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화
01. 인생 3회차 (2)
“박 선수. 우리 쉽게 쉽게 가자. 은퇴식은 제대로 열어줄 테니까······.”
“아직 은퇴할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원칙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어. 박 선수 올해로 7년 계약 끝난 거 알고 있지? 만약에 재계약 한다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5천만 원? 후하게 쳐줘서 1억?”
“······.”
“그 돈 받고 2군에 내려가면 성이 좀 풀려?”
“2군이요?”
“주전 보장은 올해까지고 내년에는 주전들하고 경쟁해야지. 그렇다고 마흔을 바라보는 선수를 백업으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 그래?”
“······.”
“그러니까 올 시즌 잘 마무리 짓고 깔끔하게 은퇴합시다. 그리고 지금처럼 영호 맡아서 키워 봐. 영호가 우리 박 선수 말이라면 끔뻑 죽더만? 제 2의 박유신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팀의 기둥으로 만들어 줘. 그게 트윈스에서 박선수가 할 일이야.”
박유성은 며칠 말미를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단장실을 빠져 나왔다.
그래도 올 해 뭔가 보여줬다 여겼건만.
구단 관계자들의 눈에는 곧 앞자리가 바뀔 나이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아. X발 진짜 못 해먹겠네.”
라커룸으로 돌아 온 박유성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장태수보다 1년 더 선수로 뛰는 게 목표였는데 1회 차에 이어 이번에도 장태수와 함께 옷을 벗게 됐다.
“장태수. X새끼 진짜.”
박유성은 부재중으로 찍힌 X새끼라는 이름 옆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제법 긴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왜 이제 전화해?
40년 넘게 부대껴 온 장태수의 징글징글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야. 1년만 더 버티지.”
-또 뭔 소리야? 왜? 구단에서 내 핑계 대고 옷 벗으래?
“하아······. 진짜 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기왕 옷 벗을 거 빨리 좀 은퇴하지. 그럼 현역최고령 타자 소리 한 번 들어보는 건데.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냐?”
-농담 아니고 진담이거든? 막말로 너나 나나 뭐 있냐? 홈런왕을 해봤냐 MVP를 타봤냐? 비슷한 놈이 둘이나 있으니까 티가 안 나잖아. 티가.
“암튼 너 때문에 옷 벗게 생겼으니까 네가 책임져.”
-그래. 이 형이 책임지마.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소개팅 어떠냐?
“소개팅?”
-너희 형수가 너만 보면 불쌍해 죽으려고 난리다. 저러다 고독사 하겠다고.
“그래서 제수씨 친구라도 소개시켜 준다고?”
-친구 아니고 동생. 너하고 아홉 살 차이다.
“······예쁘냐?”
-그래. 우리 와이프만큼은 아니지만 너 소개시켜주긴 아깝더라.
“이번에 잘 되면 용서해 준다.”
-제발 좀 그래라. 우리도 커플 여행 한 번 가 보자.
현역 은퇴를 통보받은 마당에 커플 여행 타령하는 장태수가 꼴보기 싫었지만.
곧바로 날아온 소개팅녀의 사진을 보니까 화가 풀렸다.
“진짜 예쁘네. 제수씨만큼은 아니지만.”
1회차 시절에 이어 2회차 시절에도 장태수는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 살았었는데 험한 일 당하려던 걸 장태수가 구해줬다던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 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제수씨는 여배우로서 한창 잘 나갈 때 장태수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나이 먹도록 결혼하지 못한 자신을 구제해주려 하고 있었다.
“제수씨 같은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몇 번이고 수술대에 올랐던 장태수가 이때까지 버틸수 있었던 건 제수씨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장태수를 위해 좋은 작품들도 마다하고 뒷바라지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아. X발. 이번에도 내가 이긴 게 없네.”
통산 성적부터 시작해 FA 총액과 자신은 이루지 못한 가정까지.
이번 2회차 삶도 장태수에게 판정패였다.
그 때였다.
“선배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최영호가 들어왔다.
“아직 안 갔어?”
“선배님 기다렸는데 안 나오셔서요.”
“다들 회식 간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선배님도 같이 가셔야죠. 가요.”
“어휴, 됐다 인마. 이 나이에 낄끼빠빠 못하면 욕먹어.”
“그럼 저도 안 갈래요.”
“짜식이 누굴 죽이려고? 구단주 온 거 아냐?”
“저도 그런 자리 불편해요.”
“까불지 말고 가서 구단주 비위 좀 맞춰 줘. 겸사겸사 내 칭찬도 좀 하고.”
“그럴까요?”
“대신에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네 나이 때부터 관리해야 롱런할 수 있다.”
“넵! 그럼 끝나고 연락 드릴게요오~”
트윈스가 5년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경사스러운 날이었지만 박유성은 눈치껏 회식을 빠졌다.
선수단에서 박유성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선수가 5살이나 어린데 시즌 초에 이적한 최고참이 끼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집에 가서 유신이 경기나 봐야겠다.”
텅 빈 주차장에 덩그러니 놓인 차를 몰고 박유성은 신혼집으로 장만했던 아파 트로 향했다.
집을 살 때 까지만 해도 3년 안에 결혼할 줄 알았건만.
고요한 집 안에 들어오니까 공허함만 커졌다.
박유성은 대충 옷을 벗어던지고 맥주와 마른안주를 꺼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동생 박유신의 경기를 돌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오늘 멀티 히트 경기였다고 했지?”
박유신의 활약상은 매일처럼 깨톡으로 전달받고 있지만 박유성은 1회 초부터 경기를 다시 돌려봤다.
그러면서 화면에 잡히는 박유신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넣었다.
“야, 유신아. 방금 공은 무리야.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참 벗어나는 공을 왜 따라 가냐?”
초구 헛스윙에 이어 2구 째 파울 타구를 보며 탄식을 하던 것도 잠시.
박유신이 침착하게 3구와 4구를 골라낸 뒤 몸 쪽을 파고드는 97mile/h(≒156.1km/h)짜리 포심 패스트 볼을 잡아당겨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장타를 때려내자 박유성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지! 달려달려! 그대로 3루까지!”
타구의 방향을 확인한 박유성은 3루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 아무리 메이저리그 선수들이라 해도 수비 범위를 벗어난 타구를 수습해 완벽한 레이저 송구를 구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
잔루가 많은 다저스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한 베이스라도 더 진루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1루에 이어 2루를 돌던 박유신은 3루까지 반쯤 내달리다 다시 2루 베이스로 돌아왔다.
정확하게는 3루 베이스 코치의 멈춤 지시를 받은 거지만.
“달렸어야지!”
박유성은 과감하지 못했던 박유신의 플레이가 아쉽기만 했다.
“안전하게만 하면 안 된다니까?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상대도 조급해지지. 어휴, 저 놈은 덩치는 산만해서 왜 저렇게 쫄보인 거야?”
한국에서 뛰던 5년 간.
박유신은 250개에서 1개 모자란 249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연평균 49.8개.
도루 성공률은 무려 88.3퍼센트.
1회차 시절 5년 연속 도루왕을 거머쥔 박유성이 철저하게 트레이닝 시킨 결과 물이었다.
박유신의 빠른 발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했다.
데뷔 시즌 30도루에 이어 5년 연속 30도루까지.
스파크맨이라 불리는 앤드류 존슨이 없었다면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도루왕이 탄생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그 빠른 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박유신은 주루사를 너무 겁냈다.
“하아. 이러면 점수 내기 힘들 텐데.”
박유성의 예상대로 다저스의 물 타선은 박유성을 2루에 두고도 진루타 하나 때려내지 못했다.
중견수 플라이에 이어 3루수 앞 땅볼과 우익수 플라이.
박유신이 3루까지 파고들었다면 기분 좋게 선취점을 뽑아냈겠지만 결과적으로 다저스의 1회 말 공격은 무득점에 그쳤다.
“3루 베이스 코치도 문제다. 야구장의 끝에서 끝으로 던지는 송구인데 공을 던지기도 전에 스톱을 시키면 어쩌라는 거야?”
3루 베이스 코치의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돌렸다면 박유신은 여유롭게 살았을 것이다.
설사 송구가 제대로 날아왔다 하더라도 세이프 확률은 70퍼센트 이상.
하지만 3루 베이스 코치는 선취점을 위한 과감한 도전보다 후속 타자를 믿는 우를 범했다.
위기 다음에 기회라는 야구 격언대로 1회 말 기회를 날린 다저스는 곧바로 2회 초에 실점을 했다.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가 박유신처럼 2루타를 때려냈고 후속 타선에서 진루타와 희생플라이가 나오면서 너무나도 손쉽게 점수를 올린 것이다.
“진짜 다저스는 답이 없다. 답이 없어.”
박유신 때문에 애정을 가지고 응원하려고 했건만.
한 점을 쥐어짜낼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까 울화통이 치밀었다.
괜히 6년 연속 메이저리그 득점 최하위를 기록 중인 게 아니었다.
말없이 맥주를 홀짝거리던 박유성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건 1대 0으로 뒤진 5회 말.
박유신의 세 번째 타석 때였다.
8번 타자 알버크 로번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고 9번 타자가 희생 번트를 성공시키면서 만든 1사 2루 상황에서
따악!
박유신의 방망이가 불을 뿜은 것이다.
“그렇지! 달려달려!”
중견수의 오른 쪽으로 굴러가는 타구를 보며 박유신은 동점을 기대했다.
알버크 로번의 걸음이 느린 편이라 해도 제때 스타트를 끊었다면 충분히 홈에 들어올 수 있다고 여겼다.
3루 베이스 코치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크게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3루 베이스를 돌다 멈칫한 알버크 로번은 홈플레이트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아웃이 됐다.
특별히 송구가 정확한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감 없는 소극적인 플레이가 결국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미치겠다 진짜.”
송구가 홈을 향하는 틈을 노려 박유신이 2루까지 진출했지만 후속타는 터지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는 2대 0.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에라이.”
박유성은 신경질적으로 TV를 껐다.
박유신의 활약상을 보며 기분을 풀려 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저스에 안 보내는 건데.”
박유신이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팀을 잘못 골랐다는 얘기가 많았다.
내셔널리그 MVP 수상자인 개릿 버틀러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제치고 박유신이 자리를 잡기란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저스는 나이 많은 고액 연봉자들을 빠르게 정리하면서 리빌딩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박유신도 어렵지 않게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됐지만.
믿었던 영건들이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면서 다저스의 공격력은 메이저리그 최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취기가 오른 박유성은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박유신에게 깨톡을 보냈다.
박유성 - 야. 너 미리미리 딴 팀 알아봐라. 다저스는 답이 없다.
미국 시간으로는 오전 10시쯤이라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박유신 - 다저스 형이 가라고 했거든?
박유신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박유성 - 안자냐?
박유신 - 오늘은 일찍 일어났어. 그리고 축하해.
박유성 - 뭘 축하해?
박유신 - 포스트 시즌 진출했잖아. 이번엔 꼭 우승반지 끼자.
박유성 - 쓸 데 없이 한국 야구는 뭐 하러 보냐?
박유신 - 형 기사 찾아 본 건데?
박유성 -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해.
박유신 - 나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박유성 - 열심히 하긴 개뿔. 그리고 너희 3루 코치는 너 싫어하냐?
박유신 - 그렇지 않아도 단장한테 엄청 깨졌어. 어쩌면 재계약 못할지도 몰라.
박유성 - 내가 단장이어도 쌍욕 박았을 거다.
경기 내내 사람 열받게 만들던 3루 베이스 코치가 된통 깨졌다는 소식에 박유성이 씩 웃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내가 주루 쪽은 빠삭하다니까.”
빈말이 아니라 1회차 시절 은퇴 후 프로야구 모든 구단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
은퇴 시점에 2회차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최고의 주루 코치로 활약하고 있었을 텐데 참.
괜히 장타에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이번 2회차 때는 최영호 보모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