h의 빠른 공을 깊숙이 찔러 겁을 한 번 주고.
2구 째 몸 쪽 낮은 코스의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뒤 3구 째 바깥 쪽 빠른 공으로 타자의 시야를 환기시켰다.
김재석이 3구를 건드려주지 않는 바람에 볼카운트가 투 볼 원 스트라이크로 불리해졌지만.
‘잡을 수 있어.’
김 산은 당황하지 않고 몸 쪽 낮은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후우······.”
길게 숨을 몰아쉰 손지원도 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에 가서 살아남으려면 좌타자의 몸 쪽으로 과감하게 공을 떨어뜨릴 줄 알아야 하는 법.
‘속아라. 꼭 속아라.’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손지원이 있는 힘껏 공을 뿌렸다.
하지만 손지원이 변화구를 던질 거라 예상한 김재석은 당황하지 않고 무릎 높이의 공을 퍼 올렸다.
따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머리 위로 치솟자 우익수 김병욱이 주춤거렸다.
타구 소리만으로는 방망이 끝에 걸린 건지 제대로 맞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유성이 크게 소리쳤다.
“그 자리에서 스톱!”
“······?”
혹시 몰라 뒷걸음질을 치려던 김병욱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 헷갈리게 만들던 공이 예쁘게 글러브 안으로 쏙 빨려 들어왔다.
“젠장할.”
1루 베이스에 서서 타구를 지켜보던 김재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타구가 다소 빗맞긴 했지만 코스가 좋아서 잘 하면 안타로 이어질 줄 알았는데 너무나 쉽게 잡혀버린 기분이었다.
김재석의 타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김민철 감독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바람이 부나? 저게 왜 안 뻗는 거야?”
“방망이 끝에 맞은 것 같습니다.”
“우리 재석이 파워라면 방망이 끝에 걸려도 장타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아직 경기 초반이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어대는 김민철 감독을 달래며 한우열 수석 코치가 반대 편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신성 고등학교 더그아웃도 1회 초 수비를 깔끔하게 막은 걸로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크으, 방금 체인지업은 예술이었어. 안 그래?”
“네. 기가 막히게 잘 떨어진 것 같습니다. 감독님.”
“이러다 우리 지원이 1차 지명으로 뽑히는 거 아니야?”
“감독님. 아직 1회 초입니다. 조금만 진정하시죠.”
김석률 수석 코치가 만류했지만 기분파인 나승균 감독은 듣지 않았다.
“손지원! 이리 와!”
“네?”
“짜식. 잘 했어. 그렇게만 해. 알았지?”
“넵! 감독님!”
손지원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손지원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사이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을 불렀다.
“이 녀석아. 누가 멋대로 수비 위치를 조정하래?”
“엇. 보셨어요?”
“보셨어요? 보셨어요오오?”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요?”
“어휴, 이런 게 뭐가 예쁘다고. 내가 신 코치한테는 잘 말 해 놨으니까 지금처럼 해. 잘 모르겠으면 벤치로 사인 보내고.”
“넵. 코치님.”
“그리고 내가 아까 한 말 잊지 않았지?”
“그럼요. 맞아서라도 나가라고 하셨잖아요.”
“이 놈아. 내가 언제 그렇게 말 했어?”
김석률 수석 코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시 까불거리는 박유성을 붙잡고 단단히 정신 교육을 하고 싶었지만.
불행이도 1번 타순에 직접 이름을 올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안타 칠거니까요.”
2회차 시절에 하도 맞아서 사구라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3회차 첫 타석을 몸에 맞는 공으로 기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방망이를 집어 든 박유성이 바로 타석으로 나갔다.
“이 분위기를 살려야 할 텐데.”
김석률 수석 코치가 불안한 눈으로 박유성을 바라봤다.
앞서 수비할 때처럼만 해주면 참 좋겠지만.
박유성이 기대만큼 잘 했다면 선배들을 제치고 진즉에 주전으로 뛰었을 것이다.
게다가 태산 고등학교의 선발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시킨 사이드암 김진 수였다.
펑!
퍼엉!
김진수의 연습 투구를 지켜 본 김민철 감독이 씩 웃었다.
비록 1회 초 득점은 무산됐지만 좌우로 완벽하게 코너 워크가 되는 김진수의 공을 보니까 오늘 경기에서 질 자신이 없어졌다.
“신성 애들이 우리 진수 공을 칠 수 있을까?”
“두 타순 이상 돈 다음이라면 모를까 처음에는 적응 못할 겁니다. 워낙에 움직임이 좋아서요.”
“내가 그래서 진수 받은 거잖아. 솔직히 홍준영이보다 진수가 낫지 않아?”
“당장 실력은 홍준영이 조금 낫겠지만 발전 가능성은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실력도 저만하면 비빌 만하지 뭘 그래? 고 코치. 설마 전학 왔다고 차별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잘 해 줘. 기회를 잡고 싶어서 꼬리표까지 달고 전학 온 녀석이니까.”
김진수의 갑작스러운 이적을 두고 다른 학교에서 말이 많다지만 김민철 감독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직접적인 폭행이던 가벼운 훈육이던 당사자가 부당하다고 느꼈다면 폭력인 것이다.
협회에서도 전학 사유로 인정을 해 준 만큼 김진수를 잘 품고 성적을 내면 그만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야. 누가 그런 식으로 애들을 가르치나?”
청라 고등학교 박재혁 감독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박재혁의 박자만 나와도 치를 떠는 김진수의 부모를 봤을 때 박재혁 감독이 잘못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