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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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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는 헨드릭 황제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서 퀭한 눈동자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발견하자마자 한숨을 내쉬면서 다가오는 여성.
“……한 숨 주무시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여기에서 계속 이러고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아우라씨……”
그 얼빠진 대답으로 마음이 답답해져버린 그녀는 자신의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이 습관적으로 안경을 닦아내면서 농담처럼 질문을 던져나갔다.
“밤새도록 전설적인 황제님과 상담을 한 보람이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원래 그렇죠. 게다가 저는 사실……헨드릭 황제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태가 벌어진 그날.
크리스토퍼는 류안과 루치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전투를 목격하고는 정신이 빠져버려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구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로제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다가 구동계가 망가져버렸고, 뒤이어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지면에 파묻히면서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녁 무렵에서야 간신히 시작한 수호자들의 수색작업으로 반파半破된 로제의 소드피쉬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조종석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버린 상태였고 그녀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는 포기하지 않고 등화관제를 빌미로 시작된 범인색출작업에 지원해서 타리잔 전체를 누비고 다녔지만, 어떠한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나흘째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로제님이 그렇게 되어버린 건 전부 다 내 책임이야. 나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그 분을 지켜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알몸으로 판크라치온 경기를 펼치는 걸 즐긴다던지,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던지,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특이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크리스토퍼에게 로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파비안과 펜져스라는 존재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는 그들만큼이나 강하면서도, 기사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롤 모델이나 마찬가지.
덕분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나흘 동안 조금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신의 피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우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질책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휴우, 사람들이 제 충고를 무시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죠. 하지만 도련님에게는 반드시 이 말씀을 드려야만 되겠네요. 장담하는데, 지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시지 않는다면 도련님께서는 반드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실 거예요. 설마, 로제님에게 일어났던 일을 다른 사람들도 겪게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우라씨!”
지나치게 날카로운 일침을 받은 크리스토퍼가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되받아쳤다.
“제가 드린 충고가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나요? 수색작업이라는 건 온 신경을 동원해야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에요. 가능한 멀쩡한 정신에, 멀쩡한 컨디션을 유지해도 모자란 판에……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자신의 몸을 학대해버리면 악순환밖에는 되지 않는 법이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으려고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걸림돌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죠!”
“……”
아우라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뜬 그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충고를 계속해 왔다.
“알아들었으면 지금이라고 수면 캡슐에 들어가서 몇 시간이라도 쉬어주세요. 수호자들이 오늘 저녁에도 수색작업을 펼친다고 그랬죠? 저도 가능하면 지원해드릴 테니까요……물론, 팔콘 대장님께서 제 충고를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타리잔을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아직까지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사건을 일으켰던 당사자는 수호자들이 함부로 수색작업을 펼치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조력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빌미를 잡아서 그런 사람들의 주변을 집중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면……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람들은 제 참견이라면 질색을 해버리니까요……”
그러면서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우라였지만 크리스토퍼의 눈동자는 희망을 발견하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직접 팔콘 대장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지금까지의 수색방식은 뭔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요……그러니까!”
하지만 흥분해서 말을 이어나가던 그는 자신의 어깨를 얌전하게 눌러오는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활기를 되찾으셔서 기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선은 수면 캡슐에 들어가서 휴식부터 취해주세요. 수색작업은 어차피 저녁부터 시작할 예정이니까, 푹 쉬고 멀쩡한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게 대장님을 설득하는 것도 쉬워지지 않겠어요?”
아우라의 세심한 배려에 그는 마음속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우라씨……본의 아니게 수고를 끼쳐버려서……”
“괜찮아요. 원래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보좌해드리는 게 천직이니까……뭐, 지금은 반쯤 해고당한 상태기는 하지만 로제님을 대신해서 도련님을 돌봐드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뒷머리로 가슴을 밀착시켜오는 바람에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붉어져버리고 말았다.
“노, 놀리지 말아주십시오!”
“후후후후. 그렇게까지 과잉반응하실 필요는 없는데……기왕에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로제님이 취향이신가요? 아니면 저 같은 스타일을 더 좋아하시나요?”
“어, 어느 쪽이 취향이라니 그런……”
“아, 죄송해요. 도련님께서는 로제님을 사모하고 있었죠? 그 분의 알몸을 목격하신 다음부터는 밤이면 밤마다 스스로를 위로하시며……”
“어떻게 그걸?! 아, 아니……숙녀분께서 부끄러움도 없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 저는 이만 수면 캡슐로 가보겠습니다. 그, 그럼 이만……”
그렇게 대답한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뒤쪽에서 웃음을 터트려대는 아우라를 뒤로한 체 로봇처럼 딱딱한 걸음걸이로 의무대의 수면회복실을 목표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몇 개의 방을 지나왔을 무렵에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인이 은밀하게 한 장의 편지를 전달해주자, 그것을 살펴보다가 안색이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걸 누구에게 받은 거지?”
“죄송하지만 편지를 건네준 여자가 Totenhemd을 차려입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팔라딘의 증표를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게, 도련님에게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부탁]을 받았다는 시점에서 하인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크리스토퍼는 조금도 그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를 배신한 사람들은 내부에 있습니다. 호수공원으로 12시까지……부디 혼자서만 와주십시오, 도련님. R]
‘로제님이다!’
팔라딘의 증표를 사용했다는 수수께끼의 여성과 편지의 이니셜을 발견한 크리스토퍼는 그 여성의 정체가 로제일거라는 확신에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 나갔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에는 편지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우리를 배신한 사람들은 내부에 있다니……그렇다면 로제님이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서, 설마 기사단 내부의 배신자를 두려워해서……’
기사도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화이트 필립 기사단에 배신자가 있다는 내용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보는 순간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우라의 추론이었다.
[그 사건을 일으켰던 당사자는 수호자들이 함부로 수색작업을 펼치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조력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팔라딘이라면 확실히 등화관제의 검열대상에서 열외 되었지……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생각하면 은신처를 마련해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게다가 그 수수께끼의 파일럿은 특무부대의 식별코드를 사용하고 있었어. 그러니 팔라딘 중에서 특무부대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이 심어졌다고 그래도 이상하지 않아. 정말로 그렇다면!’
한 번 의심을 시작하자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처럼 자신의 음모론에 대한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완성되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만 발상을 전환했다면 로제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접선을 요청해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우라의 충고처럼 나흘이라는 시간동안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고려해볼 여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12시라면 시간이 별로 없잖아? 지금이라도 가능하면 빠르게 약속장소로 출발하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하던 크리스토퍼는 아우라와 길목에서 부딪치고 말았다.
“아얏! 도, 도련님?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외출복까지 차려입고……”
“앗, 죄, 죄송합니다. 아우라씨. 잠시 잠이 오지 않아서 가볍게 산책을 하러……”
“산책을 하러 가신다고요?”
그 말에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당황해버린 그는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려내지 못하고 어설픈 답변으로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네, 네……마,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도 하고 잠들기 전에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고 싶어서……이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면 저도 동행할게요.”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거죠?”
“그, 그러니까 그 가게가……여자들이 가기에는 지나치게 비위생적이거든요! 게, 게다가 우락부락하고 질 낮은 남자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서 아우라씨같은 분이 동행하시는 건 조금……”
“흐음……숙녀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라는 말씀이군요?”
“네, 네! 바로 그렇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빈곤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였지만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얌전하게 길을 비켜줬다.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따라가지는 않을게요. 점심 맛있게 드셔주세요, 도련님.”
“감사합니다. 아우라씨도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허겁지겁 자리를 피해버리는 크리스토퍼였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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