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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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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회담이 끝나고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가면을 내려놓은 류안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 젠장. 마치 X를 싸고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하네.’
[당신과는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죽음’을 생포하신 일에 대해서는 꼭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들은 순간에 ‘당했다’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벤 체스터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
‘길로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죽음의 생포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천족의 피가 섞여져 있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설마 천리안이라도 사용하는 건가?’
당시에 류안은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영체상태인 엑스를 대놓고 능욕하면서 촉수플레이를 즐겼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의 한 마디에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선제압이 목적이었는지 스카우트에 대한 논의를 주고받는 도중에 그는 두 번 다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류안이 철면피를 깔고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영체상태인 그녀를 능욕하며 확인한 결과 직접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 대가로 엑스에게는 차가운 눈초리로 매도당하고 말았지만…….
[자기 여자에게는 따듯한 사람이라고 그러시더니 모르는 사람의 면전에서 알몸의 촉수플레이라니……아무리 투명 인간이라도 창피한 건 창피하다고요? 나중에 꼭 죽여 버리겠어, 귀축……]
[크, 크흠.]
어쨌든 처음부터 휘말리기는 했지만 스카우트에 대한 회담 자체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제안을 받은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우주군의 무서움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내용이기도 했다.
회담장에서 벤 체스터는 가장 먼저 자신의 품속에서 유리 케이스를 꺼내어 그 속에 들어있는 은색의 구슬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저희 스캔사에서 개발한 방첩로봇입니다. 이 기계를 작동시키면 반경 50m에 녹음기나 도청장치가 무력화되고 내부에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실례라는 사실은 알지만 중요한 비즈니스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소인 만큼 작동시켜 놓겠습니다.”
‘길로틴 지못미.’
지이이이잉!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고소미를 음미하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루는 것 같은 벤 체스터의 수완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까지 느껴지고 말았다.
스캔 사는 우주군에 통신기기를 납품하고 있는 방위산업체의 하나로 연맹의 입장에서는 고만고만한 하청업체들 중에 하나지만, 잔인하게 평가하면 현재의 가온공화국보다도 국제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회사를 대표하는 CEO가 일개 행성에서 스카우트 제의나 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재정상태의 건전성이나 자금동원력의 규모를 생각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꿈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일단 저희 쪽에서 제시하는 계약금은 일차적인 선불로 500(한화 5천억)만 골드입니다. 연봉은 매년 20만 골드씩 지불하며 성과금은 별도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또한 함선이나 병기의 정비 및 보급, 메인터넌스의 비용은 전부 다 스캔사에서 부담하니……”
나열하기만 해도 방위군과는 비교가 안 되는 관대한 계약조건들이 나열되어가자, 정말로 입을 딱 벌리면서 듣고 있던 탈리아는 어느 샌가 훌쩍거리면서 류안을 부둥켜왔다.
“흑흑흑흑……그동안 고생 많았지? 류안……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고생했으니까 이렇게 좋은 날도 오는 거야. 정말로 고생했어, 흑흑흑흑……”
“하하하하. 여자 친구 분께서 정말로 남자 친구 분을 많이 사랑하시는 모양입니다. 방위군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은 저희 우주군에서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류안 중령님처럼 자수성가하신 분들을 지원해드리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주군의 스카우터이자, 스폰서들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네, 훌쩍……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끄응, 별로 좋지 않은 흐름인데……’
앞뒤의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벤 체스터의 언변에 완전히 넘어가버린 탈리아는 그와 함께 벌써부터 계약이 성사되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류안도 방위군 따위의 쓰레기 조직은 당장에 때려치우고 우주모험이나 시작해볼까라는 유혹에 사로잡히는 매력적인 조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덥석 받아들였다가는 우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호구로 기록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발할라에 도전한다는 노예계약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서명해버린 전적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뭐, 연봉협상과 근무환경에 대한 1차적인 논의는 이쯤으로 해놓고 다음으로는 류안 중령님께서 맡으실 임무와 함대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벤 체스터는 투영장치를 올려놓고는 허공으로 홀로그램을 띄워 올렸다.
“저희 스캔사에서 개발한 최신형 경 항공모함 라인필리아입니다. 평균가용인원은 약 1만 2천명, 마장기는 약 500대에서 700대 정도가 수용되며 반영구적으로 가동하는 최신형 에너지 순환 시스템을 완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라인필리아를 중심으로 약 20여척 규모의 소형 전대가 편성되게 될 예정이니 중령님의 특기를 십분 활용해서 임무를 수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전대장이라니 배포가 크기는 크군.’
기껏해야 최신형 순양전함 정도의 함장으로나 취임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던 류안은, 벤 체스터가 상상을 뛰어넘는 제안을 건네 오자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우주군과 스캔사를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는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저희 회사의 지원을 받는 만큼 회사의 상표가 들어간 제품들을 사용해주셔야 되겠습니다. 매스컴에 노출될 때도 항상 저희 회사의 마크가 들어간 옷이며, 모자, 시계, 악세서리들을 착용해주셔야 되고요. 가끔씩 인터뷰를 받거나 그럴 때면“스캔 사는 우주 최고의 기업입니다. 스캔 사의 물건들을 사주세요.”라고 홍보해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류안과 함께 이 회사를 위해서 뼈를 묻겠습니다!”
완벽하게 세뇌당한 탈리아는 그렇게 외치면서 충성을 다짐했지만 그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류안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난은 거기까지만 하시고 진짜 임무가 뭔지나 알려주십시오.”
“하하하하!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경청하셔서 농담을 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까? 뭐, 그래도 저희 회사를 홍보해달라는 이야기는 사실이니까 그 부분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우주군에 임관하시면 우리 스캔 사의 얼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언제나 국제 매스컴들의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우주군이기 때문에, 우주군에 임관하는 사람들은 일개 사병이라도 예외 없이 지역사회의 동네 상가에서라도 스폰서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스캔 사의 경우에는 그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편이라서 5~6명의 제독을 자회사의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단숨에 전단장으로 데뷔시키는 류안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회사의 사활을 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슈퍼 루키의 취급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중령님께서 처음으로 맡아주셔야 하는 임무는 리온펠트 성계의 외곽지역 개척 작업을 지원해주시는 일입니다. 그 지역에는 사나운 우주 해적들이 날뛰고 있거든요……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녀석들은 아니니까 소탕하시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외에도 사소한 임무들이 내려올지도 모르지만요.”
사소한 임무라는 말이 살짝 거슬리기는 했지만 우주해적 토벌은 우주군에서 각 데뷔한 제독들이,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보이면서 손쉽게 출세할 수 있는 왕도 중에서도 왕도라고 할 만한 임무였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들과 이야기들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려진 결론은 하나.
류안의 입장에서는 좋아도 지나치게 좋은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이 정도의 스카우트 제안을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이렇게까지 완벽한 데뷔 조건을 갖춰놓는 수완이 보통이 아니야. 벤 체스터……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별다른 의심을 할 필요도 없이 그가 준비해놓은 레일대로만 달려간다면 아무리 바보라도 적어도 2년, 못해도 3년 안에는 함대나 전단을 이끄는 제독의 반열로 올라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주군에서 그런 입지를 가지는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스캔 사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깔려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가 노리는 것은 단순하게 새로운 간판스타를 영입하겠다는 데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동안 고민을 하던 류안은 무거운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얼마든지 편하게 말씀하십시요…….”
“저에게 이렇게까지 투자를 해주시는 목적이 뭡니까?”
“그거야 당연히 류안님의 성공을 후원해서 그에 따른 반사이익과 리베이트를 얻는 게……”
“……이게 단순한 스카우트 논의였다면 저도 그 말을 믿었을 겁니다. 하지만……그게 가온공화국이나 우주군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로비를 감수하면서까지 벌이는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그러니까 사실을 말씀해주십시오……제가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 무슨 요구를 하실 생각입니까?”
류안의 이야기를 들은 벤 체스터는 역시나라는 표정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환한 미소로 그의 질문에 대답해 왔다.
“팔란티오 행성을 연맹이 가져가게 될 겁니다.”
‘……역시나.’
속셈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가온공화국이 낙찰 받은 행성을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시해올줄은 몰랐던 류안은,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어버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