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6화
01. 인생 3회차 (5)
8번이었던 박유성을 전진 배치시키고.
4번 장태수를 3번으로 끌어올리는 정도로 라인업 변경을 끝냈다.
1학년들에게 기회를 주기에는 이번 연습 경기의 무게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다음 날.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을 따로 불러 당부했다.
“유성아. 너 오늘 1번이다.”
“네.”
“1번 타자라고. 첫 타자.”
“네.”
“이 녀석이? 너 내말 듣고 있는 거야?”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1회차 시절의 대부분을 톱타자로 살아 온 박유성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1번 타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이 녀석아. 너 오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알죠. 태산전이잖아요. 절대 지지 말아야 하는 경기.”
“그걸 아는 녀석이 이래?”
“저 지금 엄청 진지한데요?”
“뭐? 진지?”
김석률 수석 코치가 코웃음을 쳤다.
코치로서 2년 가까이 박유성을 지켜 봐 왔지만 진지함과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김석률 수석 코치 앞에 서 있는 박유성은 그가 알고 있던 박유성이 아니었다.
“절 믿고 1번 타자를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치님. 무조건 안타치고 나갈 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박유성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2회차 시절 때야 겨울 방학 직전으로 돌아와서 태산 전의 아쉬운 플레이를 만회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예전처럼 1번 타순으로 전진배치 된 만큼 3회차의 존재감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평소 박유성의 모습만 기억하는 김석률 수석 코치는 박유성이 입만 살았다고 여겼다.
“잘 들어. 테이블 세터는 안타가 중요한 게 아냐. 일단 어떻게든 출루를 해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제대로 밥상을 차려 놓겠습니다.”
“공도 최대한 많이 지켜봐야 해. 네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김진수를 빨리 강판시킬 수 있어.”
“네. 좋은 공만 노리고 유인구에 속지 않겠습니다.”
올 시즌 대주자로 몇 번 출전한 게 전부인 박유성이 깐족거리자 사람 좋은 김석률 수석 코치도 더는 참지 못했다.
“너 이 자식. 글러브 챙겨.”
“네?”
“지옥의 펑고다. 너 하나라도 놓치기만 해!”
김석률 수석 코치가 펑고 배트를 꺼내 들자 주변에 있던 선수들이 바짝 긴장했다.
“야, 야! 지옥의 펑고다!”
“헐, X발. 아직 제대로 몸도 안 풀었는데.”
한 번 펑고를 시작하면 만족할 때 까지 훈련을 시키는 김석률 수석 코치 성격상 찍혀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에서만 40년 간 펑고를 받아 온 박유성에게는 워밍업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김 코치님 펑고 좀 받아보실까?”
종종걸음으로 외야로 나간 박유성은 센터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신성 고등학교의 연습장은 외야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본래 외야 펜스 밖으로 주차장을 만들었었는데 짧은 담장을 넘어간 타구에 파손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주차장 공간을 밀고 펜스를 뒤로 밀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김석률 수석 코치의 지옥의 펑고가 시작되면 내야수들보다 외야수들이 질색했다.
박유성도 1회차 때는 지옥의 펑고를 피하기 위해 김석률 수석 코치를 눈치껏 피해 다녔다.
하지만 다시 3회차를 시작하게 된 박유성은 지옥의 펑고가 아니라 그 이상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코치님! 맘껏 치십시오!”
홈플레이트 앞쪽으로 나온 김석률 수석 코치를 향해 박유성이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울렸다.
“헐, 우중간!”
“저건 빠졌다.”
뻗어나가는 타구를 보며 선수들이 수군거렸다.
박유성의 발이 빠르다 해도 스타트를 바로 끊지 못했으니 키를 넘어갈 것 같은 우중간 타구를 잡아내지는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은 최단거리를 계산해 사선으로 내달린 뒤에 팔을 쭉 뻗어 공을 잡아냈다.
“어이구야, 저걸 잡았어?”
때마침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승균 감독이 탄성을 내뱉었다.
빠질 듯 한 공을 끝까지 쫓아간 박유성의 움직임이 꼭 프로 선수처럼 보였던 것이다.
펑고를 친 김석률 수석 코치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걸 잡아?’
방금 타구는 일부러 빠지는 코스로 쳤다.
박유성의 까불까불한 성격을 잡으려면 초반부터 엄하게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유성이 그 타구를 잡아냈다.
특별히 스타트가 빨랐던 것도 아닌데 빠져야 할 공을 건져 올렸다.
“아니야. 운이 좋았을 거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내며 김석률 수석 코치는 다시 펑고를 날렸다.
따악!
이번에는 좌중간으로 짧게.
타격과 동시에 스타트를 끊지 않는 한 절대 잡지 못할 코스였는데
“······!”
박유성이 사선으로 몸을 날려 타구를 낚아챘다.
“뭐야, 저 녀석. 유성이 맞아?”
김석률 수석 코치가 입을 쩍 벌렸다.
사실 방금 타구는 프로 선수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정확한 낙구 지점을 판단한 뒤에 정확한 타이밍에 안정적인 자세로 몸을 날려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 프로 야구 경기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게 바로 외야수 바로 앞에 뚝떨어지는 안타다.
타이밍 상 슬라이딩 캐치를 시도해 볼 만 하더라도 공이 빠지면 장타로 이어지기 때문에 수비 좀 한다는 프로 선수들도 쉽게 몸을 날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 정석적인 움직임을 발로만 수비하던 박유성이 보여줬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멋드러진 슬라이딩 캐치를 선보인 박유성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헐. 이게 되네? 역시 젊은 게 최고야.”
사실 방금 전 타구는 잡으려고 뛰어든 게 아니었다.
지난 40년 간 외야수로 활약하다 보니 타구가 눈에 들어왔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한 김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 번 덤벼 본 것이다.
그런데 1회차 시절 한창 수비가 잘 될 때처럼 몸이 움직였다.
낙구 지점 포착 후 다이빙을 통한 캐치와 안전한 슬라이딩까지.
40년차 외야수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발동한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스타트.
2회차 시절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무릎이 좋지 않아서 최대한 안전하게 수비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래서인지 타구 반응이 느려 터졌다.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면 뭐 고교 리그 정도는 찜 쪄 먹을 테니까.”
다시 제 자리로 돌아 온 박유성이 오른 손을 높이 흔들었다.
그러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다시 날카로운 펑고를 날렸다.
따악!
따악!
따아악!
어디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김석률 수석 코치는 운동장구석구석을 노렸다.
그 때마다 박유성은 조금씩 늦게 움직였지만.
“나이스 캐치!”
“와, X발. 저것도 잡는다고?”
“미쳤네. 유성이 뭐 잘못 먹었냐?”
“오늘 주사위 6 뜬 거 같은데?”
모든 타구를 잡아내며 주변의 감탄을 자아냈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김석률 수석 코치는 땀을 닦는 척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비볐다.
10년 가까이 아마추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지만 박유성 같은 녀석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비교 대상 자체가 없어 보이고.
대학교 레벨로 올라가도 최고 수준이었다.
오늘따라 반응 속도가 늦는 게 아쉽지만.
본래 하던 대로 눈 맞은 개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면 수비 능력 하나만으로 프로 구단들의 눈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유성!”
김석률 수석 코치가 들어오라고 크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술렁술렁 홈플레이트로 다가왔다.
“끝났나요?”
“왜? 진짜 한 번 끝까지 해 줘?”
“코치님. 살려 주세요. 죽을 거 같아요.”
“그런 말을 그딴 얼굴로 하면 내가 짜증나지 않을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김석률 수석 코치의 으름장에도 박유성은 실실 웃어댔다.
정확하게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3회차를 시작한 것도 신이 나는데 40년 짬의 수비 능력을 선보여 줬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잘해질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아직 3회차 박유성에게 적응하지 못한 김석률 수석 코치는 다시 박유성이 얄미워졌다.
“진심 같은 소리 한다. 넌 앞으로 진심 금지.”
“넵. 코치님.”
“가 봐.”
“그럼 지옥의 펑고는 끝인가요?”
“이 녀석이? 진짜 제대로 굴려 줘?”
“아직 지옥불이 안 꺼졌으니까 저 대신 다른 놈을 굴리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다른 놈? 누구?”
“요즘 태수가 수비를 술렁술렁하던데 말이죠.”
“그래?”
박유성의 고자질에 장태수가 운동장으로 불려 올라갔고.
따악!
“다시!”
따악!
“장태수! 정신 안 차려?”
김석률 수석 코치와 함께 30분 간 지옥에서 뒹굴어야 했다.
“야! 박유성!”
“왜?”
“너지? 네가 그랬지?”
“뭔 소리야?”
“네가 코치님한테 내 얘기 한 거잖아. 아니야?”
먼지투성이가 된 장태수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잔디가 곱게 깔린 외야와 달리 내야는 프로에서 쓴다는 흙이 깔려 있어서 슬라이딩을 몇 번만 해도 유니폼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외야를 선택했지.’
중학교 때 까지 유격수를 보던 박유성이 외야 전향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김석률 수석 코치의 지옥의 펑고에 내야수들이 구르는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프로에서만 40년 동안 외야수로 뛰게 됐고.
긴 인연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김석률 수석 코치에게 야구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기분이었다.
“생사람 잡지 말고 옷부터 갈아입어라.”
“너 진짜 아니야?”
“아까 수석 코치님이 나 불러서 그러시더라. 오늘 경기는 나하고 너, 둘이 잘해야 한다고.”
“수석 코치님이?”
“그래, 인마. 그래서 내가 먼저 시범적으로 펑고를 받은 거야. 나 다음은 애당초 너였던 거고.”
“진짜야?”
“너 오늘 3번으로 출전하는데 못 들었어?”
“4번이 아니고 3번이라고?”
“오늘 태산 선발 김진수잖아. 사이드암. 좌타자 전진 배치 몰라?”
박유성이 기억하기로 신성 고등학교에는 좌타자가 많지 않았다.
3학년 선배들 중에 절반이 좌타자였어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우타자를 우선 선발했는데 그 여파로 주전급으로 뛸 만한 좌타자들이 확 줄어들었다.
인천 지역에서 제법 이름을 알렸던 우완 사이드암 김진수를 상대로 승기를 잡으려면 좌타자들을 최대한 몰아서 배치해 물고 늘어져야 했다.
“난 4번치고 싶었는데.”
“병욱이가 앞에서 병살 치면 너한테까지 기회가 올까?”
“그럼 홈런 치면 되지.”
“바보냐? 김진수가 너한테 좋은 공을 줄까?”
“아 씨. 그렇네.”
장태수는 연습 경기나마 4번 타자로 출전하고 싶어 했던 모양이지만.
3학년들이 전부 빠진 이상 4번에 욕심내기보다는 팀의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가는 게 옳았다.
과거에도 장태수는 3번으로 출전했다.
비록 타점은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후반에 2루타를 때려내며 팀 분위기를 반짝 끌어올렸던 기억이 났다.
“암튼 내가 나가서 최대한 흔들어놓을 테니까 너도 욕심 부리지 말고 좋은 공만 노려. 알았지?”
“뭐야? 코치야?”
“오늘 경기 지면 감독님 잘릴지도 몰라. 너도 알지? 태산하고 라이벌인 거.”
“뭐? 진짜?”
“다른 감독님 오시면 너 타순 밀릴지도 몰라.”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내 말 듣고 타석에서 집중하라고. 쟤들을 봐라.”
박유성이 운동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태수에 이어 다른 선수들이 지옥의 펑고를 받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영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 경기에서 점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너하고 나밖에 없어.”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팩트야. 그러니까 우리가 잘 해야 한다고.”
“흠······. 뭐 그렇다면야.”
장태수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내지는 않았지만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게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칭찬 고픈 애새끼인 건 여전하다. 장태수.’
40년 넘게 친구로 지냈으니 징글징글할 만 했지만 그래도 박유성은 장태수와 함께 잘 되고 싶었다.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
외야로 전업하라는 제안을 뿌리치고 끝까지 내야에서 싸워 줬기 때문이다.
말로는 외야까지 오가는 게 멀고 귀찮아서라지만.
실제로는 하나 뿐인 동기이자 친구와 경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는 걸 박유성도 모르지 않았다.
“옷부터 갈아입어라.”
장태수의 어깨를 툭 쳐준 뒤 박유성은 스파이크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펑고를 짧게 끝내서일까.
조금 더 예열이 필요했다.
“일단 스무 바퀴만 돌아보실까?”
박유성이 운동장가로 러닝을 시작하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신기남 주루 코치를 불렀다.
“네. 수석 코치님.”
“유성이 러닝 신 코치가 시킨 거야?”
“아뇨.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런데 왜 저래?”
“글쎄요. 오늘 첫 선발 출전이라 들뜬 거 아닐까요?”
신기남 주루 코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록 연습 경기이긴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박유성이 주전으로 뛴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의 가벼움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김석률 수석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야. 뭔가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깐족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이틀 만에 다시 만난 박유성은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보였다.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네?”
“아니야. 아무 것도.”
어느새 펜스 중앙을 지나는 박유성을 보며 김석률 수석 코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촉이 틀리지 않는다면.
오늘 경기에서 박유성이 일을 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