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라이엄프-222화 (222/291)

0222 ----------------------------------------------

지상편

***

“수도원에서 테러가 일어났다고? 적들이 누구냐, 목적이 뭐지?”

테라스의 욕조에 앉아서 자신의 몸에 성유聖油를 바르고 있던 로제는 갑작스러운 보고를 받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전령을 다그쳤다.

“죄,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괴한들에 의해서 수도원의 사제들과 순례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대주교 은하(grace)께서 격노하시며 화이트 필립 기사단 전체의 출격을 명령하셨습니다.”

“대주교 은하의 호출에 우리 팔라딘들이 응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이런 참사가 일어날 때까지 수호자 놈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그,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알몸으로 호통을 치는 그녀의 모습에, 전령은 여러 가지로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 둘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대고 있었다.

“어째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냐? 이런 한심한 놈!”

“히이이익!”

그런 전령의 멱살을 붙잡으면서 호통을 치고 있으려니 테라스로 들어오는 한 명의 인물.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고 들었습니……우, 우왓! 로, 로제님……도, 도대체 지금 무슨 차림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오오오! 이거 크리스토퍼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파일럿 슈츠를 입고 오시다니 몰라보게 늠름하시군요!”

“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제발 옷을 입어주십시오! 수, 숙녀 분께서 그렇게 함부로 자신의 알몸을 내보이고 다니시면 안 되는 겁니다!”

“하하하하! 전사의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하시다니 도련님도 짓궂으십니다. 도련님은 장차 파비안님의 뒤를 물려받아 제국의 패도를 이어나가실 분! 천한 계집년의 알몸 하나 둘쯤은 웃으면서 흘려 넘기십시오!”

“아, 알겠으니까 제발 좀……”

“저도 부탁드립니다. 로제님!”

전령과 크리스토퍼가 필사적으로 권유하고 나서야 로제는 못마땅한 듯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옷을 받아 들었다.

“이거야 원……제국의 사내남아들이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군요. 알겠습니다! 신사 분들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신다면야……”

그렇게 대답하면서 의자에 앉아서 당당하게 옷을 차려입는 모습이 지나치게 남세스러웠기 때문에, 전령과 크리스토퍼는 새빨개진 표정으로 허겁지겁 뒤돌아서고 말았다.

“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제님……”

“참고로 저는 처녀입니다.”

“네? 처녀가 어떻게 그렇게……아, 아닙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었습니까? 그것 참 아쉽게 되었군요. 크리스토퍼 도련님께서 드디어 여인을 품기로 결심하신 줄 알고 기쁘게 응해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죄,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각오를 다지지 못했습니다! 이, 이번에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출격에 저도 동행시켜달라는 내용입니다만……”

“그런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따라오시지요. 성지를 더럽힌 불순자들의 피로 사냥의 즐거움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크리스토퍼의 말에 흥취가 올랐는지 알몸보다 조금 나아진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연상시키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로제가 앞장서 걸어갔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가능하면 소란을 일으킨 자들을 죽이지 말고 체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겁니까? 지금 체포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만……”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목소리에 압도당하는 그였지만 더듬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제, 제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지만……이번 사건은 어딘가 이상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붙잡아서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배후를 알아보시는 것이……”

“하아……”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주장은 길게 이어져 흘러나오는 로제의 한숨에 가로막혀지며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래도 제가 도련님을 과대평가한 모양이로군요. 처음에 도련님께서 우리 팔라딘들과 함께 수련을 원하신다고 들었을 때는 조금 더 전망이 밝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감히 성지를 더럽힌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자고요?”

“그, 그래도 가능하면 재판을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정황을 파악하는 게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로제님께서는 펜져스도 아니신데……컥!”

쾅!

다음 순간에 크리스토퍼는 로제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히면서 허공으로 붙들려 올라갔다.

키 180의 건장한 체격을 갖춘 남자를 한 손으로 너무도 쉽게 들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하면서, 검은색 머리카락만큼이나 검붉은 불꽃같은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분노를 표출해오는 그녀.

“저희 팔라딘들이 나락의 도약으로 몸을 던지지 않는 이유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서, 정치나 세간의 여파에 좌우되지 않고 저희들이 섬기는 신앙에 그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건 아닐 텐데요……도련님?”

“죄, 죄송합니다. 로제님……용서를……”

까드드득.

“또다시 틀리셨습니다. 크리스토퍼님……제가 도련님의 교육을 자처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의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싶다면 겨우 이런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에게 호통을 치고 훈계를 내리셔야 되는 겁니다. 그게 타인의 위에 서는 사람이 가져야 되는 뻔뻔함이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다음부터는 쉽게 굽혀버릴 주장은 그렇게 경솔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도련님.”

“커헉, 컥, 컥, 컥!”

놓아주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서 컥컥거리는 그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그를 향해서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도련님. 말씀하신대로 부하들에게 가능하면 적들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전쟁터에서 적을 포로로 사로잡는 것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사항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

트라이저 강습함과의 합류지점으로 접근하던 류안은 두 가지 선택사항을 놓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어차피 인생은 도 아니며 모야! 여기까지 와서 허탕을 치고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 지역에 남아서 얻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쓸어가도록 하자! 비록 전략적인 가치는 없다지만 신앙의 중심지라면 뭔가 재미있는 물건이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류안은 재빠르게 레드폭스를 향해서 통신을 날렸다.

“레드폭스! 로스탐을 탈출 포인트 근처에 강하시키고 지금 즉시 타리잔을 빠져나가!”

[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희 부대는 둘째 치고 연합군을 지휘할 사람이……]

“부대의 지휘는 클라크에게 맡긴다! 작전명 ‘대역’이라고 말하면 알아서 잘 할 거야. 세부적인 문제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라고 전달해 줘!”

[……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라크 병장에게요?]

“후후후후. 의외성이라는 건 어디에서나 먹히는 법이니까.”

[너무 의외라서 부대가 날아가 버릴까봐 걱정됩니다만……]

레드폭스의 솔직한 감상에 류안도 속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기분을 떨쳐내 버리면서 겉으로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걱정하지 마! 내가 믿는 그 녀석이 아닌 그 녀석이 믿는 그 녀석이 아닌 누구도 믿지 않는 그 녀석을 믿어! 녀석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

[……!! 그거 곰곰이 따져보면 결국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 인선이라는 소리잖아요?!]

“시끄러우니까 로스탐이나 주고 빨리 돌아가! 수호자들의 감시드론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게 안 보여?!”

[네, 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허겁지겁 드랍 포트를 사출하고는 트라이저 강습함을 스텔스로 은신시키며 타리잔의 상공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품에 안겨서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헐떡거리는 엑스.

“하아, 하아……정말이지 지독한 분이시네요. 죽으시려면 혼자 죽으실 것이지……저까지 동행하게 만드시다니……”

“내 목숨은 네 거라며? 그 말은 즉 도원결의……아, 아니. 무덤까지 함께하자는 사랑의 맹세가 아니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대장님만 혼자서 죽고 저는 그 보험금으로 남은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당연하잖아요. 정말이지 눈치가 이렇게 느려서야 어떻게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건지 원……”

“나도 사랑해, 엑스.”

“제발 죽어주세요, 대장님.”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드랍포트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커스터마이즈로 완전히 몰라보이도록 달라진 로스탐의 조종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트라이엄프 부대와 공화국의 도장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추가장갑등을 통해서 외견이 완전히 달라보이도록 변장을 끝내놓은 상태.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기록과 대조해서 이 기체가 로스탐이라는 사실을 알아볼지도 모르지만, 여차하면 목격자를 한 명도 살려두지 않는 완벽한 암살(이라고 쓰고 학살이라고 읽는)을 통해서라도 비밀을 유지할 계획이었던 류안은 드랍포트에 진열되어 있는 무장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루치아.

쾅!!

[하하하하하하!! 반쪽이……정말이지 너라는 녀석은 미치도록 사랑스럽구나! 우리가 헤어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지? 그 짧은 시간동안에 설마 여기까지 성장하다니……]

새파란 화염을 전신에 두르고는 주변을 초토화시키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

“우리가 약속했던 3분 동안의 마사지를 허락해주면 더 엄청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소매치기를 비롯해서 마사지, 온갖 종류의 손기술이 집대성된 초절기교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갈망을 성욕이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류안이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루치아에게는 역시나 통용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반쪽이……나는 지금 너무도, 너무도 몸이 달아올라서 더 이상은 나 자신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다! 나의 몸에는 지금 어머님의 피가……어머님의 피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말이다!!]

쾅!!!

그 말과 함께 지면을 박차면서 뛰어오르는 루치아의 돌격에 류안도 마주 달려가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좋아, 정말로 그렇게 싸우는 게 소원이라면 원하는 대로 때려눕혀서 내 여자로 만들어 주마!!!”

리엑터 시스템으로 그람의 힘을 불러일으킨 로스탐의 주먹과 검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루치아의 손톱이 타리잔의 외곽지역에서 맞부딪쳐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큭, 장마인데 비는 안오고 덥고 후덥지근만 하다니...

하필이면 에어컨까지 고장나서 더위로 정신이 이상해져버릴 것 같네요.

홍수와 출퇴근시간을 피해서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절단마공, 아, 아니...끊을 타이밍을 찾느라 분량이 또 살짝 줄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조만간 연참검을 뽑기 위해서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표지는 소설의 분위기와도 살짝 안 맞는 것 같고...

그렇다고 새로 구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조아라의 기본 스킨으로 변경해 버렸습니다.

장르도 게임에서 퓨전으로 바꾸고 메인의 소개란에도 내용을 살짝 변경했는데 가볍게 기분 전환을 해보려고요. ㅎㅎ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