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7화
02. 뭐야, 저 녀석? (1)
1
점심을 배불리 먹으면 슬슬 졸음이 밀려드는 오후 3시.
“자, 내리자.”
태산 고등학교 야구부 버스가 신성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한우열 수석 코치를 필두로 코치들과 선수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렸다.
그 때까지 딱히 볼 것도 없는 전략분석 자료를 내려다보던 김민철 감독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민호석 타격 코치의 말을 듣고서야 무겁던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감독님 나오신다. 전부 차렷! 열중 쉬엇!”
김민철 감독의 등장에 맞춰 주장 김재석이 분위기를 다잡았다.
그렇게 바짝 긴장한 선수들 앞으로 김민철 감독이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뭐야? 다들 긴장한 거야?”
“아닙니다!”
“긴장한 거 아니지? 오늘 이겨 줄 거지?”
“넵!”
“그래. 너희들만 믿는다.”
주장인 김재석과 코치들을 통해 선수들을 다잡고 있지만 김민철 감독은 늘 형님 리더쉽을 강조했다.
말을 부드럽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지만.
일선 지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만큼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컸다.
그래서 전임 감독이 하지 않았던 쓸 데 없는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 여길 봐라.”
김민철 감독이 버스 옆면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태산처럼 크고 강하게,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김민철 감독은 이 캐치프레이즈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개나 소나 외치는 우승 타령보다 뭔가 미래 지향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산은 말 그대로 높은 산이다. 산은 흔들림이 없다. 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지. 모름지기 야구는 그래야 한다. 화려한 플레이도 좋지만 기본에 충실해서 단단하게! 그래야 실수가 적고 승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알겠나?”
“넵!”
“자, 다들 어깨 펴고! 당당하게 들어가자!”
“넵!”
일장연설을 끝낸 김민철 감독은 앞장서서 신성 고등학교 야구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민철 감독을 따라 코치들과 선수들이 2열 종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지만.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승균 감독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감독님. 선수들이 듣습니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저게 뭐야, 저게. 조폭들도 아니고 원.”
“그래도 태산의 기세가 상당해 보입니다.”
김석률 수석 코치가 애써 포장을 했다.
마치 점령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건 못마땅했지만 선수들의 눈빛만큼은 확실히 살아 있었다.
그러자 나승균 감독이 혀를 쯧쯧 차댔다.
“보나마나 또 며칠간 닦달을 했겠지. 지면 가만 안 둔다고 말이야. 감독 잘못 만나서 쟤들도 무슨 고생이야? 안 그래?”
태산 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는 1주일 전에 잡혔다.
하지만 나승균 감독은 태산 고등학교에서 그보다 먼저 자신들과의 연습 경기를 준비해 왔을 거라 확신했다.
“저 놈이 김진수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뺀질뺀질하게 생긴 게 딱 태산 상이야.”
“태산 상도 있습니까?”
“태산은 기업 이미지부터가 그렇잖아. 12구단 창단 때도 슬그머니 발 뺐고.”
신성 그룹이 프로야구 11번째 구단을 창단에 나섰을 때 태산 그룹도 경쟁하듯 뛰어들었다.
그룹 규모는 신성 그룹이 태산 그룹보다 배 이상 컸지만 왠지 모르게 라이벌관계를 유지하다보니 언론에서도 태산 그룹이 고춧가루를 뿌리려 들 거라 예상했고 실제로 태산 그룹도 TF팀을 가동해 프로야구 협회에 창단 의향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태산은 왜 빠진 겁니까?”
“협회가 잔머리를 썼거든.”
“잔머리요?”
“사실 프로 스포츠 구단은 돈 먹는 하마잖아. 짱짱한 모기업 없이는 유지하기도 쉽지 않고. 그런데 신성에 태산까지 나섰으니까 12구단도 가능하겠다고 판단한 거야. 그래서 11구단은 신성, 12구단은 태산으로 교통정리를 했던 건데 태산이 자존심이 상한 거지.”
“신성에게 밀리는 건 싫다는 거였네요.”
“상식적으로 11구단과 12구단을 동시에 창단하는 쪽으로 밀어붙여야 정상인데 협회 철밥통들이 일을 하나? 11구단만 생각하고 있다가 12구단 체제가 되어버리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 싫었던 거야.”
“12구단은 또 지방 배정이었잖습니까.”
“그렇지. 호남에 야구팀은 타이거즈 하나뿐이니까 전주를 연고지로 확정했는데 태산이 그걸 받겠어? 신성은 서울 입성인데?”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네요.”
“뭐 태산이 프로야구 판에 들어왔으면 파이터즈보다는 나을 수도 있었겠지.
근데 지금 우리가 프로야구 걱정할 때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애들도 컨디션 좋습니다.”
3학년이 졸업하면서 팀의 주축이 되어주어야 할 박유성과 장태수가 솔선수범을 보여주어서일까.
오전 훈련 분위기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태산 고등학교에서 김진수라는 히든카드를 뽑아들었지만 기세만으로는 신성고등학교도 충분히 해 볼만 했다.
“나는 김 코치만 믿어.”
“저기 태산 감독 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승균 감독이 더그아웃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김민철 감독이 발걸음에 속도를 높여 다가왔다.
“어이구, 감독님. 못 뵌 사이에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요즘 무슨 좋은 일있으십니까?”
“신수는 무슨. 그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좀 봐 주세요. 저희도 위에서 쪼아대서 죽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잡은 경기 치고 김진수는 반칙 아닌가?”
“아, 진수요? 저 녀석이 또 사연이 많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됐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이게 뭐야 이게.”
나승균 감독은 김민철 감독이 싫었다.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주제에 같은 감독이랍시고 까부는 것도 싫고 신성 고등 학교보다 태산 고등학교가 한 수 위라고 떠들어대는 것도 싫었다.
김민철 감독은 그걸 일종의 신경전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어디 주전 한 번 못해본 놈이.’
벤치 멤버를 전전하다 서른도 되지 않아 옷을 벗은 김민철 감독과 나름 프로 야구 1군 커리어가 화려한(?) 자신은 급이 다르다고 여겼다.
김민철 감독도 나승균 감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인간은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나승균 감독이 나이와 대단치 않은 프로 경력을 앞세워 대접받으려 드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진수를 운운하는 것도 역겨웠다.
지난 신산전(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 간의 경기)에서 신성 고등학교는 에이스 투수를 앞세워 승리를 빼앗아갔다.
본래라면 다른 팀과의 경기 때 에이스가 등판해야 했지만.
태산을 잡기 위해 선발 로테이션까지 바꾸는 비겁한 꼼수를 쓴 것이다.
결국 3대 1로 경기를 내주게 됐고.
그 여파로 형님처럼 모시던 유강찬 감독이 팀을 떠나게 됐다.
김민철 감독은 아직 그 날의 경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내로남불도 유분수지 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여보쇼.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웃는 얼굴로 악수까지 마친 김민철 감독은 홱 하고 3루 쪽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렸다.
그 사이 김석률 수석 코치와 한우열 수석 코치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버스 안타고 걸어와도 30분이면 올 텐데요.”
“준비는 잘 하셨습니까?”
“우리보다 신성이 좀 걱정이네요.”
“저희 애들도 열심히 했으니까요. 서로 좋은 경기 하시죠.”
“네. 서로 파이팅입니다.”
그렇게 기본적인 인사를 마치고.
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 간의 3번째 신산전이 시작됐다.
글러브를 들고 외야로 나가던 박유성은 마운드 위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는 손지원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짜식이 너무 긴장했는데?’
1회차 시절.
손지원은 경기 초반 볼넷을 남발하다 선취점을 내줬다.
최고 152km/h까지 찍히는 포심 패스트 볼은 프로 스카우트들도 눈여겨볼 정도였지만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 때 2점이었나, 3점이었나? 암튼 이번에도 먼저 점수를 내주면 골치아픈데.’
딱히 손지원과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경기를 꼭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박유성은 마운드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야. 지원아.”
“······?”
“너 아까 보니까 공 좋더라.”
“뭐?”
“공 좋다고. 막말로 2학년들 중에 너만큼 빠른 공 던지는 투수 없거든? 그러니까 자신 있게 던져. 외야로 오는 타구는 내가 책임지고 잡아 줄 테니까.”
뜬금없이 다가와서 엉덩이를 때리고 사라지는 박유성을 보며 손지원은 말없이 눈만 끔뻑였다.
‘뭐야 박유성.’
원래 저런 캐릭터가 아닌데.
오늘따라 뭘 잘못 먹은 건가 싶었다.
평소에 박유성이 이랬다면 코웃음을 치고 말았을텐데.
‘아까 보니까 수비가 많이 좋아지긴 했어.’
지옥의 펑고에서 가볍게 탈출한 걸 두 눈으로 보고 나니까 괜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 때 김석률 수석 코치와 포수 김 산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지원아. 많이 떨리지?”
“네?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차피 저 쪽도 2학년들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맞아도 괜찮으니까 자신 있게 던지고. 알았지?”
“네. 코치님.”
“그래. 산이 너도 리드 확실히 해 주고.”
“넵!”
손지원과 김 산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린 뒤 김석률 수석 코치는 외야 쪽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센터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박유성에게 향했다.
‘진짜 뭐야, 저 녀석.’
평소 손지원은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자체 청백전처럼 익숙한 타자들을 만나면 그나마 낫지만.
낯선 타자들을 상대할 때면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 공을 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마운드에 올라왔던 건데.
박유성이 마운드를 다녀간 사이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태수가 아니라 유성이에게 주장을 맡겨야 하나?’
조만간 전국체전이 끝나면 졸업하는 3학년들을 대신해 새로운 주장을 뽑아야 했다.
나승균 감독은 팀의 중심 선수가 주장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
그 지론대로라면 장차 신성 고등학교 타선을 이끌어야 하는 장태수가 주장으로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김석률 수석 코치도 그 의견에 딱히 반대할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박유성이 하는 걸 보니까 고민이 됐다.
주장은 실력적으로도 모범을 보여야 하지만 오지랖 넓게 다른 선수들도 챙길 줄 알아야 하는 법.
그렇다면 평소 까불까불한 박유성을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2
김석률 수석 코치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포수 김 산도 포수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태산 고등학교의 1번 타자 고연규가 타석에 들어왔다.
“저 녀석은······ 프로에 못 갔지?”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보던 박유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12개 구단이 뽑는 신인 선수는 1차 드래프트(우선 지명)를 포함해 132명.
서울 지역 고등학교만 24개이고 한 해 졸업생이 300명에 달하는 만큼 모든 선수가 다 프로에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억하기로 고연규는 대학까지 갔다가 프로의 꿈을 접었다.
그걸 바꿔 말하자면 대학까지는 갈 실력이었다는 뜻이겠지만 프로야구에서만 40년을 뒹굴었던 박유성에게는 명함도 내밀기 어려웠다.
“장타력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
박유성은 평소보다 대여섯 걸음 정도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