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행복은 돌고 도는 법
“그럼 가격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고객님?”
“어···? 어???”
지민은 손을 내미는 한울의 모습에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렸다.
경쾌하게 타이핑을 하면 손가락도 멈추고, 한울이 불러주는 정보를 받아적던 화면 또한 ‘신비 농장’이라는 단어만 남긴 채 꺼졌다.
도무지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는지 그저 입만 벌리고 ‘아, 어?, 응?’ 따위의 감탄사만 내뱉는 지민을 위해 한울이 다시금 말했다.
“가격 협상을 시작하시죠. 제 호박에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응? 뭐라고···?”
하지만 그런 한울의 배려에도 지민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뭐긴. 호박 거래하자며.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실까.”
두 번씩이나 가격 협상을 하자고 해도 멍하게 있던 지민은,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라니.
지금은 시골에서 소소하게 떡이나 팔고 있지만, 자신은 몇 개월 전만 해도 명실상부 일성물산 영업팀의 에이스였다.
자신이 영업팀에서 했던 일은 단순했지만, 어려웠다.
세계 곳곳을 뒤져 수요가 있을 만한 아이템을 제일 저렴한 가격으로 협상한 뒤, 적당한 마진을 붙여 해당 아이템을 필요로 하는 곳에 파는 것.
수요가 있을 만한 아이템을 발굴해 가격 협상을 하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기에,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항상 새로운, 더욱 저렴한, 보다 수요가 많은 아이템을 찾는 업체들은 차고 넘쳤고, 자신은 하이에나 떼들 같은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항상 그들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따와야 했다.
그야말로 협상에는 도가 트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협상과 계약을 진행해 왔던 저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나에게 아마추어라고?
오랜만에 자신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한울에 침착함을 되찾은 지민이 헛기침했다.
“진짜 네가 키운 거라고? 신비 농장은 또 뭐지?”
조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낚아채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른 지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한울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속고만 살았나. 어. 내가 키운 거 맞아.”
“너 여태 농사해본 적 없다며.”
“아니지. 정확히는 ‘전문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지.”
“근데 신비 농장이라며. 이름까지 있는 거면 꽤 전문적인 거 아니야?”
“아아. 그거? 오늘 확정됐어. 나, 오늘부로 국가가 인정받은 농사꾼이거든.”
옳다구나.
걸렸다!
한울의 틈을 발견한 지민이 씩 웃었다.
“그럼 아직까지는 아마추어라는 소리네?”
“뭐, 그렇지.”
그러고는 굉장히 아쉽다는 목소리로 빌드업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 나는 전문적으로 안 할 뿐이지, 오랫동안 농사하신 분인 줄 알았네.”
“...?”
협상의 기본은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내는 데 있다.
“아마추어면, 지금 호박 품질이 얻어걸린 거일 수도 있으니까. 나로서는 조금 위험부담이 있달까.”
약점을 알아내 기류를 내 쪽으로 끌고 오기만 하면, 거진 반은 성공.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역시나.
한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반응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 지민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역시. 너도 식품업계에서 일했으니까 잘 알잖아. 거기다 생산량도 일정하지 않을 테고···. 그럼 나는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소매가격은 좀 힘들 것 같고. 도매가격으로······. 헐.”
앞서 말했던 소매가격이 아닌, 도매가격으로 낮춰 거래를 성사시키려던 그때!
한울이 말없이 호박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창고 안을 가득 채운 늙은 호박과 단호박.
“일단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이 정도. 한 달 내에 수확할 양도 이 정도. 품질은···.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에 지민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헐. 대박.”
농업인으로 오늘 등록됐다며!
농사는 할 줄 모른다며!
“비닐하우스에서 농사할 거라 뭐, 마음만 먹으면 계속 재배 가능하고.”
“계속···? 4계절 내내? 거기다 지금도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고 있다고···?”
심 봤다!
한울의 말대로라면, 더욱 많은 고객에게 판매할 수 있음에 지민이 내적 탭댄스를 출 때였다.
“어. 그런데 뭐, 너 말대로 난 이제 막 시작한 농사꾼이라,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지. 호박 말고 다른 거 해야지.”
쾅.
탭댄스를 추는 지민의 눈앞에서 창고 문이 닫히며 호박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눈앞에서 사라지는 영롱한 호박들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내적 댄스도 막을 내렸다.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는 지민.
그런 지민의 모습에 이번에는 한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첫 수확물이긴 하지만, 내가 정성 들여 키웠거든. 거기다 네가 말했듯이, 내 호박들이 좀 특별하기도 하고. 너 전화로 따따블 외친 건 기억나니?”
큰일 났다.
한울의 올라간 입꼬리를 본 지민은 그제야 제 잘못을 깨닫고 말았다.
협상에 집중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품질이고 뭐고, 이 호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자신은 바이어지만, 상대방은 슈퍼을!
자고로 아무리 콧대 높은 바이어라도, 슈퍼을에는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협상이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닌 법!
지민은 다시 협상에 임했다.
“따, 따블은... 좀···.”
아까보다 기세가 확연히 줄긴 했지만, 아직 제소리를 냈다. 따따블은 농담이었다는 소리도 슬쩍 덧붙이며.
하지만 한울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지민의 말에 고심하던 척하던 한울이 입을 열었다.
“하긴. 따따블은 너무 양아치지.”
“오! 그럼···?”
“반으로 줄여서. 따블. 어때?”
꿀꺽.
따블이라니!
소매가에 따블이면 대체 얼마에 팔라는 거냐!
이렇게는 죽도 밥도 안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지민은, 침을 꿀떡 삼키고는 결연한 투로 말했다.
“혹시, 친구 할인될까···. 요?”
**
“그럼 우리도 일을 좀 하러 가볼까?”
성공적인 계약을 체결한 후.
지민이 딱 3개 남기고 간 단호박으로 크림 수프를 만들어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드디어 농사를 하는 거냐? 얼른 가자!”
수프를 먹은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루에 엎어져 있던 노을이 벌떡 일어났다.
‘단호박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한울은 정말 대단하다 컁!’
콩 크림을 이용해 만든 단호박 크림 수프는 미식가 노을의 입맛에도 잘 맞았는지, 노을은 흡입하는 와중에도 연신 고개를 들어 맛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종국엔 단호박 껍질까지 먹으려 들어 말려야만 했을 정도.
농사라는 말에 아직도 볼록한 배로 노을이 덩실거렸다.
“나도 가겠다 꽉!”
삐약!
노을의 옆에 있던 찹쌀이 참석을 밝히자, 옆에 있던 병아리들도 찹쌀을 따라 삐약 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병아리들도 따라가는 거야?”
“따라간다고 삐약 거린다. 꽉!”
따라간다니.
마음은 기특했지만, 아직 병아리들은 너무 어렸다.
“너무 어리지 않을까? 산에 있는 밭에는 야생 짐승들도 많아서 위험할 텐데.”
“나랑 같이 있으면 괜찮다. 꽉!”
“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날씨도 쌀쌀하니까, 다음에 좀 더 크면 데려가는 거로. 어때?”
“알았다. 병아리들한테 얘기해 주겠다.”
오늘 가야 하는 밭은 산 중턱에 있어 여러모로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아리를 데려가기엔 여러모로 무리였다.
“오늘은 따뜻한 집에서 지내고, 조금 더 자라면 같이 가는 거로.”
나중에 좀 더 자라면 밭에다 풀어놓고 벌레나 잡아먹으라고 해야겠다.
삐약······.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찹쌀아, 좀 도와줄래?”
“다들 저 상자 안으로 들어가라! 꽉!”
찹쌀이 군기반장같이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병아리에게 말하자, 아쉬움으로 삐약 거리던 병아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담요와 전열 등이 달리 포근한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같은 조류라 통하는 건지.
찹쌀이를 보자마자 어미같이 따르는 병아리들의 모습에 감탄할 때였다.
삐이이.
따뜻한 박스 안에 옹기종기 모인 병아리들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벌써 졸린가 보네. 눈 감기는 거 봐. 저러면서 어딜 따라오겠다고. 자, 우리는 얼른 갔다 오자.”
잠든 병아리들을 위해 문을 조용히 닫고 집을 나선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로 비닐하우스.
“우와! 엄청 큰 집이다! 컁!”
“반짝거린다 꽉!”
“하하. 노을이 말이 맞네. 비닐 집이야.”
농업인 신청 후 이장님과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잊고 있던 비닐하우스를 기억해냈다.
“농사를 왜 여기서 하는 거냐?”
“아아. 여기서 하면, 노을이랑 찹쌀이 모두 눈치 보면서 할 필요 없어.”
할머니가 편찮아 지시기 전, 만들어둔 비닐하우스.
진작에 여기로 올 걸 그랬나.
산 중턱이라 왔다 갔다 하기 힘들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바깥과 단절해주는 두껍고 불투명한 비닐.
그리고 따뜻해 사시사철 작물을 재배해내도 아무 의심 받지 않은 시설.
노을과 찹쌀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짓는 나에는 그야말로 최적화된 장소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노을아 부탁해!”
집에서 가져온 모종판을 한옆에 두고, 총총거리며 비닐하우스의 내부를 구경하는 노을에게 밭 갈기를 부탁했다.
“알았다! 컁!”
내 부탁을 들은 노을은, 기다렸다는 듯 통하고 밭에 코를 박았다.
두두두두.
노을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비닐하우스는 구조상 트랙터가 들어 오지 못한다.
결국, 경운기같은 다른 기구를 이용해 밭을 갈아줘야 하는데, 그것도 요령이 있어야지 아무나 못 하는 기술이다.
정말이지, 노을이 없었더라면 농사를 짓는데 많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다했다!”
순식간에 비닐하우스 한 동의 밭 갈기 끝내고 온 노을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연신 고개를 치켜세웠다.
칭찬해 달라는 소리였다.
“역시. 고마워. 노을아.”
고마움을 전달하며 잔뜩 털을 긁어 주자, 케헤헹 거리며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낸다.
“그럼 이제 내가 해볼까.”
노을이 밭을 간 후에는 내 차례였다.
슥슥.
가지고 온 괭이로 고랑을 슬슬 판 뒤에, 두덕을 만들고, 검은색 비닐로 두덕을 씌워준다.
검은 비닐의 한쪽을 흙으로 쌓은 뒤, 걸으면서 쭉쭉 펴주면, 완성.
하나를 완성하고 허리를 펴자, 내 옆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컁! 잡았다! 찹쌀이 달려라!”
언제 가져갔는지.
비닐 한롤을 도랑 끝으로 가져간 노을이 비닐을 앞발로 턱 누르고는 찹쌀을 향해 외쳤다.
“꽈아아악!”
도도도도!
롤 부분을 부리로 물고 있던 찹쌀이 노을의 외침과 동시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두덕을 달렸다.
“푸흡.”
오리 궁둥이를 뒤뚱거리며 비닐을 물고 뛰는 모양새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비닐 깔기까지 마치고.
“크으. 물맛이 꿀맛이네.”
잠시 쉬며 물을 마시자, 내 옆에 쪼르르 따라온 노을이 찹쌀에게서 물을 받아 마시며 나와 똑같은 포즈를하고 말했다.
“캬항! 물맛이 꿀맛이다. 컁!”
“나만 안 나는 거냐 꽉?”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에는 세트플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뾱뾱뾱뾱!
노을이 모종을 심을 구멍을 파면,
푹, 스윽.
내가 그 구멍에 모종을 넣어 흙을 덮고,
꽈아아악!
찹쌀의 물대포로 마무리.
한참을 삼위일체처럼 작업하고 있자.
“오늘은 뭘 심을 거냐?”
앞서서 구멍을 뚫고 있던 노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일단 호박 좀 심고, 스테비아 방울토마토도 심으려고.”
“스테비아 방울토마토? 그게 뭐냐?”
“아주 다디단 방울토마토가 있어.”
“호에에? 그것도 팔 수 있는 거냐?”
다디단 토마토라는 말에도 토마토의 맛보다는 판매를 생각하다니.
이거이거 미식 여우가 아니라 사업가 여우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파는 거냐고 묻는 노을에게 나는 심고 있던 모종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건 선물용.”
“선물?”
“설탕을 가득 뿌린 토마토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거든. 그분께 드리려고.”
이제는 설탕을 잘 못 드신다고 하니.
그 못지않게 달지만,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토마토를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달콤함으로 인해 잠시나마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으면 했다.
원래 행복은 돌고 도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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