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성능 좋은 고 경비!
박람회 주차장 입구.
박람회 스태프라고 적힌 명찰을 단 남자 두 명이 주차장 입구에서 차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배도 출출한데 뭐라도 좀 먹어야겠네. 거기. 나 잠시만 자리 비울 테니까 수고 좀 하고 있어.”
둘 중 경광봉을 설렁설렁 흔들고 있던 남자가 옆에서 열심히 주차 안내를 하는 스태프에게 말했다.
“예? 방금도 쉬고 왔는데 또요?”
“아 아까는 생리현상을 해결하려고 그랬고. 지금은 배가 고파서. 배고픈데 계속 일하리?”
“아니 화장실을 1시간 넘게 다녀오셨잖아요. 그리고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금 전만 해도 화장실이 급하다며 1시간이나 자리를 비웠던 남자였다.
그런데 또 자리를 비운다고?
어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담당구역을 빠져나갔던 사람이라, 또 자리를 비운다니 얼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설렁설렁 일하는 남자의 등치가 자신의 두 배였으므로.
지금도 그렇다.
얼굴을 찌푸리자, 반팔을 입고 있던 남자가 주먹을 쥐며 자신의 근육을 과시했다.
협박이었다.
“내가 변비가 있어서 그래. 어? 그리고 화장실도 얼마나 멀어. 나도 최대한 빨리 온 거라고. 이번엔 바로 저 앞 부스에 후딱 갔다 올 테니까 걱정 말어. 오케이?”
“하···. 빨리 오셔야 합니다.”
아직 여름도 되지 않았는데.
혼자 열이 많은 듯 반팔을 입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남자에 스태프는 마지못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말이 좀 통하네. 이렇게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어? 갔다 오면 내가 일 더 해 줄게!”
스태프에 허락에 씩 웃은 남자는 경광봉을 옆에 있는 박스에 휙 집어 던지고 주차장을 나섰다.
남자의 정체는 마동태.
한울과의 팔씨름에서 진 인물이었다.
“날씨 좋고-!”
마동태가 팔자에도 없는 박람회 자원봉사자에 지원한 이유는 매일 밤 메인무대에 오는 가수들을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해서였다.
‘STAFF’라고 쓰인 명찰은 박람회 행사장의 어느 곳이던 출입이 가능하게 만드는 프리패스권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어차피 돈도 못 받는 자원봉사인데 열심히 하면 멍청이지. 자, 그럼 오늘은 뭘 먹어 볼까.”
같이 일하는 자원봉사자에게는 얼른 돌아 올 거라 말하긴 했지만, 마동태는 최대한 느긋하게 즐기다 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부스가 많은데 내가 무슨 수로 빨리 가? 모름지기 음식은 한 번씩 다 맛보고 결정해야지.”
박람회장 안에는 생각보다 먹을 것들이 많았다.
농산물만 파는 곳도 많았지만, 해당 농산물로 만든 요리를 파는 곳은 물론이고, 지역 카페와 식당 등에서 푸드트럭을 끌고 나와 참여한 덕분에 먹을거리가 이곳저곳 널려있었다.
스태프 목걸이를 앞세워 당당하게 박람회 부스 존으로 입장한 마동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부스로 갔다.
“어이쿠. 이거 맛있게 생겼네. 어디 맛을 좀 볼까?”
마동태가 코를 벌름거리며 시식용 접시 옆에 있는 이쑤시개를 집어 들자, 마동태를 발견한 판매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오늘도 오셨네요.”
“어제는 영 짜서. 시식이 맛이 있어야 사람들이 살 거 아닙니까. 어디 보자, 오늘은 어제보다 맛있으려나.”
“....”
어제도 와서는 구매는커녕, 시식용 음식에 대해 혹평만 하고 갔던 마동태를 기억한 판매자는 반기지 않은 기색을 팍팍 풍겼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마동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쑤시개를 이용해 접시에 있던 시식용 음식을 한 번에 싹쓸이할 뿐.
싹쓸이한 음식을 한입에 집어넣은 마동태는 눈을 감으며 시식에 대한 평을 시작했다.
“큼. 좀 느끼하네. 에이. 오늘은 좀 팔아주려고 했는데. 이게 안 되네. 내일은 내가 좀 살 수 있게 좀 잘 만들어보쇼.”
어제는 짜다더니, 오늘은 느끼하다고?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레시피로 시식용 음식을 만든 판매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훠이훠이.
“...하하하. 가세요. 얼른.”
그리고 제발 다시는 오지 마.
손짓만으로도 느껴지는 명백한 거부. 하지만 마동태는 판매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당했다.
대신 판매자가 들으라는듯 툴툴거렸다.
“쯧. 저렇게 고객 응대가 부족해서야. 내일은 맛이 좀 없어도 사 먹어 주려고 했는데.”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시식할 수 있는 음식들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살 필요가 뭐 있나.
“자 그럼 또 어디 걸 먹어볼까. 어제 호박전 맛있었는데 그쪽으로 가볼까나.”
마동태는 조금 전 부스에서 가져온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구름떡집의 푸드트럭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떡집의 간판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마동태의 귀로 아주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일아트! 그리고 그 목소리! 여, 영광입니다! 제, 제, 샐러드를 드리겠습니다!”
“어잉? 이게 무슨 소리야?”
우렁찬 목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신비농장이라고 적힌 부스 안에서 구매자로 보이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를 발견했다.
“부, 부족하시면 이것도···!”
고개를 살짝 들어 여자의 반응을 확인한 남자는 옆에 있는 사람 것까지 뺏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포장하다 말고 제 몫의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는 걸 발견한 마동태의 걸음이 빨라졌다.
“허. 저 자식을 또 여기서 보내. 그래. 한 방 날려라!”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었나.
신비농장의 사장, 김한울의 얼굴을 알아본 마동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남자라면 주먹이지!”
팔씨름에서 진 죄로 두 마을의 모내기를 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빠득 갈리는 만큼, 마동태는 저 머리숱 많은 남자가 한울에게 한 방 날리는 걸 기대했다.
하지만 마동태가 기대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
귓가에 속삭이는 한울의 한마디에 머리숱 많은 남자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숙였다.
“헉!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무슨 짓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더니 여자에게 건네던 것을 재빨리 회수해 한울의 앞으로 다시 원위치시켰다.
대체 뭐라고 했기에···.
설마, 이제는 말로도 사람을 제압시키는 지경에 다다른 걸까?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마동태는 저도 모르게 백스텝을 밟을 때였다.
머리숱이 많은 남자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제가 아라님을 만났다는 것에 눈이 멀어···. 그러니 제발······. 그것만은······!”
뭐? 아라?
남자의 입에서 나온 아라라는 말에 마동태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설마.
가수 아라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라가 지금 이곳에 있을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다.
하지만 저 남자가 저렇게 흥분한 이유가 진짜 아라를 영접해서라면···?
말이 되었다.
“확인해 봐야지.”
밑져야 본전.
생각을 정리한 마동태는 신비농장이 적힌 종이봉투를 들고 자리를 뜨는 여자의 뒤를 슬그머니 따랐다.
**
까맣게 물든 하늘에 별이 하나둘 뜰 때 즈음.
통곡 소리가 조용한 산골 마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흐흐흑. 내가, 내가 오늘 무슨 짓을. 아라님께 줬다 빼앗다니······.”
통곡의 주인은 바로 박준혁.
박람회를 마치고, 그렇게 외치던 가수 아라의 공연까지 보고 온 박준혁은 아라의 무대가 끝날 무렵부터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그러곤 한울의 집에 도착한 직후부터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
“쯧. 야. 사내자식이 뭐 그런 거로 우냐.”
알바생들에게 쿨하게 카드를 던져주고 한울과 합류한 지민이 준혁의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이미 박람회에서 부터 달랬던지라 어깨를 토닥이는 손에 성의란 단 한 톨도 없었다.
“그런 차별적인 발언은 철회해 주십시오. 그렇게 쉽게 남을 판단하시는 걸 보니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한 게 분명하군요.”
“아니, 나는 위로해 주려고···. 어후. 그래. 미안하다. 취소. 됐냐?”
흑흑 거리던 박준혁은 지민의 말에 고개를 벌떡 들어 항의하다, 위로라는 말에 다시금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고 어흐흐흐흑거렸다.
지민은 그런 박준혁에 두 손 들며 항복을 외쳤다.
“자. 콩물.”
주방에서 나왔더니 콩트를 찍고 있는 둘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고 있던 페트병을 건넸다.
“어흐흐흑. 마이 프레셔스. 그래. 난 이것만 있으면···! 감사합니다! 형님!”
콩물이라는 소리에 쪼르르 와 콩물을 넙죽 받아 든 박준혁은, 이제 콩물이 든 페트병에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다.
“뭔 이것만 있으면이냐? 얘 왜 이래? 설마···. 모쏠은 아니지?”
마치 어느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콩물을 대하는 박준혁의 모습에 진저리친 지민이 물었다.
“글쎄. 아니지 않을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콩물을 붙잡고 있던 박준혁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시선의 끝은 지민이었다.
찌릿하고 지민을 노려본 박준혁은 아까보다 더 서글프게 흐느꼈다.
“어흐흐흑! 그렇게 쉽게 남의 치부를 들쑤시려 하시다니. 정말 못돼먹었군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데려갈진 몰라도 불쌍합니다!”
“하! 사돈 남 말 하시네! 난 인기 많거든? 어? 내가 지금 안 만나는 것뿐이지···! 어디서 모쏠이...! 너 데리고 갈 사람이 더 불쌍하다!”
“모쏠 비하 발언! 우리 모쏠 부대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 모쏠에서 탈출 할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빽빽하니까!”
“허······. 이런 걸 보고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 맞지 한울아?”
“어흐흐흑 형님!”
내가 볼 때는 둘 다 도긴개긴인 것 같다만···.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며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는 둘.
“...”
누가 더 낫냐니.
그냥 둘 다 집으로 갔으면.
하루종일 투덕거리는 둘에게 축객령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폭.
왼쪽 볼에 폭신한 느낌이 들더니 노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컁! 나왔다! 호에···. 무슨 일이냐?]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앞치마를 입은 노을이 내 볼을 지지대 삼아 두 발로 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래. 나에겐 얘들이 있었지.
노을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고 있자니 들끓었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앞치마 자랑은 다 하고 온 걸까.
박람회에 가기 전 노을과 찹쌀 그리고 포동을 불러 앞치마를 입혀 줬더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던 셋은 자랑하겠다며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꽈악! 나도 왔다!]
“강지민, 박준혁. 둘 다 이제 집으로 가.”
신나게 자랑을 하고 다녔는지, 평소보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내 발치로 걸어오는 찹쌀을 발견한 나는 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지금은 이 둘의 만담을 보는것 보다 정령들의 이야기를 듣는게 더 중요했다.
“....형님?”
“한울아?”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박준혁과 지민은 눈을 끔뻑였다.
당황스러운 모양.
그런 둘을 보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나 주방에서 갔다 올 동안 안 가면 둘 다 이제 다시는 안 본다. 당장 나가. 실시.”
“실시!”
박준혁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콩물을 챙겨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멍하니 그런 그모습을 본 지민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검지로 자신을 가르쳤다
“나도···?”
나도라니?
당연히 너도지요.
“어. 나가. 겟아웃.”
“헐.”
틈이라고는 하나 없는 내 말에 울상지은 지민이 터덜터덜 박준혁의 뒤를 따라갈 때였다.
-끼에에에!
열린 현관문 밖을 통해 소름 끼치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헐. 이 소리는!”
박준혁이 나가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자, 나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오던 찹쌀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몸을 틀었다.
[꽈악! 고 씨다! 노을아! 가자!]
[컁! 출동이다!]
도도도
내 어깨에 있던 노을도 폴짝 뛰어내려 밖으로 나가는 찹쌀을 따랐다.
“준혁!”
둘을 따라 서둘러 현관으로 뛰어간 나는 멀뚱거리게 서 있는 박준혁의 어깨를 짚었다.
“네! 형님!”
“집 지키고 있어! 비닐하우스 갔다 올 테니까!”
믿는다는 표시로 어깨를 꽉 쥐자, 박준혁의 자세가 곧아졌다.
“네! 맡겨만 주십쇼!”
“응···? 또 너 혼자 가? 야! 나도 같이 가!”
“안됩니다! 못갑니다! 비닐하우스는 저도 못 가본 곳! 절대 못 갑니다!”
“얘 뭐라니? 비켜!”
“안됩니다! 차라리 절 밟고···. 크윽. 밟아도 못갑니다!”
각 잡힌 박준혁은 강했다.
이 밤중에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냐는 지민의 발에 밟힌 한쪽 발을 들고 깽갱이를 뛰면서도 지민을 막아냈다.
잘한다. 박준혁.
아까 내 샐러드를 빼앗아 최애에게 주려던 건 용서하지.
그나저나. 고라니와의 계약후 울린 첫번째 경비 알람이었다.
반신반의 했건만. 이렇게 성능이 좋을줄이야.
[컁! 한울! 어서 와라!]
고 경비에게 첫 번째로 걸린 건 대체 뭘까?
“고마워 노을아.”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한 나는 어느새 내게로 돌아와 길을 밝혀주는 노을과 함께 어두운 밤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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