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3)
“함 잡솨봐!”
나와 이동민은 할머니가 건네주신 아이스커피를 받아들여 각자의 방법으로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커피랑 같이 씹히는 초코 청크가 진짜 예술인 것 같습니다!”
“그래? 더 줄까? 말만 해라. 팍팍 줄게.”
이동민의 말에 이 할머니는 다시 위생장갑을 끼며 다크 초콜릿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게 딱 아쉬울 정도로 먹어야 좋은 거거든요. 아쉬우니까 다시 먹고 싶고. 내일도 부탁드립니다.”
당장이라도 초콜릿 덩어리를 통째로 갈아줄 것 같은 이 할머니에게 괜찮다며 손사래를 한 이동민은 너스레를 떨며 내일도 부탁한다고 했다.
“원. 그냥 좋아하면 더 먹으면 되는 거지. 똑똑해서 그런가 생각하는 게 내랑 좀 다르네. 한울이, 니는 어떻노? 뭐 더 줄까?”
아쉬움의 그 여운을 즐긴다는 이동민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이 할머니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딱 좋네요. 맛있어요.”
빨대로 생크림 위에 뿌려진 초코 청크를 밑으로 푹푹 내린 후, 대충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휘젓고 커피를 즐기는 이동민과 달리, 나는 섞기 전, 크리미한 생크림과 그 뒤를 부드럽게 따라오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그리고 커피를 음미하며 말했다.
“진짜 맛있제? 나도 절은 아들이 그 사약 같은 커피가 맛있다고 먹는 거에는 동의를 못 했거든? 그래서 우리 영감이 타주는 믹스커피가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그거 대신 이걸로 만들어 먹는다 아이가. 근데, 니는 이 커피 만드는 방법을 어디서 배운 기고? 심 영감도 이건 처음 봤다 그러던데?”
어느새 자기 몫의 아이스커피를 만든 이 할머니가 빨대로 잔에 들은 내용물을 휘휘 섞으며 말했다. 할머니의 스타일은 모든 재료를 한 번에 섞어 드시는 타입이었다.
“그게 말이죠···. 독일에 있는 식품 박람회를 갔을 때였죠.”
시간은 바야흐로 회사에 입사한 지 2년 후.
실력을 인정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을 한 나에게는 많은 일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승진을 해버리니, 윗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회사에서 진행되는 거의 모든 프로젝트에 나를 끼워 넣은 것.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요청하는 일들을 시간에 맞춰 처리해 내었고, 그걸 보다 못한 윗사람들이 엿 먹어보라고 가뜩이나 일 때문에 야근으로 허덕일 때 독일까지 날려 보내었다.
“우와. 독일이면···. 유럽 출장! 친구 말 들어보니까 유럽 출장 잡히면 서로 가려고 난리 친다던데. 좋으셨겠네요!”
좋기는 개뿔.
나는 ‘유럽 출장이라니···.’라며, 선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동민의 순진한 생각에 피식 웃으며 그때의 스토리를 이어갔다.
“가는 데만 14시간. 시차 8시간. 비행기에서도 일하고, 가서도 일하고. 그러다 잠이 너무 와서 박람회장 안에 있는 카페에 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나 마시자 해서 시켰던 게 이거였죠.”
나도 회사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출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내 돈이 아닌 회삿돈으로 먹고 자면서 업무가 끝나는 쉬는 시간에 다른 나라의 경치도 구경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김 대리, 매주 수요일에 취합하는 자료가 안 보이는데? 아직 안 보냈나?’
‘네. 제가 그때 비행기에 있어서. 방금 내려서 이제 보냈습니다.’
‘에잉. 사람이 비행기에 있다고 쉬면 쓰나? 회사에서 돈 들여서 보내주는 건데 맡은 바는 하면서 비행을 즐기던지 해야 할 거 아니야? 보나 마나 기내에서 주는 술 마시면서 잤겠지. 어? 나 때는 말이야! 내 사비로 기내 와이파이 연결해서 기한 맞추고 그랬어!’
비즈니스 좌석도 아니고. 일반 좌석을 끊어주고는 그 좌석에서 14시간 동안 쭈그려 앉아 일하라니. 가뜩이나 좌석 간격이 좁아 테이블을 내려도 무릎이 걸려 불편한 좌석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눈을 잠깐 붙인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일을 처리했건만. 시간을 조금 지체했다고 개념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김 대리, 이거 오늘 퇴근 전까지 분석해서 보고서 써내.’
‘네. 알겠습니다.’
‘아. 오늘은 한국시각이야. 알지?’
다시 말하지만, 독일과 한국의 시차는 8시간. 나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열리는 박람회를 구석구석 돌며 한국에 팔릴만한 것들과 새로운 형태의 제품들을 보고 기록한 후,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었다.
박람회에서 돌아와 보고서와 그동안 밀린 한국의 이메일을 쳐내다 보면 12시. 잠깐 씻고 나오면 오전 1시. 그때부터는 한국 사무실의 업무가 시작되는 타임.
“헐. 그럼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신 거예요?”
“2시간 정도?”
“오메. 2시간이 뭐꼬! 뭔 윗사람이라는 것들이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노! 못된 것들이네. 천벌 받을 것들!”
내 출장 스토리를 들은 이동민은 대학원생인 자신의 연구실보다 빡센 직장인의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며 동병상련의 눈빛을 보내었고, 이 할머니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행주를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쾅!
“어머. 이게 무슨 소리래?”
생각보다 큰 소리에 계산대와 가까이 있던 손님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마. 여기 내가 손을 좀 삐끗해가. 미안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손이 내 맘대로 안 되네. 호호.”
깜짝 놀라 이 할머니를 살피는 손님들에게 할머니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괜찮다는 제스쳐를 보냈다.
“그 사람들 제가 다 이겼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진짜가? 어떻게 이겼는데?”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상사들을 다 이겼다는 내 말에 이 할머니가 테이블을 내려쳤던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훌훌 털며 말했다.
참고로, 이 할머니는 고등학교 때까지 투포환을 던지셨다.
“그냥, 일을 제가 다 끌어안고 보다 보니, 나중에는 저 없으니까 회의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위로 올라갔죠.”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저 그 사람의 일을 다 빼앗으면 되는 것. 적당히 뺏는 게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나중에는 사장님께 단독보고하고, 프로젝트 몇 개 성공시키니까 팀장 되더라고요.”
사장의 아들이 회사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혈연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 아이스커피는 잠 깨려다 얻어걸린 거죠.”
사실 독일식 아이스커피 외에도 출장을 빙자한 강행군하러 다니며 나라별로 특별한 커피들을 많이 맛보았다. 검은쌀과 요거트를 넣어 만든 커피라든지···. 재료만 듣는다면 아주 묘해 보이지만, 몇 번 먹다 보면 중독적인 맛에 한 번씩 생각나는 커피들.
“그래.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힘든 상황에 도움이 되는 뭔가가 하나가 나타나긴 한다. 내도 니 아니면 이런 커피 죽을 때까지 맛도 못 봤을 뻔했다 아이가.”
“그러게요.”
나는 이 할머니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렇게 힘들었던 회사 생활에서 얻은 지식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는 고맙게도 퇴직금도 아주 두둑이 챙겨 주고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해보고 싶었던 걸 하면서도 여유로울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저도 그럼···! 나중에는 사장님같이···!”
나의 직장생활 스토리에서 깨달았는지 이동민이 주먹을 불끈 쥐며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디디링~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풍경소리가 들리고.
“형님! 저희 왔습니다!”
밀짚모자와 목수건으로 무장한 박준혁과 이 대리가 산삼이라도 딴 듯, 비장한 표정으로 가게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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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대리가 내 앞으로 와 소쿠리에 가득 든 서리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과장님! 서리태 말씀하신 전량 다 따왔습니다!”
“형님! 제가 좀 도와드렸습니다.”
뒤이어 박준혁이 이 대리의 뒤를 따라오며 자신이 든 소쿠리도 내게 내보였다.
“이게 다 뭐꼬? 쟈는 또 누고?”
이 할머니는 갑자기 쳐들어와 서리태가 가득 든 소쿠리를 들이미는 두 청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할머니,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기 있는 김한울 과장님의 직속 라인! 오른팔이었던 이창규라고 합니다.”
이 대리는 할머니의 질문에 차렷 자세를 하고는 우렁차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아. 한울이랑 같이 일한 사람인 가베. 한울이 보러 온기가?”
“네. 과장님이 너무 그리워서 오게 되었습니다.”
“아따. 한울이 니는 인기 많아서 좋겠다? 근데 어찌 된 게 전부 다 시꺼먼 머스마들만 맨날 오노?”
곰 같은 덩치를 가진 이 대리의 말에 이 할머니는 살짝 질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가는 못가도 연애는 해야 할 것인데···.’라고 혼잣말까지 하셨다.
앞에서 이 할머니의 혼잣말을 들은 박준혁은 내 표정을 보더니 이 대리의 옆구리를 퍽퍽 쳤다.
“형님,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주목적은 따로 있다면서요?”
박준혁에게 옆구리를 맞고도 가만히 있는걸 보니 서리태 수확을 하며 많이 친해진 모양.
“어? 어. 하하. 그렇지. 사실, 과장님도 뵙고 싶긴 했지만. 시골에서 사는 건 어떨까 해서 내려와 봤습니다.”
“그려? 시골에서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아침에 일어나서 논밭 확인하고, 뒷산 산책 좀 하다가 밥 묵고. 해지면 자는 거제. 아, 한울이 오고 나서는 할 게 좀 많아 지긴했다. 근데, 시골 생활은 와? 도시가 젊은 사람들한테는 딱 맞지 않나?”
이 할머니는 시골 생활도 사람 사는 곳이라며, 그저 도시보다 조금 더 느리고, 변화가 덜 할 뿐이라고 말했다. 거기에 당신의 손주는 올 때마다 인터넷이 느려 다시 제집으로 가기 전까지 온몸을 비틀어댄다고도 했다.
손주에 대한 시니컬한 평가를 내린 이 할머니의 말에 이 대리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친가도, 외과도 고향이 서울이라. 시골에 대한 로망이 있거든요. 왜, 예능도 보면 연예인들이 사람들이 없는 오지로 떠나 힐링하잖아요. 그런 거죠. 뭐. 하하하.”
그래서 자신도 연예인들의 유행을 따라 마침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고 싶었다고.
“에긍···. 원래 힘이 들면, 힘듦의 원인이 되는 장소를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잘했다. 잘 왔네. 그래서, 언제까지 있을거고?”
이 대리의 억지웃음에 가려진 지침을 연륜으로 간파해 낸 이 할머니는 작업대 서랍 밑에서 어떤 가루가 든 통을 꺼내며 물었다.
“어···. 일단 월요일 연차를 써놔서. 아마 월요일 오전에는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그럼 잘됐네. 곰국 끓이는 김에 니 것도 끓여줄 테니까 니도 먹고 가라. 덩치만 컸지 얼굴이 핼쑥해가. 뜨신 거 먹으면 힘 난다.”
“에? 저 형 얼굴이 핼쑥하다고요? 할머니, 저는요?”
이곳에서도 등치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이즈를 가진 이 대리의 얼굴을 보며 핼쑥하다고 하는 이 할머니의 말에 박준혁은 할머니와 이 대리를 번갈아 보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니는 강 할매가 온갖 거 다 갔다 먹이가 얼굴 봐라 뽀얘가지고. 누가 닐 보고 핼쑥하다 하겠노. 머리숱도 제일 많구먼···. 됐고. 그거나 이리 내라. 콩물 낼 거 맞제?”
자신도 챙겨달라는 박준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이 할머니는, 둘이 보물처럼 소중히 들고 있는 소쿠리를 향해 재차 손을 뻗으며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고. 콩물 만들라면 물에 불려야 해서 지금부터 부지런히 담가놔야 한다. 니 옆에 니 선배라는 사람 아까부터 침 꼴깍거리는 거 안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