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5화 (5/412)

타자 인생 3회차! 5화

01. 인생 3회차 (4)

2

고등학교 야구 일정은 보통 2차 드래프트 직후 끝이 난다.

2차 드래프트 때 프로 지명을 받은 선수들은 그 때부터 별도의 관리에 들어가고.

지명을 받지 못한 3학년들은 대학 진학 등을 두고 진로 찾기에 전념해야 했다.

고등학교 야구부 대부분이 3학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만큼 3학년들이 빠지면 전력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국체전을 준비하는 각 시도 대표 학교들을 제외하고 다음 해를 위해 재정비의 시간을 갖는 편이었다.

하지만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는 여유를 즐길 틈이 없었다.

영혼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태산 고등학교와의 연습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남들 다 쉴 때 이게 무슨 고생인가 모르겠어.”

신성 고등학교 나승균 감독이 푸념하듯 주절거렸다.

그러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윗선에서도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가 라이벌로 묶인 건 5년 전.

주말리그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연장 13회까지 가는 명승부를 써내면서부터였다.

당시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와 태산 고등학교 야구부는 신생이라 주말 리그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나 청룡기 출전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지구 편성에 행운이 따르면서 왕중왕전 출전 티켓이 걸린 4위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신성 고등학교는 야구부 설립 이래 첫 황금사자기 진출을 응원하기 위해 대대적인 응원단을 조직했고.

이에 질세라 태산 고등학교도 학생들을 동원하면서 1000석 규모의 관중석이 매진되기에 이르렀다.

만원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양 팀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엎치락뒤치락하던 경기는 8회 7대 7 동점을 이루었으며.

승부치기로 진행된 연장 승부에서도 서로 같은 점수를 주고받으며 마지못해 끌려 왔던 응원단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4시간 넘게 이어진 경기는 신성 고등학교의 신승으로 끝이 났다.

13회 말 공격에서 희생 플라이로 결승점을 올린 것이다.

“김 코치는 5년 전 경기 봤어?”

“그 명경기 말씀이시죠? 당연히 봤습니다.”

“명경기는 무슨. 까놓고 말해서 졸전이었어. 투수들은 제구가 안 되어서 볼을 남발하는데 타자들은 선풍기질을 하기 바빴으니까.”

“아무래도 관중들이 많았으니까요.”

“고작 그 정도로 부담감을 느끼면 전국대회는 어떻게 치르려고?”

나승균 감독이 혀를 찼다.

지금이야 한껏 미화되어 있지만 당시 타격 코치로서 현장에서 지켜봤던 경기는 진흙탕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편의 드라마였지 않습니까?”

“뭐 막장도 드라마라면 드라마겠지. 솔직히 그 상황에서 미트 끈이 끊어질 줄누가 알았겠어?”

13회 초를 무실점으로 막은 신성 고등학교는 이어진 13회 말 공격에서 희생 번트를 성공시키며 1사 2,3루의 기회를 만들었다.

점수를 내줄 수 없었던 태산 고등학교 벤치는 곧바로 고의4구를 지시했고.

다시 1루가 채워진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자가 퍼 올린 공이 우익수 앞쪽으로 날아갔다.

“타이밍 상으로는 아웃이었어. 당시 태산 우익수가 황진철이라고 어깨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었거든.”

“얘기 들었습니다. 야구장 끝에서 끝까지 공을 던졌다면서요?”

“그 놈이 마치 투구를 하듯 공을 던졌는데 농담이 아니고 노바운드로 스트라 이크 존으로 들어왔다니까?”

“그런데 그 공이 빠졌고요.”

흔히들 야구를 가리켜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 것처럼 당시의 상황은 태그업을 한 3루 주자가 홈에서 잡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3루 주자가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했고.

포수가 홈플레이트에서 한 발 물러서서 포구를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포수가 제 자리에서 공을 받았다면 그냥 포스 아웃이었어. 만루였으니까.”

“포수 입장은 이해가 갑니다. 공이 빠지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니까 만약을 대비했겠죠.”

“송구를 받고 그대로 홈플레이트만 찍어도 끝났을 텐데 영웅 심리가 발동했던 건지 무리해서 태그를 시도하더라고. 그러다 스파이크 날에 미트 끈이 걸려 끊어진 거야.”

태그에 성공한 포수가 미트를 들어 올리며 포효했지만 구심은 지체 없이 양팔을 벌렸다.

홈플레이트 앞쪽으로 덩그러니 놓인 하얀 공을 본 것이다.

“관중들 중 누군가가 그 장면을 찍어서 미튜브에 올렸는데 그걸로 난리가 났어. 영상만 봐서는 오심처럼 보였거든.”

“기자들이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 했었죠.”

“암튼 그렇게 훈훈한 망게임으로 끝날 뻔 했는데 참······.”

모든 논란이 잠잠해진 직후.

스포츠 의류 전문 기업인 태산 스포츠에서 태산 학원에 수억 상당의 야구 용품을 기부했다.

미트 끈이 끊어진 건 선수 본인의 관리 소홀과 태그를 하려는 욕심, 그리고 레그 벤트 슬라이딩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였지만 후발 주자로 시장에 뛰어든 태산 스포츠에 이보다 좋은 스토리가 없었던 것이다.

미트 끈은 끊어졌지만 당신의 열정은 끊어지지 않도록 태산이 응원합니다.

결과보다 노력에 박수를 쳐주겠다는 태산 스포츠의 슬로건은 곧바로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고.

라이벌 기업인 신성 스포츠를 자극했다.

신성 스포츠도 신성 학원에 수억 상당의 야구용품과 야구발전금을 기부하며 시장점유율 수성에 나섰다.

그러면서 태산 스포츠가 만들어 낸 드라마에 한 발 걸쳤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한 당신에게. 신성이 함께합니다.

문제의 레그 벤트 슬라이딩을 영상화해 광고로 만들면서 태산 스포츠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덕분에 야구부는 좋아졌어. 잔디도 새로 깔았고. 훈련장도 땅을 추가로 매입해 늘렸고.”

“시설만 놓고 따지면 프로 구단에 비견될 정도니까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고. 2군 시설 쯤 되려나?”

“요즘은 2군 시설도 엄청 좋습니다.”

“어쨌거나 고래 등 싸움에 새우만 터지는 꼴이야.”

중간에 많은 이야기가 생략이 됐지만.

태산 스포츠와 신성 스포츠의 라이벌 구도 때문에 현장만 골치 아파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거의 한일전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남들은 그렇게 말하면 욕하겠지만 한일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걸? 전 감독님도 태산 때문에 옷 벗었잖아.”

전국 대회 첫 8강을 견인했던 황인선 감독은 태산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 통보를 받았다.

황인선 감독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만 신성 학원 체육위원회는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회장님이 그 경기를 보셨답니다. 그리고 크게 실망하셨고요.”

황인선 감독을 따라 코칭스테프 대부분이 나가면서 나승균 감독이 감독 자리를 물려받게 됐다.

“한동안 태산 전이 없어서 살만했는데 참······.”

나승균 감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독으로 취임한 다음 해.

신성 고등학교는 다시 한 번 태산 고등학교와 맞붙었다.

결과는 신성 고등학교의 3대 1 승리.

에이스 투수와 3선발 간의 미스 매치라 승리가 당연했지만 태산 학원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감독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지난 2년 간 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의 경기는 없었다.

고교 야구계가 대기업 회장들의 장기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던 한국야구협회에서 반강제적으로 신성 고등학교와 태산 고등학교를 분리시킨 것이다.

덕분에 당분간 스트레스 받지 않고 감독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연습 경기가 잡히면서 나승균 감독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이번에 태산에서 연습 경기 제안해 온 거 말이야. 김진수. 그 녀석 때문이지?”

“아직 선발은 정해진 바 없다고 하는데 뻔하죠.”

“아무튼 태산도 참 양아치야. 그렇게 우리를 이기고 싶나?”

“지난 3년 간 성적을 못 냈으니까요. 이렇게라도 해서 자리보전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만들어진 지 9년째인 신성 고등학교 야구부는 전국 대회 8강이 최고 기록이었다.

같은 해에 창설한 태산 고등학교 야구부의 최고 기록은 전국 대회 16강.

단 한 라운드 차이였지만 운 좋게 8강에 든 신성 고등학교는 서울 지역에서다크호스로 불리는 반면 태산 고등학교는 약체라는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최근의 성산전도 신성 고등학교의 승리로 끝이 났으니 태산 고등 학교 김민철 감독의 애가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산 전력이야 뻔한데 김진수, 그 녀석이 문제야.”

나승균 감독이 쓰게 웃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신성 고등학교 전력이 태산 고등학교 야구부보다 근소한 우위였지만 김진수의 합류가 변수였다.

주말 리그 전반기까지 인천 청라고등학교에서 활약하던 김진수가 태산 고등학교로 전학한 건 세 달 전이었다.

본래 규정대로라면 김진수는 6개월 간 경기 출전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전학 이유가 밝혀지면서 김진수의 출전 제한 페널티가 풀려버렸다.

“청라에서 정말 폭력 사건이 있었던 거야?”

“저도 궁금해서 알아보긴 했는데 청라고 감독이 기합을 심하게 줬던 모양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어?”

“박재혁 감독이라고 엄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럼 말로 엄하게 해야지. 성적 안 나온다고 애들을 때리면 쓰나?”

“감독님. 청라고 이번에 황금사자기 8강 갔습니다.”

“······그래?”

나승균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성 고등학교보다 성적이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자 김석률 수석 코치가 달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진수도 오래 쉬었으니까 베스트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자체청백전 했을 거 아냐?”

“청백전하고 공식 대회는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애들도 처음 상대해 볼 테고요.”

김석률 수석 코치는 나승균 감독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라 여겼다.

김진수를 영입하면서 태산 고등학교의 전력이 탄탄해진 건 사실이지만 김진수가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승균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김진수 사이드암인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변화구를 곧잘 던지더라고요.”

“그럼 지난 2년 간 우리 애들이 사이드암을 한 번도 상대 못해 본 것도 알고 있어?”

“선인고 홍준영하고 붙지 않았습니까?”

“2이닝만 던지고 내려갔잖아. 2학년들은 홍준영이 공 구경도 못했어.”

“아, 참. 그랬죠.”

“태산에 투수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김준수겠어? 김민철 그 양반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야. 지난번에 졌으니까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길 속셈이라고.”

나승균 감독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걱정대로 김준수에게 농락만 당하다가 경기를 내준다면?

자신도 사표를 쓰게 될지 몰랐다.

“김 코치. 알지? 우리 딸 날짜 잡은 거.”

“어이구.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축하는 무슨. 여차하면 실직자 되게 생겼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독님. 제가 엔트리 잘 짜보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3학년 애들 좀 데려다 쓰면 어떨까?”

“3학년을 말입니까? 그건 좀······. 무엇보다 태산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하아. 차라리 성적 부진으로 자르면 이해라도 하지. 무슨 연습 게임 하나에 목숨이 걸렸으니 원.”

“내일 꼭 이기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집으로 돌아 온 김석률 수석코치는 스타팅 라인업을 새로 고쳤다.

본래 정석적인 라인업을 짜 놓은 상태였지만 나승균 감독의 앓는 소리를 듣고 나니 뭐라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이드암은 견제가 약하니까 일단 발 빠른 애들을 전진 배치시키자. 누가 좋을까?”

이제 3학년이 되는 2학년들과 작년에 뽑은 신입생들의 이름을 꼼꼼히 살피던 나승균 감독의 눈에 박유성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유성이? 흠······. 빠른 공은 잘 치지만 변화구에 약한데 괜찮을까?”

발이 빠르고 맞추는 재주도 가진 편이지만 김석률 수석코치는 박유성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타석에서 참을성이 없고 떨어지는 변화구를 공략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주력에 비해 수비 범위도 평범한 편이고.

3학년들이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이 주전으로 써야겠지만 톱타자 감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낯선 스타일의 김진수를 상대로 점수를 쥐어 짜내야 한다면 박유성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유성이를 1번으로 써 보자. 감독님도 유성이를 좋아하시니까 별 말씀안하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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