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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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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류안은 상황을 수습하는 한편으로 군대를 재편해서 전쟁준비에 착수했지만, 출병을 앞두고 걸려오는 상부의 제동에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젠장……전쟁은 스피드가 생명인데 이런 빌어먹을 원정대 같으니라고.’
어지간한 사안이라면 야전사령관의 전시특권으로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번에는 합참에서 작정하고 공식적으로 내린 제동조치였기 때문에 간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상부가 그렇게 강력하게 조치를 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로 짐작 가는 사건들이 많았지만, 요약하자면 그의 존재가 단순하게 일개 야전 사령관으로 취급하기에는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게 원인이다.
원정대는 그에게 3명의 사람들의 연이은 방문을 응대하고 임무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방문자는 다름 아닌 길로틴 준장.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짧으면서도 간단하게 이루어진 대화처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길로틴은 여전히 당당하면서도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날카로운 눈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제시카 대령과 소령으로 진급한 블랙해머가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제시카 교관님.]
[가능하면 목례만 취하세요. 길로틴에게 우리들의 관계를 들키기라도 하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가?”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이 수상하다는 것을 간파한 길로틴이 그렇게 질문해왔지만, 류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해 왔다.
“예전에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외부교관으로 오셨던 적이 있습니다. 제시카 대령처럼 아름다우신 분은 잊고 싶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죠.”
“그런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넘어갔지만, 그의 말에 대번에 인상이 험악해져버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화르르륵
불똥이 튀어나올 정도로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는 블랙해머의 눈빛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웃어보였지만 속으로는 단숨에 짜증이 솟구쳐 오르고 말았다.
‘……이 XX새끼가 왜 갑자기 나를 노려보고 지랄이야? 하아, 하여간에 이래서 내 여자들은 곁에다가 둬야 한다니까. 꼭 이렇게 벌레새끼들이 꼬여드니 원……’
제시카의 반응을 보면 그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모양이지만,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타지생활에 시달리고(?)있는 여자들의 면면이 떠오르면서 하루라도 빠르게 권력을 잡아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고민을 뒤로하고 집무실의 소파에서 길로틴과 마주앉는 류안.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사전에 공지를 받지 못했나? 귀관의 부대에서 이루어진 내부고발에 대한 감사를 위해서 찾아왔을 뿐이네.”
주변의 눈을 생각해서인지 ‘네놈’이라는 호칭 대신에 ‘귀관’이라고 말하면서 점잔을 떠는 모습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찾아온 이유는 권위적이기 이를 데 없는 그답게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내부고발이라니 웃기고 있네.’
길로틴이 공식적으로 그를 방문하게 된 계기는 황당하게도 트라이엄프 부대 소속의 한 부사관이, 헌병대에 류안의 부정행위를 폭로하는 내부고발을 한 것이 계기였다.
그는 류안이 공화국의 군인이라는 입장을 망각하고 독립부대를 사유화하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가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과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서 조직을 장악하고는 부대 예산을 마음대로 사유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이익보다 제국민들의 이익을 우선했으며, 군인으로서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언행을 남발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하 여성들을 희롱하는 등의 행동으로 공화국 군인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뭐, 부하들을 성희롱했다는 이야기는 그렇다고 쳐도……나머지 주장들은 완전히 악의적인 해석들인데.’
사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부대를 100% 깨끗하게 운영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방위군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 썩어빠진 부대 운영과 비교하면 비교당하는 것조차 창피스러울 정도로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현재 원정대 병사들의 월평균 임금은 생명수당까지 포함해서 겨우 20실버(20만원)에 불과했지만 트라이엄프 부대의 경우에는 3골드(300만원).
사하스 공화국이나 연맹 우주군 사병들의 월평균 임금인 5골드에 비교하면 선진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부대원들의 월급을 방위군에서 받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예산이 아니라 승리로 쟁취한 전리품에서 지불하고 있는 류안의 방식은 원정대의 귀감이라고 불려도 부족하지 않은 양심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월급을 제외하고도 부대원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각종 복지 문제와, 성과금, 상여금, 전사자들과 퇴역자들에 대한 예우와 조치같은 민감한 사항에서도 그가 직접 세세하게 신경을 쓰면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정대의 군인들 사이에서는 트라이엄프 부대가 신의 직장으로 불리면서 전속희망률이 폭발적인 수준이었다.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부대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렇게 대우를 받는 부대원들의 충성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뭐, 아무리 우리 애들이 충성스러워도 어디에나 쓰레기들은 섞여들기 마련이니까. 보나마나 이번 내부 고발자도 길로틴 이 인간이 나한테 경고를 보내려고 심어놓은 새끼가 틀림없어. 하여간에 이 인간도 양반은 못 된다니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빌미를 잡아서 내부감사로 날려버릴 수 있다.
지나치게 뻔히 보이는 길로틴의 협박에 슬그머니 짜증이 솟아오르면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게 된 류안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 도발을 받아쳐줬다.
“감사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아, 이참에 아예 책임을 지고 물러날까요? 그렇지 않아도 우주군에서 스카우트가 찾아왔다고 그래서, 실직해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던데……”
길로틴의 다음 차례로 예약되어 있는 방문자에 대한 언급을 슬그머니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눈매가 가늘어지면서도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길로틴.
“……하하하!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군. 나 또한 이번 내부고발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귀관을 변호해주기 위해서 직접 방문했을 뿐이네. 그러니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이래 뵈도 명색이 내가 귀관의 후원자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류안을 일개 장기말이자 유용한 소모품으로 생각해왔던 그가, 막상 사하스 연맹의 우주군이 그에게 흥미를 가지고 스카우트를 파견해 오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부랴부랴 그를 방문해 왔다.
마치 팀에서 노예처럼 부려먹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스카우트 될 상황에 처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감독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항상 자신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통쾌하기는 했지만, 류안은 자신의 우위를 단순하게 기분 좋은 수준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후원자면 후원자답게 후원을 해주셔야 대우를 해드리죠. 이거 뭐, 저는 지상에서 온갖 생고생을 다하면서 어렵사리 살아가는데……저 위쪽에서 내려오시지를 않는 게 어지간히 편하신 모양입니다?”
“준장님께 감히 무슨 말버릇이냐?!”
옆에서 듣고 있던 블랙해머가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게 외쳤고 제시카도 입장 때문에 간과하고 넘어가기는 어려웠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류안의 도발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소령 나부랭이가 어디서 반말을 지껄이고 지랄이야?”
“뭐? 이 새끼가……”
쾅!
다음 순간에 길로틴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블랙해머를 향해서 다가가 들고 있던 지휘봉을 휘둘러서 뺨을 후려쳐버렸다.
퍽!
“준장님……”
“주제파악을 해야 하는 건 그쪽이네, 소령. 귀관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은가?”
“죄, 죄송합니다. 제가 터무니없는 실태를…….”
“물러나게.”
길로틴의 명령을 받은 블랙해머는 이성을 되찾았는지 군인다운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부하의 실례를 사과하지. 녀석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징계를 내릴 테니 귀관이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그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준장님께서 저를 대하는 방식을 올바르게 바꾸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뼈가 담겨져 있는 류안의 말에 길로틴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끼면서, 원래 그의 스타일로 돌아가면서 입을 열었다.
“내부고발을 빌미로 잡은 건 사과하지. 그래서……단도직입적으로 귀관이 원하는 후원이라는 게 뭔가?”
“그 전에……제시카 대령은 내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그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 중에서 하나니까 말이야……여기에서 나누는 어떤 이야기도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전속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길로틴에게 그렇게까지 신뢰를 받고 있는 제시카의 수완이 놀랍기 짝이 없었지만, 류안은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제 요구조건은 2가지입니다. A급 마장기 페가수스 100대와 루치아, 그녀를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둘 다 터무니없는 조건이군.”
“이래보여도 최소 조건입니다. 현재의 전황에서 제가 연맹으로 떠나버리는 것보다는 이 제안을 받아주시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일 텐데요?”
“……귀관에게는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율리안 중장의 경우에는…….”
“우주군에 입대하는 게 언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양립했는지 모르겠군요. 연맹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이자, 형제가 아닙니까? 연맹 헌장에 그렇게 적혀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주군을 위해서 싸우는 게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지 말게. 그놈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인재들을 유출해 가는지는……”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하시면 그쪽부터 먼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대지 마십시오.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희생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지,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떠들어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문제의 본질을 계속해서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하지 말고 똑바로 직시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최소 조건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우주군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미련 없이 공화국을 떠날 생각이니까요……그러니까 그 잘난 엔포서들의 정보력으로 잘 가늠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떠나는 것과 남는 것,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를 말입니다……”
반쯤 블러핑이 들어간 협박이기는 했지만 우주군에서 직접 스카우트를 파견하는 행위는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일개 인재의 거취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서는 궁지에 몰려있는 공화국의 존망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아닌, 터무니없는 규모의 로비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길로틴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류안이 그 부분을 악용하는 부분이었다.
“페가수스를 200대……양도하겠네. 하지만 루치아는 넘겨줄 수가 없네.”
“페가수스는 50대만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루치아는 반드시 넘겨주십시오.”
“네놈……”
“곤란하시면 나중에 오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어차피 우주군 스카우터와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결정할 생각이거든요.”
“큭……알겠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입장을 이용할 생각이라면……고려해보지. 스카우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을 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러면 살펴가십시오.”
길로틴에게 시원하게 한 방을 날려준 류안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배웅해 줬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연맹에서 파견한 우주군 스카우터가 방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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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틴이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다음 편에 나옵니다.
주인공도 출세했네요...쳇.