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239화 (239/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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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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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이상한 점들은 있었다.

유치원 시절만 해도 세희의 집안은 한복 값 정도는 쿨하게 눈감아주고 넘어갈 수 있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트를 할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명품들로 치장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더치페이는 물론이고 금전적으로 한 번도 어려워하거나 인색했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희는 나와 재회했을 때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어. 어째서 그 때의 나는 그 말을 의심해보지 않았던 거지?’

물론, 잘 사는 집안이라도 가계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는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한 번 의심을 시작하니 그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유치원 시절에는 그렇게나 찰싹 달라붙으면서 죠세핀느라고 인형취급을 하던 주제에……초등학교로 올라가니까 갑작스럽게 거짓말처럼 터치를 하지 않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딱히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배경 화면처럼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지……소름!’

같은 시점에서 세희는 여자아이라면 포기하기 어려운 치장을 멈추고, 주근깨 빼빼마른……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평범한 차림새를 고집하고 있었다.

재회했을 때는 몰라보게 아름다워졌다고 착각했지만 유라디스 은하에서 다양한 여자들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사실들을 토대로 재해석해보면, 그녀의 본래의 모습은 어렸을 때나 재회했을 당시에나 별다른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꾸미지를 않았을 뿐.

‘설마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이별이……아니,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세희의 설계대로 진행된 건가? 그, 그러고 보니까 우진이라는 녀석에게 반감을 가졌던 것도 90%이상은 푸념을 들어주면서 그랬는데……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소꿉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 붙임성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나?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일을 계획할 수가……’

하지만 류안은 유치원 시절에 세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후후후. 걱정하지 말고 누나에게 몸도 마음도 바치려무나. 엄마가 그러는데……괜찮은 남자애는 어릴 때부터 확실하게 조기 키잡을 시켜놔야 된대. 그러니까 내 취향대로 예쁘게 물들여줄게, 죠세피느!]

“끄아아아아아아아! 내 전생이 트루X쇼였다니 그랬을 리가 없어!!”

“꺅?! 까, 깜작이야. 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요. 그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절규하는 류안 때문에 그를 끌어안고 어미 새가 알을 품는 것처럼 보듬어주고 있던 로제가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양손을 붙잡으며 애원하듯이 질문하는 류안.

“솔직하게 말해줘. 로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그러니까 제발 나를 사랑하는 그럴 듯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말해 줘.”

“이유를 설명하라고 그래도……첫눈에 반했다고 밖에는……”

“그래?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겉모습에 반했다는 소리지? 좋았어.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

반문하는 류안에게 로제는 자신의 양손을 붙잡은 손을 풀어내더니 정좌해 앉으면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그대의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아니,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보다도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도 상관이 없겠죠. 하지만 제가 그대에게 빠진 건……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할 영혼의 떨림을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를 위해서 과거도, 기사단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온 규율마저도 던져버릴 수 있었죠.”

“영혼의 떨림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려고 하던 류안은 루치아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타인의 영혼을 살펴보려면 용안을 사용해서 눈을 체크하라고 그랬지?’

전생에서도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가, 영혼의 통로라던가 하는 글귀들을 읽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류안이지만 그런 말들을 진심으로 믿어본 적은 없었다.

덕분에 용안을 사용하는 게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각오를 다지면서 로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용안을 사용했다.

[로제]

성향: 사랑, 헌신, 질서, 자애, 정의, 희생.

현재의 감정: Benevolentagious(사랑이 넘쳐나는)

신성력: 600/ 600

영혼불의 세기: 맹렬함.

몰두하고 있는 테마: 류안

당신에 대한 호감도: 100/100

“커헉!”

정보 창을 살펴본 류안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낯간지러움과 심리적인 타격으로 내상으로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충격을 입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정도 각오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니……’

영혼불의 세기라는 개념은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용안으로 확인한 보증까지 받아버린 마당에는 로제의 진심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말은 곧 퇴로가 막혀버렸다는 뜻.

덕분에 류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의 정체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호의를 두려워하는 거였어.’

세상에서 오직 자신밖에 사랑해주지 않는 순종적인 여자라는 것은 남자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은 가져볼만한 로망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버리면 의외로 소름끼치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게 사실.

가령,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뺨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후려쳤는데도 불구하고 일말의 동요심도 없이 받아들여버린다면, 동요하는 건 오히려 뺨을 때려버린 당사자가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오죽하면 얀데레라는 단어가 있을가?

적절한 타협과 교섭으로 서로에게 맞춰가면서 조율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연애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건 마치 어떤 연금술사들의 현자의 돌을 사용해가며 등가교환의 법칙을 무시해버리는 것과 같다.

설령, 거기에 아무런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들만 계속해서 벌어질 리가 없어……분명히 뭔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라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세희와의 연애를 계속하면서 얻어버린 류안의 트라우마였다.

‘그 때 당시에는 내가 죽을 각오로 고생해서 얻어낸 보답이 돌아왔다고 믿었어. 하지만……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본능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녀와의 연애가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리가 없다고……’

자신의 취향대로 물들이겠다며 [조교선언]을 했던 세희였지만 막상 연애를 시작하니 그녀는, 자신에게 달라붙어오며 종래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데레데레한 모습으로 애정들을 과시해왔다.

마치, 간절하게 염원하던 뭔가를 얻어낸 사람처럼 게걸스럽게까지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때 당시에는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를 해본다는 생각으로 정상적인 멘탈이 아니기는 했지만……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집착이나, 소유욕은 정상이 아니었어. 그리고……터무니없는 애정공세들도 그랬고……’

과거에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연애를 해왔기 때문에 서로간의 애정도 식어나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죽음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을 때는 애정이 식어버린 것은 오직 자신만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프로모션으로 영혼의 괴리가 사라져버린 이후로도 그의 내면에 깊숙한 장소에서 잔재로 남아,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류안은 그 실체를 발견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사랑은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한다더니……설마 세희가 이런 식으로 내면에 살아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좋아, 실체를 확인했으니까 더 이상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나는 이번 인생에서 지난 생에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가지겠다고 맹세했어. 그러니까……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너 또한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세희야……그리고 그 때가 온다면 네 정체가 뭐였는지도 확실하게 밝혀내고야 말겠어.’

그렇게 다짐한 류안은 이번에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로제를 향해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고마워, 로제……네 덕분에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실체를 확인할 수가 있었어.”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로 다행이……흐읍?! 으으음, 하앗, 하아아앗.”

대답하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시작해버린 농후한 키스행위로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 애절한 목소리를 흘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그대라고 부르지 말고 류안이라고 불러. 그리고 말끝에는 가능하면“~요”자를 붙여주고 말이야……비록, 나이로만 따지면 네 쪽이 연상이지만 내가 원래 주인님 플레이를 좋아하거든!”

“그대가……하앗! 류, 류안이 원하면 그렇게 할게요.”

말실수를 했다가 함몰유두를 손가락으로 희롱당한 로제가 그렇게 답변해 왔다.

“좋았어……그렇다면 주저할 것 없이 어젯밤에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계속해서 진행시켜 볼까? 일단은 뭐부터 시켜보도록 할까. 이 발칙하기 이를 데 없는 가슴으로 파이즈리 펠라치오 봉사법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고……이번 기회에 야외 플레이로 숙녀로서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가르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히이이익!”

자신을 구속하던 트라우마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터무니없이 변태적인 플레이들을 떠올리면서 입맛을 다셔보이는 류안의 모습에, MAX치를 자랑하던 로제의 호감도 급격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가 선택한 옵션은 개목걸이 산책 플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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