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5 ----------------------------------------------
지상편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어.’
류안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어째서지? 운명의 천칭을 조종할 수 있는 추를 3개에서 8개로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나는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걸려드는 바보가 아니야. 미안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보다 게임을 잘하는 상대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취미는 없거든?’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추를 모조리 사용해서 검은 태풍을 약화시켰다.
[거, 검은 태풍이 약해지고 있다!]
[좋아, 이틈에 군대를 후퇴시켜라! 뇌신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해!]
[길로틴 준장님은 어떻게 되었지?]
“준장님께서는 현재 레일건의 충격파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현재 의무대로 호송중이니 각급부대는 지휘관의 재량으로 행동하도록!”
[알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부를 던져버리고는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엔포서들에게 명령까지 내려버리는 류안.
그런 그를 바라보는 헨드릭은 입술을 깨물면서 분한 표정으로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올 마이티.]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야. 아틸라……아니, 헨드릭 황제. 오늘의 굴욕은 네가 그렇게 집착하는 6차전에서 반드시 갚아주고야 말겠어. 그 때는 요행이 아니라 순수하게 실력으로 박살내버릴 테니까 심연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지만 류안은 그가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심연에 갇혀있는 헨드릭은 외부의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을 리 없다.
만약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유라디스 은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테니까.
그러니 그가 잠깐이나마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십중팔구 운명의 추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상황.
한 마디로 그는 처음부터 제대로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헨드릭의 목소리는 두 번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류안은 그에 대한 고민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리기로 했다.
“좋아, 그러면……빌어먹을 자식이 되살아나는 일은 막은 모양이니까 이대로 주님을 구출하러 가보실까?”
***
광대는 율리안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으면서 융합되어가는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이번 소재는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실패해버리신 겁니까? 헨드릭님.”
[닥쳐라 지크!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부정행위를 도와준 발할라의 신이 존재하는 게 틀림없어! 다시 유라디스 은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오만한 녀석들에게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다!!]
쾅!!
대지가 갈라져버릴 정도로 사납게 진각을 밟으면서 분노를 표출한 헨드릭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쿵쿵거리며 물러나버리고 말았다.
이번 일이 실패한 이유는 크게 2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심연의 각성과 미니게임이 융합되면서 그 보상이 절반으로 떨어져버린 것.
말이 절반이지 미니게임 때문에 심연의 각성으로 받아낼 수 있었던 보상의 3분의 2도 회수할 수 없는 지경으로 너프해 버렸기 때문에, 헨드릭의 부활은 완전히 좌절되어버리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불행의 대가가 율리안을 매개체로 발현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번 시도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뭐……우리들의 불행이 당신에게는 행운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중장님. 나락의 도약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빠져나간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
의식을 잃어버린 율리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당신과 헨드릭님이 융합하지 못하는 게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저는 저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반쪽짜리 녀석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제발 우리들의 심연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 이야기는 헨드릭님께는 비밀입니다. 후후후후.”
“……”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광대는 흥이 올랐는지 그의 손을 붙잡고는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로젠바이스들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저희들에게는 아직 더 좋은 계획들이 남아있습니다. 헨드릭님은 꿈에도 모르고 있지만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은하의 지배가 아니라……잘해야 화장실에서 청소나 지배하고 있겠군요! 반쪽짜리가 원래 가져야 되는 분수대로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
그의 목소리에 맞춰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검은 그림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율리안은 마치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 뭔가에 조종당하면서 그의 리드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춤사위가 절정에 올랐을 무렵.
“보아하니……아쉽게도 이쯤에서 당신을 보내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당신처럼 매혹적인 댄스 파트너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겨버리는 것은 질투 나는 일이지만 그래도 신사답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광대는 그렇게 말하면서 율리안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면 저 위쪽에서도 부디 행복하시기를……공주님.]
[율리안 중장님! 율리안 중장님!]
희미하기 이를 데 없는 의식 속에서 교차되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율리안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
“1단계는 부정, 2단계는 분노, 3단계는 거래, 4단계는 우울, 5단계는 수용이었다. 하지만 6단계는……6단계는 도대체 뭐지?! 6단계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정신 차리세요. 율리안 중장님! 율리안 중장님!! 이런……”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 발작을 일으키는 그를 향해서 손을 들어 올리는 류안.
하지만 뺨을 때리기 직전에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에 차마 내려치지 못하고 멈춰버리고 말았다.
‘젠장, 하필이면 나락의 도약을 실패한 부작용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평소였다면[사내새끼라면 응당 왼쪽 뺨을 때린 다음에는 오른쪽 뺨도 때려줘야 제 맛인 법이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동안 느껴온 열등감과 개인적인 원한을 담아서 이리저리 찰지게 때려버렸겠지만 현재의 그는 섣부르게 때릴 수 없는 비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락의 도약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특수한 용액이라도 쏟아 부었는지 칠흑처럼 새카만 물속에 쓰러져서 흠뻑 젖어있었던 율리안
하지만 류안을 당혹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은 젖어버린 군복의 앞 셔츠가 풀려있는 상황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두 개의 물건이었다.
아니……그 이전에 그(혹은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크오오오오오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오랜만에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사납게 포효하는 흑염룡.
‘진정해 염룡아……아직 먹을(?)수 있는 건지 아닌지도 몰라. 최악의 경우에는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법이고……아, 아니. 그 이전에 이 녀석은 알맹이부터 남자라고?!’
[그러니까 곧바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이여! 지금 즉시, 라잇 나우, 이마 스구 아랫도리를 체크하거라!!]
‘아, 안 돼. 엄청나게 궁금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다가 첫 대면에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어? 나 지금 아가씨라고 했어?’
평소의 류안이었다면 그 정도의 성희롱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겠지만 지나치게 아름답게 변해버린 율리안의 모습에 어쩐지 소심해져버린 그였다.
‘원래부터 여장을 하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스트라이크하게 내 스타일이라니……’
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앵두 같은 입술.
긴 속눈썹에 어디하나 미운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고 묘하게 색기가 흘러나오는 얼굴.
정말로 달려있다고 그래도 괜찮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체성의 혼란이 느껴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류안은 뺨을 내려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으면서 키스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건가? 서방님이여.”
“으아아악!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냥 평범하게 마가 끼어버려서……나도 모르게 그만!”
“흐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그 남자는 조금 전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만?”
“……”
그녀의 말에 키스를 하려던 남자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류안은 펄쩍 뛰면서 놀라버리고 말았다.
“히이이익! 유, 율리안 중장님. 일어나셨습니까?”
“……”
아무런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율리안.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대격변(?)에 기절초풍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가슴에 생겨난 두 개의 덩어리를 발견하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차분하게 단추를 잠그면서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크흠, 크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현재 서계신 장소는 제 2기지의 지하 쉘터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남아있던 로젠 바이스들과 제국군의 군대는 전부 전멸해버리고 말았고……기지의 위쪽으로는 현재 정체불명의 검은 태풍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저희 2사람이 돌입해 들어온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
설명을 이어나갔지만 율리안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그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접근방식을 바꾸는 류안.
“요약하면 안전하게 모시겠으니 저희들과 동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합리적이군.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톤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마치 작은 새가 지저귀는 노랫소리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젠장……아프로디테님, 제발……제 정체성을 시험하지 말아주세요.’
류안은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씰룩거리면서 움직이는 율리안의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사랑의 여신을 향해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 오늘은 조금 더 넣었습니다. (뻔뻔)
다행이 내일부터는 날씨가 풀린다고 하니까 정신줄 붙잡으면서 더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는 제가 생각해도 조금 심하기는 심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