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241화 (241/291)

0241 ----------------------------------------------

지상편

***

호수공원에 도착한 크리스토퍼는 편지에 첨부되어 있는 약도를 확인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풀들이 우거진 한적한 장소.

‘너무 일찍 온 건가?’

손목시계로 확인한 시간은 10시 45분.

약속했던 12시까지는 1시간이 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피로감을 느낀 그는 벤치로 주저앉아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아우라씨의 말대로 조금이라도 잤어야 했는데……’

늘어지도록 긴 하품을 내쉰 크리스토퍼는 천근만근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과 싸워나가면서 그렇게 후회했다.

결국에는 참아내지 못하고 벤치로 쓰러져서 곯아떨어져버린 그.

크리스토퍼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여인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하으으으아아아앗!]

‘이게 무슨 소리야?’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던 크리스토퍼는 정사를 나누는 커플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다시 벤치의 등받이로 몸을 숨겼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후후후후. 아주 좋아, 로제! 조금 더 힘차게 엉덩이를 흔들어라! 이런 사랑스러운 암캐 같으니라고……]

‘로제님이라고?’

남자의 입속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에 하얗게 질려버리는 머릿속.

[하응, 하앙, 하아아아앙!! 제발 용서해주세요. 주인님, 이런 장소에서 사랑을 나누는 건 너무 부끄러워요!!]

[닥쳐! 감히 암캐 주제에 주인님에게 말대꾸라니……개목걸이를 차고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는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지? 암캐면 암캐답게 “멍!”이나 “왕!”으로 대답하라고 말했잖아!]

찰싹!

[하아아앙! 왕, 왕왕! 흐으으윽, 왕왕!]

남자는 달덩이처럼 새하얀 여성의 엉덩이에 빨간색의 손도장을 만들고는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여 나갔다.

[좋아, 좋아……이제야 자신의 주제를 학습한 모양이군. 후후후후. 귀 끝까지 붉어져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로제.]

[류안……아니, 주인님.]

물기를 띈 목소리로 대답하는 로제라는 여성의 목소리에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어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저렇게 음란한 창년가 로제님일리 없어! 분명히……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일 거야! 게, 게다가……로제님처럼 함몰유두도 아니었잖아? 절대로 다른 사람일 거야, 절대로!!’

두 사람 모두 Totenhemd을 차려입은 상태로 두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어서 정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밀한 부위들은 모두 천들을 걷어내어 알몸보다도 선정적인 모습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던 크리스토퍼는 여성의 유두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물론,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가 로제의 보이스를 쏙 빼닮은 점이라든지 체격이나 몸매가 비슷했다든지 하는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고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해 나가는 크리스토퍼를 압박해오는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그래. 개목걸이를 차고 길거리를 걷는 기분은 어땠지? 한 때는 자신이 수호하던 거리의 사람들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받는 느낌이 말이야.]

[하앗, 하앙, 하아아앙! 왕, 왕왕! 왕왕왕왕!]

[지금은 암캐가 아니라 과거에 팔라딘이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거야, 로제.]

[하으으윽! 차,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창피했어요. 주인님! 하아아앙! 하, 하지만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수치를 무릅쓰는 건……]

[정말로 부끄러웠던 거야? 기사단에서는 평소에 성유聖油를 바르고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판크라치온 경기를 즐겼다며? 남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말이야……솔직하게 말해 봐.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걸 즐기는 거 아니야?]

[하응, 하앗! 트, 틀려요. 그건……어디까지나 기사단의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하아아앗! 파, 판크라치온의 경기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없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판크라치온 선수를 보고 외설스러운 생각을 하는 건……원래대로라면 실례되는 일이라고요! 하아아아앙!!]

[그러니까 네가 했던 건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었다는 소리지? 하지만 어떤 꼬맹이는 네 알몸을 목격하고 발정해버렸다고 했잖아? 게다가 그 꼬맹이의 동정을 때주겠다고 했고 말이야……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도 처녀였던 주제에, 이런 음탕한 년!]

“그, 그만……”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어버린 크리스토퍼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려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도달하기에는 지나치게 작았던 목소리.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속으로는 남자에게 매달려서 요부처럼 헐떡거리는 여자가 로제일 리가 없다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최면을 걸어대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를 능욕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으으윽! 도, 도련님의 상대를 해드리려는 건 진심이었어요. 그 분의 아드님을 위해서라면……하아앗! 하지만 이제는 절대로 다른 남자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을게요! 누군가에게 함부로 알몸을 보여주지도 않겠어요! 오직 주인님을 위해서만……하아아아앙!]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로제……인정하도록 하지. 너는 최고의 암캐다! 그런 의미에서 물어보도록 하지……어디에다가 뿌려주도록 할까?]

“안 돼.”

남자가 꺼낸 말의 의미를 깨달은 크리스토퍼가 중얼거렸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렇다면 자궁으로 직접 쏟아주도록 하지. 임신해서 좋은 아이들을 만들어내라, 로제.]

하지만 그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두 사람.

“안 돼!!”

흥분한 크리스토퍼가 벤치의 바깥으로 뛰쳐나가면서 그들에게 뛰어들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 뒤쪽에서 달려 나온 검은색의 그림자가 뒤통수를 후려쳐버리고 말았다.

퍽!!

꿀럭, 꿀럭, 꿀럭, 꿀럭.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서 로제를 끌어안고는 젤리처럼 진한 백탁의 액체들을 쏟아내있는 남자의 모습이 악몽처럼 비추어졌다.

‘안 돼……로제님. 도대체 어째서……’

절망 속에 몸부림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손길을 뻗어나가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이윽고 두건을 걷어내면서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알려주고는 입술을 오므려가며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미안해요, 도련님.]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퍼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으아아아아악!!!”

“진정하세요, 도련님! 갑자기 왜 그렇게 날뛰시는 겁니까?!”

“로, 로제님?”

정신을 차린 크리스토퍼는 그녀가 벤치에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어 봤다.

“네,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도련님께서는 도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약속장소로 최대한 은밀하게 나와 달라고 부탁했더니, 팔자 좋게 낮잠이라니……하여간에 제가 잠시 동안에 자리를 비웠다고 그 사이에 나태해져버리신 겁니까?!”

‘낮잠이라고? 그, 그렇다면 전부 다 꿈이었다는 건가……하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다른 분도 아니고 로제님게서 그랬을 리가……’

따끔한 질책들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크리스토퍼는 조금 전에 펼쳐졌던 악몽 같은 일들이 전부 다 꿈이었다는 사실에, 실실거리며 터져 나오는 미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훈육을 하는 와중에도 경박하게 실실거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니. 교육책임자로서는 통탄스럽기가 이를 데 없군요. 이래서야 제가 조력자를 잘못 선택한 건 아닐지……”

“아, 죄, 죄송합니다, 로제님! 로제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어서 그만……크흠, 어……그런데 주변에서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벤치의 주변에서 진한 밤꽃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토퍼가 무심코 질문을 던졌지만, 그 순간에 근엄한 로제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져 버리더니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크흠, 크흠! 그나저나 도련님에게는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나흘 전에 저를 구해주신 생명의 은인이자, 특무부대 출신의 비밀요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뒤쪽에서 Totenhemd을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나오면서 악수를 신청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특무부대 출신의 소령인 류안이라고 합니다.”

“류, 류안이라고요?”

“……어디에서 저를 만났던 적이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자신의 꿈속에서 로제를 범해나가던 남자가 갑작스럽게 악수를 신청해오자 크리스토퍼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져버리고 말았다.

“이 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살해당했을 겁니다. 비록 펜져스 출신은 아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주인……아, 아니. 분이시니, 도련님께서도 많은 지도를 받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암……아니, 로제님.”

지나치게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의 불안감은 점점 더 가중되어 나갔다.

마치, 팽이를 돌렸다가는 계속해서 팽이가 돌아가는 악몽의 연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잡혀버린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안은 조금 전에 근처에서 사로잡은 여성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자신을 아우라라고 했지? 후후후후……계속해서 새로운 미녀들을 소개해주다니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은 좋은 녀석이로군.’

============================ 작품 후기 ============================

아픈 동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만에 또 이명이 괴롭히네요. 분량은 조금 적어지더라도 꾸준히 써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